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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분석/황자쟁위술

[황자쟁위술] 이세탈인술(以勢奪人術) 천사재화패(天賜才華牌) 이세민편등

by 중은우시 2015. 10. 11.

 

사서는 이세민이 형인 태자 이건성보다 훨씬 총명했다고 기록한다. 비록 이것이 사실에 완전히 부합하는지 여부는 알 수가 없지만, 사서나 야사에서 이 기조에 따른 여러가지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그런 이야기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는 다음에 소개하는 한가지 사례로 알 수 있다.

 

이세민이 현무문사변을 일으킨 다음 날 새벽, 진경(秦瓊), 위지경덕(尉遲敬德)등을 이연이 타고 있는 어주(御舟)로 검을 든채 가도록 한다. 이연은 두 사람의 검에서 아직도 피가 흘러내리는 것을 보고, 곧바로 태자 이건성과 제왕 이원길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연은 가슴이 아프면서 후회가 밀려왔고, 돌연한 사태에 어찌할지를 모르고 있었다. 주변에 있던 신하들도 역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이때 눈치빠른 진숙달(陳叔達)과 소우(蕭瑀)는 즉시 사태파악을 마치고 이세민쪽으로 줄을 선다. 아마도 이연이 재상 배적(裴寂)을 총애하는데 대한 시기때문인지도 모르지만…. 둘은 앞으로 나서서 이연에게 이렇게 말한다: “건성, 원길은 원래 의모(義謀, 수나라에 반기를 든 것)에 참여하지도 않았고, 천하를 얻는데 공로도 없습니다. 진왕(이세민)의 공이 높은 것을 시기하여 간사한 음모를 꾸몄는데, 이제 진왕이 그들을 주살했습니다. 진왕은 공이 하늘처럼 높고, 병사들도 모두 그를 따르고 있습니다. 폐하께서는 그에게 국사를 맡겨 주십시오.” 이들이 한 말은 노골적인 아부이지, 사실을 기술한 것이라고 볼 수는 없지만, 이러한 아첨의 말을 사서에 기록해 둠으로써, 이세민은 진양거병의 ‘수모(首謀)’이고, ‘의병을 일으키도록 권유한’ 사람이라는 것이 기정사실처럼 되어 버린다. 그 후 <신당서>에서는 급기야, “고조(이연)가 태원에서 거병한 것은 원래 그의 본 뜻이 아니라, 태종(이세민)이 일으킨 일이다”라고까지 쓰게 된다.

 

이러한 기록들이 어느 정도 왜곡되고 과장되었다는 점을 인정하더라도, 우리는 적어도 이세민이 어렸을 때부터 보통인물이 아니었음은 알 수 있다. 노모심산(老謀深算), 삼동천문(上懂天文), 하지지지(下知地理), 무민안중(撫民安衆)하는 인재였음은 분명하다. 그리고 아마도 그런 이유 때문에 이건성, 이원길과의 황위다툼에서 이연의 비호를 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적장자를 물리치고 대통을 이은 이세민은 황제에 오른 초기에는 비교적 맑은 두뇌를 유지했고, 적장자계승의 원칙을 따르려고 한다. 황위를 빼앗은 초기인 무덕9년(626년) 십월 계해일, 장손황후 소생의 이승건(李承乾)을 태자로 삼는다. 그러나, 이세민은 각질(脚疾)이 있는 이승건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오히려 문학을 좋아하고 서화에 능하며 재주가 뛰어난 넷째아들 위왕 이태(李泰)를 총애한다. 기록에 따르면 이태는 “여러 왕들 줄 가장 총애를 받았다(寵冠諸王)”라고 한다. 그러자, 이태는 자신의 재능과 부황의 총애를 믿고 형인 이승건의 자리를 빼앗겠다는 생각을 품고 적극적으로 활동을 시작한다.

