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분석/황자쟁위술

[황자쟁위술] 여인노선술(女人路線術) 화기소장패(禍起蕭墻牌) 당현종편외

중은우시 2015. 8. 25. 14:42

 

당현종과 양옥환(楊玉環, 양귀비)의 이야기는 백거이의 <장한가>를 통해 대대로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칠월칠일장생전(七月七日長生殿), 야반무인사어시(夜半無人私語時), 재천원위비익조(在天願爲比翼鳥), 재지원위연리지(在地願爲連理枝).” 그러나, 당현종이 사랑한 양옥환은 바로 그의 며느리였다. 즉, 당현종과 무혜비(武惠妃)의 사이에서 태어난 황십팔자(皇十八子) 수왕(壽王) 이모(李瑁)의 처였다. 원래 양옥환은 개원7년(719년) 명문집안에서 태어난다. 고조부 양왕(楊汪)은 수나라의 상주국, 이부상서를 지냈고, 부친 양현염(楊玄琰)은 촉주사호(蜀州司戶)를 지내, 양옥환의 어린 시절은 촉(지금의 사천성)에서 보낸다. 그녀가 10살쯤 되었을 때, 부친이 사망하면서 낙양에 있는 셋째숙부 양현규(楊玄珪)의 집으로 가서 자란다. 개원22년 7월 당현종의 딸 함의공주(咸宜公主)가 낙양에서 혼례를 거행하는데, 양옥환도 참석한다. 함의공주의 동생인 이모는 그때 마주친 양옥환에게 첫눈에 반하여, 생모인 무혜비에게 졸라당현종으로 하여금 그녀를 수왕비(壽王妃)로 책봉하게 한다. 그녀는 이모와 혼인 한 후에 아들 한 명, 즉 당현종의 손자를 낳은 바 있다.

그런데, 사태가 벌어진 원인은 무혜비에게도 있었다. 무혜비는 원래 당현종의 총애를 받아 황후와 같은 대우를 받고있었는데, 그녀는 이를 이용하여 태자 이영(李瑛)을 폐위시키고 자신이 낳은 아들 수왕 이모를 태자에 앉히고자 했다. 그리하여, 수왕 이모와 양옥환을 황궁으로 불러들여 당현종을 곁에서 모시게 함으로써 당현종의 호감을 얻어 태자가 되는데 도움을 되게 하려 했다. 그러나 농교성졸(弄巧成拙)이라고, 무혜비는 죽을 때까지 자신의 아들을 태자로 만들지 못하였을 뿐아니라, 오히려 당현종이 양옥환에게 흑심을 품게 만들었다. 무혜비가 죽은지 얼마 지나지 않아, 당현종은 모친 두태후의 복을 빈다는 명목으로 칙서를 내려 양옥환에게 도관으로 출가하여 여도사가 되도록 한다. 도호는 “태진(太眞)”이다. 이렇게 하여 양옥환과 이모간의 부부의 연을 끊어버린다. 그리고 당현종은 위소훈의 딸을 수왕에게 주어 수왕비로 책봉한다. 그 후, 당현종은 양태진을 궁중으로 불러들여 귀비로 삼았다. 당현종은 왕황후를 폐위시킨 후 다시 황후를 두지않아, 양귀비는 사실상 황후와 동일한 대우를 받았다. 이는 이전에 무혜비가 누리던 지위였다. 수왕 이모는 모친의 총애를 빌어 태자의 자리를 노렸지만, 실패했을 뿐아니라, 자신의 처마저 부황에게 빼앗기고 만 것이당.
 
