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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분석/황자쟁위술

[황자쟁위술] 여인노선술(女人路線術) 화기소장패(禍起蕭墻牌) 제장공편외

by 중은우시 2015. 8. 25.


 
“일을 성사시키려면 황문(黃門)으로 가기보다 홍문(紅門)으로 가야 한다.” 여기서 황문은 돈을 가리키고,  홍문은 여자를 가리킨다. 여인을 통하는 것이 돈을 쓰는 것보다 효과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화기소장”이라는 말이 있는데, 화란은 집안에서 일어난다는 말이다. 고금의 역사를 살펴보면 처첩 때문에 집안과 나라가 망한 사례는 부지기수이다.  하걸과 말희, 상주와 달기, 주유왕과 포사의 사례부터 진후주, 당현종, 남당이후주 같은 류는 모두 여자 때문에 망국에 이른 경우이다. 그래서 중국봉건제왕사에서 여자는 왕조의 안정을 위협하는 홍수맹수(洪水猛獸)로 취급하여 “여자라는 것은 불길한 동물이다”라고 보고 시시때때로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기원전548년 제(齊)나라 궁정은 내부의 도색사건(桃色事件)으로 시군(弑君)의 피비린내나는 사건이 벌어진다. 제령공(齊靈公)의 처는 노(魯)나라출신의 안의희(顔懿姬)인데, 아들을 낳지 못하였고, 안의희가 제령공에게 시집올 때 같이 시집온 그녀의 조카 격성희(鬲聲姬)는 공자광(公子光)을 낳는다. 공자광은 태자에 오른다. 그리고 제령공에게는 희첩 중희(仲姬), 융희(戎姬)가 있었는데, 융희는 제령공의 총애를 받았다. 중희는 공자아(公子牙)를 낳는데, 그를 융희에게 부탁한다. 융희는 제령공에게 공자아를 태자로 삼아달라고 하고, 제령공은 그녀의 말을 듣고 공자광을 태자에서 폐위시켜 동쪽 변방으로 보내버리고, 공자아를 태자로 삼는다. 기원전554년, 제령공의 병이 위중할 때, 대신 최저(崔杼)는 공자광을 몰래 다시 모셔와서 태자위에 오르도록 해주고, 공자광은 융희를 죽인다. 그해 오월 이십구일 제령공이 죽자 공자광이 즉위하니 그가 제장공(齊莊公)이다. 그는 즉위후 공자아도 죽여버린다. 제장공은 자신이 태자위에 다시 오르고 군주의 자리를 차지할 수 있게 해준 최저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고, 자주 최저의 집을 찾아갔다. 최저에게는 젊고 예쁜 부인 동곽강(東廓姜)이 있었는데, 그녀는 원래 최저의 가신인 동곽언(東廓偃)의 누나이자, 당공(棠公)의 처였다. 당공이 죽자 최저는 조문을 갔는데, 동곽강이 예쁜 것을 보고는 그녀를 취하여 처로 삼는다. 그런데, 제장공은 최저의 집을 드나들다가 동곽강과 정분이 나서 최저 몰래 정을 나누게 된다. 당시 조정의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최저는 그 사실을 알고 분노하여 제장공의 호위무사인 뇌거(雷擧), 주작(州綽)등을 죽인 다음 제장공과 당강도 모두 죽여버리고, 제장공의 동생 저구(杵臼)를 군주로 옹립하니 그가 제경공(齊景公)이다.

 

처첩을 많이 거느린 황자황손들의 경우 처첩의 행동거지는 그들의 성패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심지어 아직 결혼하지도 않은 미혼처(未婚妻)의 미모때문에 후계자의 자리를 놓친 황당한 경우도 있다. 춘추시대 위선공(衛宣公)은 원래 호색으로 유명한 인물이다. 그가 제일 먼저 마음을 빼앗긴 여인은 부친의 비인 이강(夷姜)이다. 그는 이강과의 사이에 사생아도 하나 낳는다. 이름은 공자급(公子伋)이다. 그들의 사이가 들통날까 두려워 공자급을 멀리 떨어진 조가(朝歌)의 한 농촌으로 보내 기르게 한다. 위선공이 즉위한 후 처음에는 형씨(邢氏)를 부인으로 삼았으나, 형씨는 용모도 평범하고 여인으로서의 매력도 부족했다. 위선공은 형씨가 아들을 낳지 못하였다는 이유로 이강을 자신의 비로 삼았고, 뿐만 아니라 공자급도 데려와서 태자로 삼는다. 공자급이 16살이 되었을 때 위선공은 제(齊)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아들 공자급를 위하여 구혼하고, 제희공(齊僖公)은 자신의 큰 딸 선강(宣姜)을 공자급에게 시집보내기로 한다. 그러나, 제나라로 갔던 사신의 말에 모든 것은 흐트러진다. 그는 위선공에게 선강이 절세미녀라고 말한 것이다. 그러자, 위선공은 원래 며느리가 되었어야할 선강을 취하기로 하고, 기하(淇河)의 가에 화려하고 정치한 대(臺)를 쌓으니 바로 악명이 자자한 신대(新臺)인데, 이를 통해서 선강에게 자신의 부유함을 과시하려 한 것이다.

