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풍제는 황위계승자문제에 대하여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왜냐하면 아들이 하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즉, 서태후(자희태후)가 낳은 재순(즉, 나중의 동치제)뿐이다. 그러므로, 옹정제때 만든 비밀건저(秘密建儲)도 실시할 필요가 없었다. 함풍제는 조부인 가경제처럼 후계자를 느긋하게 뽑을 수도 없었고, 부친 도광제처럼 후계자문제를 놓고 고민해야할 필요도 없었다. 그에게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함풍제가 죽을 때 31살에 불과했고, 자손을 많이 낳지 못했다. 이는 대청제국이 이미 말로를 걷고 있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함풍제가 당시에 고려한 주요한 문제는 아들 재순이 당시 겨우 6살에 불과하여, 최소한 10년은 지나야 친정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앞으로 10년간 어떻게 하여야 대청황권을 자신의 아들이 장악하게 하고, 다른 사람에게 넘어가지 않게 할 수 있을까라는 것이었다.
이를 위하여, 함풍제는 임종전 수십일동안 고민에 고민을 거듭한다. 그는 조정의 주요 정치세력을 자신의 머리 속에 정리해보았다. 그리고 전전반측하며 밤새도록 잠을 이루지 못했다. 좋은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함풍제가 먼저 생각한 것은 자신의 여섯째 동생 공친왕 혁흔이다. 혁흔은 어려서부터 함풍제와 함께 자랐고, 함께 공부하고 함께 놀았다. 일찌기 허물없이 지내던 형제였다. 다만, 둘이 황제의 자리를 놓고 다투다가 함풍제는 황제가 되고, 혁흔은 결국 친왕에 봉해졌다.
함풍은 알고 있었다. 자신의 동생 혁흔은 능력이 있다는 것을, 그의 능력은 자신보다 훨씬 뛰어났다. 만일 그가 황숙의 명의로 어린 황제를 보정(輔政)한다면, 명분에도 들어맞는다. 그리고 대청제국을 잘 이끌어 난관을 잘 넘길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이때 함풍제는 다시 옛이야기가 떠올린다. 청나라의 제2대황제 청태종이 사망한 후, 순치제가 어린 나이로 즉위한다. 황숙 도르곤은 섭정왕이 된 후 대권을 독점하고, 감히 '황부'라 칭한다. 효장태후가 배후에서 조종하지 않았다면, 순치제의 강산은 하마터면 도르곤 자손의 강산으로 바뀔 뻔했다
세 살 버릇이 여든까지 간다. 함풍제는 속으로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의 이 아들은 어려서부터 놀기를 좋아했다. 그가 비록 유아두(유비의 아들 유선) 정도는 아니더라도 절대로 강희제처럼 될 가능성은 없었다. 그렇다면 보정의 권한을 누구에게 맡겨야 잘하면서도 안심할 수 있을까? 함풍제의 병세가 위급할 때, 혁흔이 북경에서 국면을 주재하고 있었다. 그는 함풍제의 신체가 갈수록 나빠지고 몇번이나 토혈을 했다는 말을 듣고는 마음이 조급해진다. 그래서 여러번 글을 올려 열하로 가서 함풍제를 병문안하겠다고 청한다.
혁흔이 이렇게 급하게 열하로 가려했던 이유는 형제간의 수족지정때문이기도 하겠지만, 향후 정국의 안배에 대한 관심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혁흔도 알고 있었다. 함풍제에게 남은 날이 많지 않다는 것을. 그도 함풍제가 죽기 전에 형님을 만나서 형제간의 앙금을 풀고 싶었다. 그래서 평생후회를 남기지 않으려 했다.
혁흔의 주절을 보고 함풍제도 만감이 교차했다. 그는 혁흔과 함께 보낸 어린 시절도 떠올렸고, 옛날 후계자의 자리를 놓고 경쟁하던 시기와 자신이 즉위한 후 형제간의 서먹서먹했던 시기도 떠올렸다. 여기까지 생각하자, 함풍제는 고개를 흔든다. 혁흔은 가장 먼저 탈락되었다. 그는 억지로 몸을 일으켜 앉아서, 친필로 혁흔에게 회신을 쓴다: 작년 가을에 헤어진 후, 순식간에 반년여가 흘렀다. 나도 시시때때로 너와 손을 잡고 얘기하던 것을 떠올리면서 마음의 안위를 얻는다. 그러나, 최근 나의 몸은 실로 좋지 못하다. 자주 기침이 나서 멈추지를 않고, 어떤 때는 토혈을 하기도 한다. 나는 너와 만나게 되면 옛 일이 생각나서 공연히 슬픈 생각이 더 들까봐 걱정된다(徒增傷感). 그것은 나의 병에 실로 좋지 않을 것이다. 현재 열하까지 와서 보고해야할 급한 일은 없으니, 너는 북경에 남아서 일을 잘 처리해라. 내 병이 나아져서 돌아간 후에 다시 형제의 정을 나누자.