청나라를 개창한 누르하치는 처음에 왕위후계자로 원비(元妃, 본부인) 퉁자씨(佟佳氏)의 소생인 장남 츄잉(褚英)을 정해놓았으나, 나중에 그는 비양발호하여 동생들을 못살게 굴고, 대신들로부터 신임도 잃으며, 마지막에는 누르하치와 동생들이 죽도록 저주한 일까지 발각되어 결국 후계자에서 쫓겨나고 누르하치로부터 죽임을 당하게 된다. 그렇게 되자 츄잉의 동생으로 역시 퉁자씨소생인 둘째아들 따이샨(代善)이 자연스럽게 후계자로 떠오른다. 누르하치는 츄잉을 배양했던 것처럼 따이샨의 군사, 정치능력을 배양시킨다. 따이샨과 따이샨의 장남인 웨투어(岳托)에게 각각 팔기중 1기씩을 거느리게 하고, 매번 전쟁후 전리품을 분배할 때도 “특별히 좋은 부민(部民)”을 따이샨에게 나눠주었을 뿐아니라, 여러 패륵들 앞에서, “내가 죽은 후 나의 어린 아들과 대푸진(大福晋)을 대아거(大阿哥, 즉 따이샨)에게 맡길 테니 잘 보살펴달라.”고까지 말하였다. 그리고 천명5년(1620년) 누르하치는 따이샨을 ‘사한(嗣汗)’ 즉 중국식으로 말하자면 태자로 임명한다.

 

그 해 삼,사월경, 누르하치가 수도를 계번성에서 사르후성으로 옮기기로 하고, 성안을 시찰한 후 각 패륵이 저택을 지을 택지를 지정해준다. 따이샨은 장남 웨투어의 택지가 자신의 택지보다 좋은 것을 보자 이를 탐내서 이패륵 아민과 삼패륵 망구얼타이로 하여금 따이산의 집이 너무 협소하다고 누르하치에게 말하게 한다. 그 뜻은 웨투어의 택지를 자신이 차지하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구월 초사흘에는 따이샨의 둘째아들 슈투어(碩托)가 부친과 계모의 학대를 견디다 못해 사라져버리는 실종사건이 벌어진다. 당시 어떤 사람은 그가 명나라로 망명했다고 말한다. 아직 슈투어가 명나라로 망명했는지가 분명하지도 않은 상태에서 따이샨은 분명 슈투어가 명나라에 망명하였을 것이라고 확언한다. 그 후 슈투어를 찾아내고 그가 명나라에 망명하지 않았음이 분명해진 이후에도 따이샨은 여전히 누르하치에게 5,6번이나 슈투어를 참살하라고 청한다. 누르하치는 따이샨의 요구를 거절하고, 슈투어를 석방한다. 이 일을 계기로 누르하치는 따이샨의 두 전처소생 아들에 대한 대우문제를 조사해 보게 된다. 그 결과 따이샨과 후처는 전처소생인 웨투어와 슈투어를 학대하였으며 그들의 자산은 모두 다른 배다른 형제들보다 적은 것이 드러난다. 그러자, 누르하치는 따이샨을 질책한다: “너도 전처의 소생이다. 그런데 어찌 내가 너를 더 가깝게 대해주었던 것은 생각하지 않는 것이냐. 너는 어찌 후처에 휘둘려 이미 장성한 아들을 학대하느냐. 하물며 나는 항상 가장 좋은 부민을 너에게 나눠주었는데, 너는 왜 나처럼 좋은 부민을 웨투어, 슈투어에게 나눠주지 않았느냐? 누르하치는 웨투어와 슈투어를 따이샨으로부터 분가시켜 주고, 따이샨의 사한(嗣汗) 지위를 공개적으로 박탈한다.

따이샨은 후처를 자신의 손으로 죽이고 나서, 누르하치와 다른 형제들 앞에 이 일로 여러 패륵과 대신들에게 원한을 품지 않을 것이고, 만일 이를 어기면 천벌을 받을 것이라고 맹세한다. 그러자 누르하치는 그를 용서한다. 태자의 자리는 박탈했지만, 여전히 사대패륵의 우두머리로 남을 수 있게 해주고, 국정에도 참여하게 해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