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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분석/황자쟁위술

[황자쟁위술] 광결붕당술(廣結朋黨術) 교장외위패(交將外圍牌)

by 중은우시 2015. 8. 25.

 

병법에 이런 말이 있다: “장수는 밖에 나가 있으면, 군왕의 명도 받들지 않을 수 있다(將在外而君命有所不受).” 이는 봉건시대에 지방에 주둔하며 병사를 거느리는 장수의 권한은 공공연히 황제의 명에 항거할 수 있을 정도였다는 것을 말해준다. 당나라때가 최전성기인데, 그때의 지방절도사는 거의 나라 속의 나라와 같았다. 예를 들어, 절도사가 죽으면, 조정이 새로 절도사를 파견하는 것이 아니라, 아들중 한 명이 군대와 지방을 물려받아 절도사가 된다. 이런 승계절차가 자체적으로 완료되고 나면 중앙정부는 어쩔 수 없이 현상을 받아들여 절도사에 임명할 수밖에 없었다. 이들 절도사들은 중앙정부에서 돈도 주고 재물도 주면 중앙정부에 고개를 숙이지만, 만일 중앙정부의 조치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언제든지 스스로 황제를 칭하고 반기를 든다. 이런 상황은 조위(曹魏)로부터 남북조, 오대에 걸쳐 조광윤이 진교병변으로 황제에 오를 때까지 계속된다. 당시의 왕조교체는 모두 병권을 장악한 장수들의 반란으로 일어났다.

 

송태조 조광윤은 병권을 장악한 장수들이 중앙정권에 위협이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므로, 군사개혁을 통하여,  “장무상병, 병무상장(將無常兵, 兵無常將)” 즉, 장수는 자신이 고정적으로 거느리는 병사가 없고, 병사는 그들이 고정적으로 지휘받는 장수가 없게 만든다. 이렇게 하여 송나라이후에는 군사쿠데타의 가능성이 기본적으로 사라지게 된다. 그러나, 송나라이전에 황자간의 황위계승투쟁에서는 병력을 장악한 장군을 자신의 편으로 만들어 외부지원세력으로 확보하는 것이 매우 중요했다.

 

진나라때 진시황의 장남 부소(扶蘇)는 비록 자신이 차지해야 할 황제의 자리를 막내동생 호해(胡亥)에게 결국 빼앗기기는 하지만, 그가 상군에서 수십만 병력을 거느린 몽염(蒙恬)과 감군(監軍)으로 있으면서 긴밀한 교분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은 그의 적수인 호해, 조고, 이사를 골치아프게 만들었다. 수십만 정예병력을 거느린 몽염이 자신들에게 반기를 들고 함양으로 쳐내려온다면 그들로서는 막아낼 방법이 없다. 그리하여, 호해, 조고등은 조서를 위조하여 부소를 먼저 죽인 후, 몽염까지도 끝까지 핍박하여 죽게 만든 것이다. 이는 몽씨집안의 비애였다. 몽씨집안은 부소와의 관계가 너무 밀접하여, 호해, 조고의 입장에서 용납할 수 없었기때문에 한때 최고의 무장가문이었던 몽씨집안은 3대만에 멸문당할 수 밖에 없었다.

 

원가30년 정월, 송문제 유의륭(劉義隆)의 태자 유초(劉劭)는 무당 엄도육등과 결탁하여 무고(巫蠱)사건을 일으켜 부친에 의해 태자의 자리에서 쫓겨날 위기에 처하자, 심복인 진숙아(陳叔兒), 첨숙아(詹叔兒), 장초지(張超之), 임건지(任建之)등과 밀모하여 부친 송문제를 시해하고, 스스로 황제에 오른다. 그러나, 지방의 장군들은 그를 인정하지 않았다. 같은 해 삼월, 지방병권을 장악하고 있던 심경지(沈慶之), 유원경(柳元景), 종각(宗慤)등은 무도한 자를 주살한다는 명목으로 유준(劉駿, 효무제)을 옹립한 후, 유초의 세력를 무력으로 진압하고, 유초와 그의 아들 4명을 모조리 죽여버린다. 그 중 종각은 일찍이 “끝없이 부는 바람을 타고 만리의 물결을 헤쳐나가고 싶다(願乘長風破萬里浪)”고 말한 것으로 유명한 인물이다. “승풍파랑(乘風破浪)”이라는 고사성어는 바로 여기에서 나왔다. 유준이 이들의 옹립을 받게 된 것은 유준이 무릉왕의 신분으로 서양만(西陽蠻)의 반란을 평정할 때, 참여했던 심경지, 유원경, 종각등을 자기편으로 만들어 두었기 때문이다.

