<삼국연의>의 적벽대전때 ‘만사구비, 지흠동풍(萬事俱備, 只欠東風)’의 상황에서 제갈량이 차동풍(借東風)한 이야기는 아주 유명하다. 특히 무슨 일을 이루기 위하여 다른 조건은 갖추어져 있는데 중요한 한 가지가 빠진 경우가 있다. 그럴 때, 그 빠진 것을 채워주는 것이 왕왕 우리가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데 간과했던 것일 수 있다. 그것은 마치 강을 건널 때 돌을 집어 징검다리를 만들어 놓는 것과도 같은 일이다. 황위쟁탈전에서도 그런 일은 일어난다. 황위가 강물 건너에 자신과는 멀리 떨어져 있을 때, 돌을 집어 징검다리를 놓으면, 강을 건너 황위를 차지할 수 있게 된다.
황제가 아들을 한 명만 낳는다면, 기본적으로 황위쟁탈전은 벌어지지 않을 것이다. 삼성그룹(2대), 현대그룹(2대), 효성그룹, 금호그룹, 두산그룹등에서 형제의 난이 일어났었지만, 아들이 한 명밖에 없는 현재의 삼...성그룹이나 현대자동차그룹의 경우에는 후계자다툼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모든 황제가 아들을 낳게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런 경우, 중국고대에는 다른 사람의 아들을 자신의 아들로 입양하는 풍속이 있었다. 양자를 들이는 것이 일반 백성이나 신하의 집안에서는 평범한 일이라 할 수 있지만, 황실에서는 천하의 주인을 정하는 중대한 일이 된다.
황제가 양자를 들이는 경우는 둘로 나눠볼 수 있다. 하나는 혈연관계가 없는 경우이고, 다른 하나는 혈연관계가 있는 경우이다. 그런데, 중국인의 관념상 아무런 혈연관계가 없는 양자가 황위를 승계하는 것은 황실이나 신하 및 백성들에게 받아들여지기 쉽지 않다. 그리하여, 역사상 그런 경우는 많지 않았고 오직 오호십육국시대에 발생한 바 있다.
후조(後趙)때 조명제(趙明帝) 석륵(石勒)의 부친인 석주갈주(石周曷朱)는 비범하고 고귀한 용모를 지닌 석호(石虎)를 양자로 삼아 친자식처럼 키운다. 석호와 석주갈주간에 어느 정도의 혈연관계가 있는지는 분명하지 않으나 최소한 가까운 친척관계가 아닌 것은 분명하다. 333년 석륵이 죽은 후 태자 석홍(石弘)이 승계하나, 실권은 이미 석호가 장악한 상태였고, 다음 해 석호는 석홍을 죽이고 그 자리를 차지한다. 이후 스스로 천왕, 황제를 칭하니 그가 바로 조무제(趙武帝)이다.
후주(後周)를 건국한 곽위(郭威)는 아들이 없었다. 원래, 시영(柴榮)은 어려서 집안이 몰락하자 곽위에게 시집간 고모에게 의탁한다. 전해지는 바로는 그의 고모가 원래 당장종(唐莊宗)의 비빈이었는데, 당장종이 죽은 후, 당명종이 그녀를 고향으로 돌려보냈다고 한다. 황하에 도착했을 때 비가 많이 내려 여관에 며칠을 머물게 되는데 거기서 곽위를 만나 한눈에 반한다. 한편 곽위도 시씨가 현숙하다는 것을 알고 마음에 들어하여 둘은 여관에서 바로 부부가 되었다고 한다. 시영은 성격이 후덕하고 재주가 뛰어나, 곽위를 도와 여러가지 일을 잘 처리한다. 아들이 없던 곽위는 그를 아껴 양자로 삼고, 곽위가 죽은 후 시영이 황제에 오르니 그가 바로 주세종(周世宗)이다.
혈연관계가 있는 양자는 보통 형제, 종형제 내지 재종형제 내지 재재종형제의 조카뻘의 인물이 된다. 혈연관계있는 조카를 양자로 삼아 황위를 승계시킨 사례는 비교적 많다. 한소제(漢昭帝)가 죽은 후 아들이 없자, 대신들이 한무제의 손자인 창읍왕 유하(劉賀)를 데려와서 즉위시켰다가 폐위시키고, 다시 한무제의 증손인 유병이(劉病已)를 즉위시켜 한선제(漢宣帝)가 된 때로부터, 청나라의 광서제가 죽은 후 조카인 부의가 선통제로 즉위한 때까지 개략 30여건의 사례가 존재한다. 이는 전체 황제중 약 10%를 차지하는 수치이다.
이 경우, 후임황제의 생부모가 전임황제의 위치를 대체하지 못한다. 종묘에 세우는 퍠위는 여전히 전임황제의 패위이다. 즉, 전임황제는 “황고(皇考)”라 칭하고, 생부는 “숙부(叔父)”라 칭하게 된다. 그런데, 여기에 반기를 든 황제가 있었다. 바로 명나라때 명세종(明世宗) 주후총(朱厚㷓)은 흥헌왕(興獻王) 주우원(朱祐杬)의 차남으로, 명효종의 조카이며, 명무종(明武宗) 주후조(朱厚照)의 당제(堂弟)인데, 명무종이 죽은 후 아들이 없자, 명무종의 모친인 장태후와 내각수보(內閣首輔) 양정화는 그를 황위에 올린다. 예법대로라면 명무종의 부친인 명효종을 “황고”(종법제도하에서의 부친)로 불러야 한다. 그러나, 주후총은 죽음을 무릅쓰고 간언하는 신하 17명을 죽이고, 백수십명을 하옥시키면서 3년반동안 대예의지쟁(大禮議之爭)을 벌인 끝에 자신의 생부인 흥헌왕을 흥헌제로 올리면서 “황고”라 부르고, 명효종을 “황백고(皇伯考)”라 부르게 된다. 죽은 자의 명예를 위하여 살아있는 사람들의 목숨과 시간, 그리고 정력을 엄청나게 소모하였을 뿐아니라, 그는 역사에서 그는 예제를 지키지 않은 인물로 기록된다. 이미 황제라는 자리에 올랐으면서, 이처럼 가치없는 일에 국력을 그렇게나 소모했다는 것은 황당하지 않을 수 없다.
또 한 가지 황당한 사건은 동치제 재순(載淳)이 죽은 후에 일어난다. 통상적인 사례대로라면 동치제의 조카뻘인 “부(溥)”자 항열의 인물중에서 고르는 것인데, 당시에 부륜(溥倫)같은 적절한 후보도 있었다. 그러나, 서태후는 굳이 동치제와 같은 “재”자항열에서 골라서, “함풍제(즉, 동치제의 부친)의 양자”로 삼고, “후임황제의 아들을 동치제의 양자로 삼아” 황위를 승계하도록 할 것을 주장했다(이렇게 되면 광서제는 실질적으로 씨받이황제역할만 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기준으로 보면, 공친왕 혁흔의 아들이자 함풍제의 조카가 되는 재징(載澂)이 적합했다. 그러나, 재징은 이때 이미 나이가 17살로 친정할 수 있어, 서태후가 황태후 자격으로 수렴청정을 할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서태후는 재징을 후임황제로 하는데 극력 반대한다: “나이 어린 사람을 골라서 교육을 시켜야 한다”고 주장하며, 순친왕의 4살된 아들이자 함풍제의 조카가 되는 재첨(載湉)을 선택한다. 재첨은 서태후 여동생의 아들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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