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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분석/황자쟁위술

[황자쟁위술] 무장탈위술(武裝奪位術) 내선득위패(內禪得位牌) 이세민편외

by 중은우시 2015. 10. 11.

 

요순우의 선양이후, 역사는 가천하(家天下)의 시대로 접어든다. 그 이후, 한(漢), 위(魏), 진(晋), 남조의 송(宋), 제(齊), 양(梁), 진(陳) 그리고 북조의 주(周), 수(隋), 당(唐)에 이르기까지 모두 선양의 방식으로 왕조가 교체된다. 선양이 이렇게 매번 활용된 원인은 바로 구황제와 신황제의 수요가 만나는 최선의 접점이기 때문이다. 쫓겨나는 구황제에게는 형세상 부득이하지만 목숨이라도 보전할 수 있는 방법이고, 쫓아내는 신황제에게는 오명을 뒤집어쓰는 것을 피하고 명성을 좋게 유지할 수 있는 방법이 바로 선양이었다. 선양은 역성(易姓)의 경우에만 활용되는 것이 아니다. 가천하의 왕조내에서는 아버지가 죽으면 아들이 이어받고(父死子繼), 형이 죽으면 동생이 이어받는(兄終弟及) 방식이 일찍이 자리잡고, “적장자승계원칙”이 성문법화되었는데, 일부 무력으로 황위를 차리하려는 황자들도 황제인 부친을 핍박하기는 하지만 볼썽사납게 빼앗지 않고, 선양이라는 외관을 취하여 그럴듯한 모양새를 갖추고자 하였다.

 

당태종 이세민은 당고조 이연의 둘째아들로 원래 진왕(秦王)에 봉해졌는데, 그는 당나라의 개국에 공헌이 컸으므로 이연은 그의 지위와 권한을 다른 왕들보다 높이 해준다. 젊었을 때 전쟁터에서 수많은 공헌을 세운 이세민은 한편으로 자신의 공로가 가장 크다는 것에 의지하고, 다른 한편으로 모산도사(茅山道士) 왕원지(王遠知)로부터 천자에 오를 것이라는 예언에 고무되어 황제가 되려는 욕심을 갖는다. 원래 이세민은 왕세충을 진압한 후, 방현령과 함께 미복(微服)을 하고 왕원지를 만나는데, 왕원지는 그 둘을 보자마자 한눈에 알아본다. “두 분중에 성인(聖人)이 있는데, 분명 진왕이 아니십니까”라고 말하자, 이세민은 자신의 신분을 밝힌다. 그러자 왕원지는 이세민에게 “태평천자(太平天子)가 되실 것이오니, 바라건데 몸을 보중하십시오”라고 말한다. 이세민은 황제에 오른 후, 왕원지에 대한 고마움으로 그를 후대하려 했으나 왕원지는 모산으로 돌아간다. 그러자 이세민은 모산에 칙령으로 태평관을 지어 그가 머물수 있게 해준다.

 

이세민이 왕도사의 예언을 현실로 만들기 위하여는 우선 형인 이건성으로부터 태자의 자리를 빼앗아야 했다. 그리하여 이세민은 수나라와 싸울 때나, 이후 다른 농민군 혹은 할거세력과 싸울 때나 항상 민심을 얻는데 신경쓰고 널리 천하의 현인지사들과 사귀는 것도 게을리하지 않는다. 한편으로 대신들과도 좋은 관계를 유지하면서 후궁들에게도 재물을 선물하여 자신에 우호적인 세력의 외연을 확장하며, 다른 한편으로 자신에 절대적으로 충성하는 무장세력도 양성한다. 이세민의 세력이 점점 강해지자 태자 이건성과 동생 이원길은 위기감을 느끼고 그를 사지로 몰아넣으려 한다. 위기에 처한 이세민은 먼저 반격을 하기로 결정하고, 무덕9년 유월 사일 현무문의 변을 일으켜 이건성과 이원길을 죽여버린다. 이처럼 형제를 죽인 것에 대하여 후세에 욕을 많이 먹게 되지만, 이때의 이세민은 그런 것에 신경쓸 겨를이 없었다. 그는 위지경덕으로 하여금 이건성과 이원길을 수급을 가지고 당고조 이연에게 보고하게 한다. 이연은 해변의 배 위에서 위지경덕으로부터 “진왕은 태자(이건성)와 제왕(이원길)이 반란을 일으키는 바람에 병력을 이끌고 주살하였으며, 폐하께서 놀라실까 걱정되어 신을 보내어 지키도록 명하였습니다”라는 말을 듣고는 목석처럼 굳어진다. 그리고, 위지경덕이 요구하는대로 진왕을 태자로 삼고 진왕에게 국사를 위임하는 조서에 서명한다. 또한, 위지경덕의 요청에 따라 진왕(이세민)으로 하여금 동궁(이건성)과 제왕부(이원길)의 병마를 거두도록 한다. 이렇게 하여 이세민은 국가권력을 전부 장악한다. “이때부터 군국대사는 크고 작은 것을 가릴 것없이 모조리 태자가 처리한 다음 황상에게 보고했다.” 바꾸어 말하면, 조정의 대소사는 모조리 이세민이 결정했고, 이연에게 보고할지 말지도 이세민이 하고싶은대로 했다. 결국 이연은 팔월 계해일에 “태자에게 양위하고, 자신은 태상황에 오른다”는 조서를 내리게 되고, 갑자일에 이세민이 동궁 현덕전에서 황제로 등극한다. 이렇게 부자간에 선양의 쇼가 완성된다. 당태종이 선양의 방식으로 부친에게 황제의 자리를 빼앗은 이후 당왕조에서는 여러번 선양의 쇼가 벌어지게 된다.