'도증상감'이라는 네 글자에서 함풍제 당시 심경의 처량함을 느낄 수 있다. 아마도 강한 척하려는 함풍제는 자신의 친동생, 옛날의 경쟁자에게 임종시의 쇠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 했는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황위경쟁에서 함풍제는 승리자이다. 그러나 하늘은 공평했다. 황제인 그는 오래 살지 못하고 곧 세상을 떠나야 한다. 그러나 황권을 놓친 혁흔은 여전히 몸이 건강했고, 세월을 잘 보내고 있었다. 형제의 관심에 함풍제는 감동했지만, 미래의 권력분배에서 혁흔은 배제해야 한다. 함풍제는 미래의 보정인선을 마쳤다. 그것은 바로 이친왕(怡親王) 재원(載垣), 정친왕(鄭親王) 단화(端華), 호부상서 숙순(肅順)등을 우두머리로 하는 8대신의 팀이다. 이들은 함풍제의 총애를 받았고, 그들은 혁흔과 정치적 견해가 달랐다. 일단 혁흔이 개입하면, 정국의 안정에 불리할 뿐아니라, 오히려 발목을 잡을 수 있다.
황족종친을 배제하고, 외성을 기용하여 보정대신으로 삼은 것은 청나라역사상 선례가 있다. 순치제가 죽은 후에는 도르곤이 권력을 찬탈하려 했던 교훈을 살려, 소니, 수커하사, 어비롱, 아오바이의 4명을 보정대신으로 삼은 바 있다. 황족종친이 대권을 빼앗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서였다. 다만, 강희제가 어렸을 때, 아오바이는 마찬가지로 발호하고 권력을 전횡한다. 만일 소년강희가 영명신무하여 아오바이를 붙잡지 않았다면, 청나라의 강산은 아마도 위기에 처했을 것이다. 역사의 교훈은 반드시 배워야 한다. 가장 큰 위협이 될 공친왕 혁흔을 배제한 후, 함풍제는 강희제때 4대신보정의 인원수를 배로 늘인다. 그리하여 8대신보정으로 한다. 다만, 이 안배만으로 황권의 안정을 보장할 수 있을까? 이 문제에 대하여 함풍제는 다시 하나의 교묘한 안배를 한다. 그것은 바로 검인(鈐印)제도였다. 소위 '검인제도'는 함풍제의 임종때, 자신이 평소에 가장 아끼던 두 개의 사인(私印)이 있는데, 하나는 "어상(御賞)"이고 다른 하나는 "동도당(同道堂)"이다. 각각 황후 뉴구루씨와 아들 재순에게 주어, 황권의 상징으로 삼는다(재순이 어리므로, 서태후가 검인의 책무를 대리하게 된다).
검인제도는 황제가 어려서 친정할 수 없을 때, 황제의 명의로 하달되는 유지(諭旨)는 첫머리에 반드시 '어상'을 날인하고(즉 소위 印起), 유지의 말미에는 반드시 '동도당'을 날인해야 했다(즉 소위 印訖). 이런 유지만이 유효하다. 이 두 개의 도장이 날인되어있지 않은 유지는 무효이다. 함풍의 8대신보정과 검인제도의 안배는 조정의 운영을 양궁태후의 대정(代政)과 8대신의 보정(輔政)을 나란히 두는 체제였다.
함풍제의 구상에서, 팔대신보정은 8명 고명대신의 정치경험과 집단지혜를 발휘하도록 하는 것과 그들이 서로간에 견제와 감독을 하도록 하는 것이다. 여기에 양궁태후의 대정제도는 황후와 재순(실제로는 서태후)이 검인제도를 이용하여 팔대신을 방비할 수 있도록 하였다. 양궁태후는 일상적인 정무처리와 군국대사의 의사결정에 참여할 필요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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