 

부소, 유준은 외지의 장군들과 교분을 다졌지만, 어떤 황자는 “권력은 총부리에서 나온다”는 노선을 쫓아 한편으로 외지의 장군들과 교분을 다지면서, 다른 한편으로 동궁 혹은 왕부에 많은 망명객, 무뢰배, 무사등 자신을 위하여 목숨을 걸 수 있는 자들(死士)를 모집하여 기르기도 했다.

 

이건성은 동생 이세민과의 대결에서 자신의 태자위를 지키기 위하여, 배적(裴寂)등 대신들과도 교분을 맺고, 후궁들 중 서모인 장첩여(張婕妤), 윤덕비(尹德妃)등에게 잘 해주어 자신의 편으로 만들었을 뿐아니라, 지방의 장군들도 자기편으로 끌어들인다. 무덕5년 팔월 명을 받아 유주도로 갔을 때는 유주총관 연왕 이예(李藝, 원래 羅藝였으나 당고조 이연이 이씨성을 하사한다)를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고 무덕5년 겨울 유흑달의 제2차반란을 진압할 때는 신주총관 여강왕 이애(李璦)를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인다. 그 외에 이건성이 자기편으로 끌어들인 장수는 나중에 이세민에게 의탁하는 왕군곽(王君廓)도 있다. 이건성은 외지의 장수를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는 외에 장안과 각지에서 용맹한 병사 2천여명을 끌어모아 동궁위사(東宮衛士)로 삼는데 이들은 좌우장림에 주둔하여 장림군(長林軍)이라 불리웠다. 그리고, 이예는 비밀리에 돌궐기병 3백명을 이건성에게 보내어 동궁의 무력을 강화한다.

 

물론, 이세민, 이원길도 각각 칠팔백명의 병사를 모았다. 이렇게 사병을 모으는 것은 이들 삼형제가 처음 시작한 것이 아니다. 일찌기 두만선우의 아들 묵돌선우는 “명적소사(鳴鏑所射)”로 애마와 애첩을 죽이면서 자신의 명이라면 뭐든지 따르는 사사(死士)를 길러 마침내 두만선우를 죽이고 선우에 오른 바 있다. 유초가 쿠데타를 일으켜 부황 송문제를 죽일 수 있었던 것도 평소에 길러둔 사사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옹정제가 황위를 얻을 수 있었던 것도 융과다와 연갱요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인데, 연갱요는 한군상황기에 소속되어 있으면서, 사천순무, 천섬총독으로 군대를 이끌고 변방의 반란을 진압한 공로가 있어 강희제에 의해 대장군에 임명된 인물이다. 그러한 그가 윤진(옹정제)의 심복이 되었다는 것은 옹정제가 황위를 차지하는데 무력으로 지원할 수 있는 세력을 갖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황자들의 수하로 들어간 사사들 중에는 충의용사(忠義勇士)도 있지만, 간신소인배도 있다. 이들은 자신이 모시는 황자가 황위를 차지할 수 있도록 하는데 최선을 다하고, 심지어 목숨까지 거는데, 그렇게 하는 이유는 황위를 차지하게 되면 자신의 부귀영화는 백퍼센트 보장되기 때문이다. 황자들은 이들의 이러한 심리를 잘 알아, 널리 모집하여 자신이 황위를 차지하는데 이용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