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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분석/황자쟁위술

[황자쟁위술] 부저추신술(釜底推薪術) 파괴기회패(破壞機會牌)

by 중은우시 2015. 8. 25.

 

자고이래로 국가에 공헌이 있는지 여부는 황제가 황자를 평가하고 후계자를 결정하는데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그리하여 황태자 및 황자들은 모두 공헌을 세우는데 필사적이었다. 그들은 혹은 부친이 출정했을 때 후방에서 정국을 안정시키며 전방을 잘 지원하거나, 혹은 명을 받들어 반군이나 적군을 물리쳐서 영토를 확장 혹은 고수했다. 특히, 조비 같은 경우는 위풍의 반란을 진압하고, 청나라 도광제 같은 경우는 천리교도가 자금성을 난입하였을 때 잘 대응하여 물리친 바 있는데, 이는 모두 부친이 눈에 나라를 잘 다스릴 것이라는 좋은 인상을 주어 결국 후계자가 될 수 있었다.  황자들은 모두 이렇게 국가에 공로를 세우는 것이 후계다툼에서 유리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스스로 국가에 공을 세우기 위하여 필사적인 동시에, 경쟁상대가 공을 세우지 못하게 막는데도 필사적이었다.

 

한헌제 건안24년, 관우는 병력을 이끌고 형주에서 북상하여 양양을 공격하고, 위나라의 대장군 조인을 양양에서 포위하고, 우금의 투항을 받아냄으로써 천하에 이름을 날린다. 이렇게 되자 위나라의 백성들 중에서도 조조의 학정에 한나라를 그리워하는 자들이 속속 지방관리를 죽이며 호응하고 있었고, 업성도 민심이 요동치고 있었다. 놀란 조조는 처음에 천도까지 생각하였으나, 나중에 신하들이 속속 말리는 바람에, 조조는 비로소 관우의 공격을 막아내고 조인을 포위에서 구할 병력을 보내기로 결정한다. 이는 조씨일문의 흥망을 결정할 중요한 결전이다. 조조는 대장군을 누구로 삼을지 고민하다가 마지막에 조식(曹植)으로 결정하고 그를 남중랑장(南中郞將), 정로장군(征虜將軍)에 임명한다. 조식으로서는 이것이 공로를 세워 세자자리를 차지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지만, 조비로서는 조식이 공로를 세울 기회를 갖도록 해서는 안되는 입장이었다. 다만, 조조에게 손을 써서 결정을 번복하게 만들려면 불충불효로 비칠 우려가 있어서 곤란했다. 그리하여 조식에게 손을 쓰기로 결정한다.

 

<삼국지.위서.임성진소왕전>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24년, 조인이 관우에게 포위되어 있었다. 태조(조조)는 식(조식)을 남중랑장, 정로장군으로 삼아서 조인을 구하도록 하기 위하여 불렀다. 조식은 술에 취하여 명을 받을 수 없었고, 그래서 명은 취소되고 만다.” <위씨춘추>에는 더욱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조식이 떠나려 할 때, 태자(조비)는 술을 먹였다. 억지로 취하게 만들었다(逼而醉之). 왕(조조)이 식(조식)을 불렀으나, 식은 명을 받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왕이 노했다.” 이 사건을 살펴보면 조비는 조조와 조식의 성격을 잘 파악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선 조조는 모든 일에 족지다모(足智多謀)하며 신중해서, 중요한 일이면 재삼 당부하는 습관이 있다. 특히, 자신의 아들, 조카 같은 친족의 경우에는 더욱 그러했다. 그래서, 조비는 조조가 조식을 남중랑장, 정로장군에 임명했지만, 떠나기 전에 다시 불러서 뭔가를 당부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조식은 원래 광오불훈(狂傲不訓)하며, 술마시고 시부(詩賦)를 짓는 것을 좋아했다. 조비는 두 사람의 이런 성격적 특징을 잘 이용하여, 먼저 조식을 불러 형으로서 송별연을 베푼다는 명목으로 조식에게 억지로 술을 권해 취하게 만든 것이다. 조비의 이런 수단은 비록 떳떳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원래 큰 이익에는 작은 의리를 따지지 않는 법이고(大利不顧小義), 큰 일을 할 때는 자잘한 점들은 따지지 않는 법이다(大行不顧小節).

 

이세민이 이건성, 이원길과 싸울 때, 그들은 서로 잘 알고 있었다. 이세민이 후계자 후보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당나라의 건국에 큰 공을 세웠기 때문이라는 것을. 그래서 이세민으로서는 계속하여 공을 세우는 것이 중요했고, 이건성으로서는 그가 공을 더 세울 기회를 막아야 했다.

 

먼저, 무덕5년 유흑달이 산동에서 제2차반란을 일으켰을 때, 이건성은 황급히 청하여 태자의 신분으로 산동으로 가서 이를 진압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이세민이 공을 세울 기회를 막았을 뿐아니라, 스스로의 공을 하나 세운다. 이세민도 이 일을 마음에 깊이 새겼고, 다시 공을 세울 기회가 오기만을 학수고대한다. “겉으로는 외적을 막는다는 명목을 내세워, 속으로는 병권을 장악하고, 이를 통하여 황위를 찬탈한다”는 전략을 성사시키고자 한 것이다.

 

바로 이 때, 돌궐의 힐리칸(頡利可汗)이 공공연히 당나라변방을 침범하는 사태가 일어난다. 이세민은 이 기회를 붙잡기 위하여 적극적으로 무장반격을 주장하며, “10년내에 막북(漠北)을 반드시 평정하겠다”, “힐리칸의 목에 밧줄을 묶어, 대궐앞으로 끌고 오겠다”고 호언장담한다. 그러나, 이건성, 이원길로서는 그가 혼자 공로를 차지하도록 놔둘 수가 없었다. 결국 당고조 이연은 이세민, 이원길이 공동으로 군대를 이끌고 가서 돌궐을 막도록 결정한다. 그 후 무덕9년, 돌궐이 재차 침입하자, 이건성, 이원길은 아예 공을 세울 기회를 이세민에게 넘겨주지 않기 위하여, 이원길이 총사령관이 되어 출정하겠다고 청하면서, 이세민의 수하인 위지공(위지경덕), 단지현 , 진숙보(진경), 정지절(정교금)등을 자신의 지휘를 받게 배속시켜달라고 요구한다. 이를 통하여 이세민의 손발을 잘라버리려 한 것이다. 그러나, 이세민은 막다른 골목에 몰리자 먼저 손을 쓰는 방법을 선택하여 현무문사변을 일으켜 이건성, 이원길을 죽여버리게 된다. 압박이 있으면 반항이 있다는 말 그대로이다. 이들의 후계투쟁에서 상대방이 공을 세우지 못하게 막겠다는 심리는 처음부터 끝까지 계속된다.

 

한가지 주목할 것은 황자들간의 후계다툼에서 이렇게 스스로 공을 세우려고 노력하는 것은 어쨌든 국가에 도움이 되는 진취적인 일면이 있다. 경쟁상대가 공을 세우지 못하게 막는 것도 그 자체가 진취적이라 할 수는 없지만, 스스로 더 발전하고자 하는 진취심의 또 다른 표현이라 할 수 있다. 황위계승투쟁에서 나타나는 여러가지 전략전술들 중에서 이것은 거의 유일하게 국가에 도움이 되고 불리한 점은 없는 수단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