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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분석/황자쟁위술

[황자쟁위술] 부저추신술(釜底推薪術) 상제역무패床第易誣牌)

by 중은우시 2015. 8. 25.

 

황위계승권은 황제가 주는 것이므로, 궁중정변이라든지, 무력찬탈과 같은 경우를 제외한 일반적인  경우에 있어서 관건은 황제의 뜻이다. 즉, 황자중 누구든지 황제의 눈에서 벗어나면 그는 후계자의 반열에서 제외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경쟁상대의 수를 감소시키려면, 반드시 핵심역할을 하는 황제를 공략해야 한다. 그러나, 황제의 손을 빌어 경쟁상대를 제거하는 것이 쉬운 일만은 아니다. 첫째는 너무 노골적이면 반감을 살 수 있어서 은근하게 해야 하고, 둘째는 황제도 바보가 아닌 한 남이 유도하는대로 쉽게 끌려가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황제를 움직이려면 황제로 하여금 경쟁상대를 모함하는 것이 국가를 위한 충성심 혹은 부친을 위한 효성에서 나왔다고 믿게 만들어야 한다. 이런 점에서 공격하기 좋은 이슈는 후궁을 희롱했다든지, 서모와 사통했다든지, 적국과 내통했다든지, 시해를 모의했다든지 하는 것이다. 이러한 것들은 불충, 불효의 가장 대표적인 행동들이기 때문이다. 모함하는 쪽에서 그럴듯하게 꾸밀 수만 있다면 황제로 하여금 경쟁상대의 정치생명을 끝장내게 만드는 것도 그리 어려운 일만은 아니다.

 

중국의 제왕역사상 황제가 숙부나 형제의 처첩, 자매를 취한 사례는 적지 않고, 심지어 황제가 된 후 공공연히 서모(庶母)와 형수, 제수를 취한 사례도 있다. 백사지의 <제왕춘추다처제십>에 따르면, 이 두 가지 유형에 해당하는 경우가 십여건에 이른다. 그러나, 만일 황제들이 어느 아들이 감히 자신의 후궁을 희롱하거나 사통했다는 말을 듣게 된다면, 황제는 절대로 그냥 넘어가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나중에 당고종이 되는 이치도 부친인 당태종 이세민의 후궁이었던 무측천에게 애정을 품고 있었지만, 부친이 승하할 때까지는 기다려야만 했다. 그 후에 무측천을 감업사로 출가시켜 비구니가 되도록 한 다음 다시 환속시켜 궁으로 불러들이는 절차를 거쳐 자신의 후궁으로 삼는다.

 

비슷한 일은 당나라황실과 같은 관농귀족집단 출신인 수나라황실에서도 발생한다. 양광은 부친 수문제 양견과 모친 독고황후를 잘 속여서 신임을 얻어내고 태자의 자리를 차지하지만, 수문제 양견의 병세가 위독할 때, 수문제가 총애하던 선화부인 진씨가 수문제에게 “태자(양광)가 무례하게 자기를 희롱했다”고 말하자, 병석에 누워있던 수문제는 벌떡 일어나서, 유술, 원암을 부른 다음 태자 양광을 폐위시키고, 폐태자 양용을 다시 불러 황위를 물려주는 내용의 조서를 쓰게 한다. 그리고 “독고가 나를 망쳤구나”라고 외친다. 서모를 희롱했던 양광은 진씨가 수문제에게 그 사실을 고하는 것을 보고는 혼비백산한다. 게다가 양소로부터 양용을 다시 태자로 세우려 한다는 소식까지 전해 듣고는 배수의 진을 칠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양소로 하여금 유술, 원암을 조서위조죄로 하옥시키게 하고, 수문제의 곁을 지키던 후궁들을 모두 별실로 옮겨가게 한 다음, 장형(張衡)을 침전으로 들여보내 수문제를 죽이고, 스스로 황제에 오른다. 그후에 선화부인 진씨, 용화부인 채씨 및 다른 부친의 후궁들도 모조리 자신의 후궁으로 삼는다. 이를 거꾸로 보면, 만일 양광이 과감한 조치를 즉시 취하지 않았더라면, 그는 양견에 의하여 태자의 자리에서 쫓겨났을 것이고, 수나라의 제2대황제는 다른 사람의 몫이 되었을 것이다.