 

당태종은 태자 이승건(李承乾)과의 관계가 점점 멀어졌다. 정관7년부터 당태종은 이승건을 멀리하기 시작하나, 그렇다고 폐위시킬 생각까지는 품지 않았다. 그러나, 정관10년이 되자 당태종은 이승건을 폐위시킬 생각까지 갖게 된다. 그해 정월 그는 자제17명을 왕으로 봉하고, 2월 나이가 너무 어려 잠시 봉지로 부임시키지 않는 5명의 아들을 제외하고 다른 아들은 모조리 봉지로 보내지만, 오직 위왕 이태만은 봉지로 보내지 않고 당태종의 곁에 남기며 심지어 황궁내에 거처하도록 명하기도 한다.

 

이승건은 부친이 자신을 멀리하고, 동생 위왕(魏王) 이태(李泰)를 총애하여 태자의 자리를 빼앗길 위험에 처했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자 그는 숙부이자 이연의 일곱째아들인 한왕(漢王) 이원창(李元昌), 이부상서 후군집(侯君集), 동궁시위(東宮侍衛) 하란초석(賀蘭楚石, 후군집의 사위) 좌둔위중랑장(左屯衛中郞將) 이안엄(李安儼), 개화공(開化公) 조절(趙節, 이세민의 누나인 장광공주의 아들), 부마도위(駙馬都尉) 두하(杜荷, 두여회의 아들로 이세민의 딸 성양공주의 남편)등과 대책을 논의한 다음 부친 당태종 이세민이 했던 것과 동일한 방법을 쓰기로 한다. 그리하여 제1단계로 100여명의 자객단을 조직한다. 두목은 좌위부솔(左衛副率) 봉사진(封師進), 자객 장사정(張師政), 흘간승기(紇干承基)의 세명이었다. 이 자객단의 임무는 위왕 이태를 암살하는 것이었으나 실패한다. 제2단계는 당태종 이세민에게 사람을 보내어 태자 이승건이 중병에 걸려 생명이 위독하다고 보고하게 함으로써, 당태종을 동궁으로 오게 만들어, 당태종을 동궁에 연금시킨 다음 황위를 선양받으려 했다.

 

정관17년(643년) 이월, 이승건이 주도면밀하게 계획을 세워 시행하려 할 때, 산동 제주(齊州)에서는 당태종의 다섯째아들인 제왕(齊王) 이우(李祐)가 반란을 일으킨다. 제왕의 반란은 금방 평정되고, 반란사건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흘간승기가 연루되어 붙잡혀 간다. 흘간승기는 자신이 처형을 당할 위기에 처하자 목숨을 구하기 위하여 이승건과 반란을 모의한 사실을 공술한다. 이세민은 장손무기, 방현령, 소우, 이세적등의 중신으로 하여금 태자모반사건을 심리하게 하니, 모반사건의 전모가 모두 드러난다.

사건이 전모가 밝혀졌으니 이제 처벌을 해야 한다. 당태종은 대신들에게 태자를 어떻게 해야할지 의견을 물어본다. 모반죄에는 참형밖에 없다는 것을 아는 대신들은 아무도 입을 열지 않고 있었다. 이때 하급관리인 내제(來濟)가 나선다. 그는 수나라의 수군장수로 고구려를 침략했던 내호아(來護兒)의 아들이다. “폐하께서는 자애로운 부친(慈父)으로 남고, 태자는 천수를 다하도록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라고 말한다. 그의 뜻은 명백하다 태자 이건성을 죽이지 말라는 것이다. 이는 바로 이세민이 원하던 말이었다. 이세민은 이승건을 태자에서 폐위시켜 서인으로 만들고, 검주(黔州)로 유배보낸다. 이승건은 이년후 유배지에서 쓸쓸히 죽는다. 내제는 이때 이세민의 마음을 잘 읽은 덕분에 그후 고속승진을 계속한다.

 

이승건과 함께 반란을 꾀한 자들 중에서 이안엄, 두하, 조절등은 모조리 참수된다. 그러나 나머지 두 명은 이세민이 살려주려 한다.

 

하나는 한왕 이원창이다. 이세민은 그를 살려두려 하나 신하들이 극력 반대하여 할 수 없이 이원창은 사사(賜死)하여 집에서 죽을 수 있게 해준다.

 

다른 하나는 후군집이다. 그가 체포되자 이세민은 그에게 이렇게 말한다: “짐은 그대가 재판에서 하급관리에게 모욕당하는 것을 차마 보고 있을 수가 없다. 그러니, 내가 친히 심문하겠다.” 그러나, 이세민이 직접 심문하는데도 후군집은 계속 죄를 부인한다. 결국 사위인 하란초석이 나서서 장인(후군집)과 태자가 어떻게 결탁하고 모의했는지를 하나하나 진술한 후에야 후군집은 죄를 인정한다. 이세민은 후군집이 자신을 여러해동안 따랐고, 개국공신이라는 점을 고려해서 목숨을 구해주고자 한다. 그러나 문무대신들이 모두 나서서 반대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그도 참수하고, 가산을 몰수한다.

 

이세민은 성공했지만, 그의 아들 이승건은 실패한다. 성공과 실패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 원인을 분석해보는 것도 의미가 있겠지만, 최소한 이승건이 위왕 이태를 죽이고 부친 당태종 이세민을 연금시켜 선양받으려고 계획하게 된 것은 부친의 전철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이세민이 스스로 뿌린 씨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