 

영친(迎親)의 날이 다가오자, 위선공은 공자급을 송(宋)나라에 파견한다. 공자급이 송나라로 가는 도중에 위선공은 신대에서 선강을 부인으로 맞이한다. 송나라에서 돌아온 공자급은 이를 못본 척할 수밖에 없었다. 위선공은 마치 이강은 완전히 잊은 것처럼 신대에서 선강과 3년을 함께 보낸다. 이 삼년동안 선강은 두 아들을 낳는다. 공자수(公子壽)와 공자삭(公子朔). 이강은 결국 목을 매어 자결한다.

 

위선공은 부친의 모든 사랑을 공자수와 공자삭에게 쏟으면서, 공자급을 눈엣가시로 여겨 그를 죽이고자 한다. 게다가 선강과 공자삭은 위선공에게 태자급을 비방하는 말을 한다. 그러자 원래 태자급을 싫어하던 위선공은 선강과 공자삭의 말을 듣고는 태자급을 죽이려 한다. 그리하여, 태자급을 제나라에 사신으로 파견하면서 백색정절(旌節)을 하사하고, 강도에게 국경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백색정절을 있는 자를 죽여버리라고 한다.

 

태자급이 출발하려 할 때, 공자수는 태자급을 찾아가서 “변경의 강도가 당신이 오면 죽이려고 기다리고 있다. 백색정절을 들고 가면 바로 죽임을 당할 것이니, 가지 않는 것이 좋겠다”라고 말하며 태자급에게 도망치라고 한다. 그러나 태자급은 “부친의 명을 어기고 살기위해 도망칠 수는 없다.” 태자급이 떠나려 할 때, 공자수는 태자급에게 술을 먹여 취하게 만든 다음, 태자급의 백색정절을 훔쳐내어 자신의 수레에 꽂고는 변방으로 간다. 강도는 백색정절을 꽂은 수레를 보자 바로 공자수를 죽여버린다. 공자수가 죽은 후, 태자급이 도착하고, 강도들에게 말한다: “나를 죽였어야 한다. 그가 무슨 죄가 있는가. 나를 죽여라.” 강도는 태자급도 죽여버린다. 그 후에 위선공은 공자삭을 태자로 삼는다.

 

초평왕에게는 아들 태자건(太子建)이 있었는데, 그는 태자건에게 두 명의 스승을 붙여준다. 한 명은 태부(太傅) 오사(伍奢)이고, 다른 한 명은 소부(少傅) 비무기(費无忌)이다.  그런데, 태자건이 오사와는 사이가 좋았지만, 비무기는 멀리한다. 이로 인하여 비무기는 태자건에게 원한을 품게 된다. 초평왕은 즉위한 다음 해에 날로 힘이 강해지는 진(秦)나라와의 교분을 강화하기 위하여, 정략결혼을 하기로 하고 비무기에게 진나라로 가서, 진애공(秦哀公)에게 딸 맹영(孟嬴)를 자신의 아들인 태자건(太子建)의 처로 달라고 청하게 한다. 그런데, 맹영이 절세미녀였다. 비무기는 진나라에서 맹영을 모시고 돌아오는 길에 먼저 초평왕을 만나, 맹영이 선녀하범(仙女下凡)한 절세미녀라고 말하자, 초평왕은 음심이 동한다. 게다가 비무기가 곁에서 종용하여 결국 바꿔치기를 하게 된다. 맹영은 왕궁내로 데려와서 자신과 혼례를 치르고, 태자건에게는 맹영의 시녀를 보내어 맹영을 사칭하여 혼례를 치르게 한다.

 

그 후 초평왕은  태자건이 사실을 알고 자신에게 원한을 품을 것이 두려워, 4년이 지난 후 19세의 태자를 성보(城父)로 보내어 변방을 지키게 한다. 비무기는 태자건이 왕위에 오르면 자신의 목숨이 위태롭다는 것을 알아, 계속 초평왕에게 태자건을 모함한다: “태자건이 현재 변방에서 매일 군대를 훈련시키고 있는데, 언젠가 군대를 이끌고 쳐들어와서 왕위를 찬탈할지도 모릅니다.” 초평왕 자신도 변방을 지키다가 군대를 이끌고 왕위를 차지하였기 때문에 그 위험을 잘 알았다. 그리하여 먼저 오사를 불러들여 태자를 제대로 교육시키지 못하였다는 이유로 죽여버리고, 다시 사마분양을 성보로 보내어 태자를 죽이게 한다. 다행히 사마분양은 태자건을 동정하여 미리 소식을 알려주고 태자건을 도망치게 해준다. 태자건은 송나라로 도망갔다가, 다시 정나라로 도망치는데, 진나라와 힘을 합쳐 정나라를 치려는 음모가 들통나서 정나라사람들에게 죽임을 당한다. 오사의 아들 오자서는 오나라로 도망친 다음 오나라군대를 이끌고 초나라의 수도를 점령한 후, 이미 죽은 초평왕의 무덤을 파서, 시신에 채찍질하고 코와 귀를 잘라 들판에 버린다. 며느리를 억지로 빼앗은 초평왕의 치욕적인 최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