 

이세민은 양광의 사례를 형인 태자 이건성에게 똑같이 뒤집어 씌우려고 한 바 있다. 무덕9년 유월 삼일 밤, 즉 현무문사변 하루 전날 밤에 이세민은 급히 입궁하여 부친 당고조 이연을 뵙고, 이건성과 이원길이 서모인 장첩여, 윤덕비와 사통했다고 고변한다. 당고조 이연은 한편으로 장첩여, 윤덕비가 자신들의 자식의 장래를 생각하여 태자인 이건성에 접근했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고, 다른 한편으로 이건성은 충후한 사람이라 그럴 리가 없겠다고 생각하여 반신반의한다. 원래 자신의 후궁들을 부하들에게 하사하는데 인색하지 않았던 당고조이지만, 자신의 후궁이 아들과 난륜을 벌였다는 말을 듣자 반신반의하면서도 이세민에게 “너는 왜 더 일찍 말해주지 않았느냐?”라고 화를 내면서 “내일 직접 추궁해서 명명백백히 밝히겠다”라고 한다. 이세민으로서는 목적을 가볍게 이룬 셈이다.

 

누르하치의 후계자는 우여곡절을 거쳐 결정된다. 가장 먼저 후계자로 떠올랐던 동생 슈르하치는 누르하치와 함께 청나라를 건국한 공로가 있는데 젊은 나이에 의문사를 당한다. 명나라의 일부 기록에는 누르하치가 죽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 후, 장남인 츄잉을 후계자로 삼는데, 동생들과의 불화를 일으키면서 역시 누르하치에게 죽임을 당한다. 결국, 누르하치의 후계자가 될 수 있는 후보자는 당시의 실권자인 4대패륵이었는데, 바로 첫째패륵인 누르하치의 둘째아들 따이샨, 둘째패륵인 슈르하치의 아들인 아민, 셋째패륵인 누르하치의 다섯째 아들인 망구타이, 넷째패륵인 여덟째아들 홍타이시가 그들이다. 이중 아민은 슈르하치의 아들로서 누르하치 직계가 아니어서 제외되고, 망구타이는 힘은 있으나 지략이 없었고, 자신의 생모가 죄를 짓자 자신의 손으로 생모를 죽인 바 있어, 후보자에서 역시 제외된다. 결국 남은 후보자는 따이샨과 홍타이시인데, 처음에는 어느 모로 보나 따이샨이 유력했다. 그러나, 아바하이사건으로 따이샨은 후계자의 자리를 동생 홍타이시에게 양보할 수밖에 없게 된다. 아바하이는 누르하치의 대비(大妃)였고, 아지거, 도르곤, 도도라는 세 아들을 낳았다. 누르하치가 한때 따이샨에게 “내가 죽으면 아바하이와 그 소생인 동생들은 네가 거둬서 돌봐달라”고 말했을 정도로 따이샨은 강력한 후계자였다. 그런데, 누르하치의 병세가 위중해지자, 아바하이는 누르하치 사후 자신과 자식들의 장래를 생각하여, 따이샨과 홍타이시에게 접근하고자 음식을 만들어 두 사람에게 보낸다. 홍타이시는 그 음식을 받을 수 없다고 돌려보내지만, 따이샨은 음식을 받아서 먹었을 뿐아니라, 밤에 아바하이가 따이샨의 집에 드나드는 것을 사람들에게 목격당한다. 누르하치가 그 사실을 알고 따이샨과 아바하이를 징계한다. 이 사건으로 따이샨의 명성에 심각하게 금이 가게 되었고, 결국 따이샨의 다른 몇 가지 잘못들과 결합되어 누르하치가 사망할 때쯤에는 이미 후계자를 홍타이시로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된다. 그리하여 따이샨은 누르하치사후 자진하여 동생인 홍타이시에게 양보할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