 

한편으로 황문시랑 위정(韋挺), 공부상서 두초객(杜楚客)을 내세워 조야의 인사들을 끌어들이고, 다른 한편으로 조정권신들에게 선물공세를 펴면서 부황의 앞에서 자신이 태자에 오를만하다는 말을 해달라고 부탁한다. 그리하여 잠문본(岑文本), 유계(劉洎)등은 이세민의 앞에서 이태를 태자로 삼도록 주청했다.

 

사마 소욱(蘇勗)같은 자는 스스로 이태의 문하로 들어가서, 이렇게 권한다: “자고이래로 현명한 왕은 천하의 선비를 모아서 책을 써서 후세에 전하여 자신의 영향력을 확대했습니다. 전하께서도 그렇게 하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이태는 바로 이세민에게 요청하고, 이세민은 이태가 해달라는 것은 모두 들어주었다. 이태는 소덕언(蕭德言), 안윤(顔胤), 장아경(蔣亞卿), 허언(許偃)등을 위왕부로 불러들여 <괄지지(括地誌)>를 쓰기 시작하여, 정관15년에 완성한다. 그리고 정관16년(642년) 정월 을축일에 당태종 이세민에게 올린다. 이세민은 이 책을 받고는 아주 기뻐하며 당나라이전의 지리서적을 집대성했다는 치하의 글과 상을 내린다. 이 책은 확실히 대단하여, 지금도 역사지리를 연구하는 사람들에게는 필수서적이다.

 

이세민은 그후 이태의 위왕부에 매달의 지급금을 태자보다 많이 내린다. 그러자, 저수량은 상소를 올려, “서자가 아무리 사랑스러워도 적자를 넘어서서는 안됩니다. 그래야 의심이 커지는 것을 막을 수있고, 화란의 근원을 제거할 수 있습니다. 친해야 할 사람을 멀리하고, 높여야 할 사람은 낮추게 되면, 간사하고 아부하는 무리들이 그 기회를 틈타서 준동하게 될 것입니다”라고 한다. 이세민은 할 수 없이 태자의 매월 지급금을 올려주게 된다.

 

동시에 이세민은 이태를 무덕전(武德殿)으로 이사하도록 명한다. 그러자, 이때는 당태종이 자신의 거울이라고 했던 위징(魏徵)이 나선다: “폐하는 위왕을 사랑하고, 그가 안전하기를 바란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그러려면 그가 교만하고 사치하지 못하게 막고, 의심받을 만한 곳에 거처하지 않게 해야 합니다. 무덕전은 동궁의 서쪽이고 예전에 제왕 이원길이 거주하던 곳이니, 위왕이 거처하기 부적절합니다. 폐하께서 그런 마음이 없다고 하더라도, 위왕이 잘못 받아들여 가만히 있지 않을 수 있습니다.” 결국 이세민은 이 명을 철회하지만, 이것으로도 그가 이태를 얼마나 총애했는지 알 수 있다.

 

이태는 태자 이승건이 폐위된 후에는 더욱 사람들이 눈쌀을 찌푸릴 행동을 한다. 하루는 그가 부친 이세민이 그를 태자로 삼을 의향을 보이자 품안으로 뛰어들어 이세민의 품속에 안겨서 이렇게 말한다: “오늘은 신이 폐하의 아들로 새로 태어난 날입니다. 신에게 아들이 하나 있는데, 제가 죽을 때 아들을 죽이고, 황위를 진왕(이치)에게 넘기겠습니다.” 이세민은 그에 감동하여 이태에게 태자로 삼겠다고 약속한다. 나중에 장손무기가 진왕 이치를 태자로 삼을 것을 극력 주장하고, 저수량도 아들을 죽이고 동생에게 황위를 전한다는 것은 사람이 할 짓이 아니라고 극력 간언하는 바람에 결국 진왕 이치가 태자에 오르고, 이태의 모든 노력은 수포로 돌아간다.

 

이태가 ‘아들을 죽이고 진왕에게 황위를 넘기겠다’고 한 것은 전형적인 화사첨족(畵蛇添足)이다. 꿈에 그리던 성공이 눈 앞에 다가왔을 때도, 냉정함을 유지해야하고 흥분하여 불필요한 짓을 해서는 안된다는 교훈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