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위는 누구나 탐내는 자리이지만 손에 넣기 그리 간단하지만은 않다. 황위다툼의 매커니즘은 자리를 지키려는 황태자나 그를 빼앗으려는 다른 황자나 너무 황위에 대한 욕심을 노골적으로 드러내지 않아야 한다. 그들의 위에는 심판보다 훨씬 냉정한 눈으로 내려다보는 황제가 있기 때문이다. 만일 권력욕으로 인간성까지 잃어버리면(형제를 죽이거나 모함하면) 황제는 바로 모역(謀逆), 불효(不孝) 혹은 불인(不仁)한 자로 보아 후보에서 제외시킬 것이다. 그렇다고, 권력에 대한 야망과 의욕이 전혀 없는 것처럼 보이게 되면 황제는 “이 아들은 너무 유약해서, 대사를 맡길만하지 못하다”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총명한 황자라면 “경쟁하면서 양보하고, 양보하면서 경쟁(旣爭又讓, 旣讓又爭)”할 줄 알아야 한다. 그렇게 하여 황제로 하여금 이 아들은 영명하고 심지가 있어 황위를 잘 지켜낼 것이라고 여기게 해야 한다.
유가사학자들에게 높이 평가받는 오태백(吳太伯)은 이 방면에서 모범사례라 할 수 있다. 오태백은 원래 고공단보(古公亶父)의 장남이다. 고공단보는 나중에 손자 창(昌)이 주왕조를 건국한 후 주태왕(周太王)에 봉해진다. 고공단보에게는 장남 태백, 차남 중옹(仲雍), 삼남 계력(季歷)이 있었는데, 계력이 가장 현명했을 뿐아니라, 계력의 아들 창(昌, 즉 주문왕)이 뛰어난 자질을 지니고 있었다. 그리하여 고공단보는 왕위를 계력, 창에게 물려주고 싶어했다. 이를 잘 아는 태백은 동생 중옹과 함께 나라를 떠나 형만(荊蠻)의 땅, 즉 나중에 오(吳)나라가 되는 지방으로 간다. 그리하여, 고공단보는 왕위를 계력, 창에게 차례로 물려줄 수 있었고, 희창(姬昌, 주왕실의 성은 희(姬)이다)은 결국 은나라의 주왕을 몰아내고, 주왕조를 개창한다.
형만의 땅으로 간 오태백도 가만히 놀고 있지만은 않았다. 그가 동생을 위하여 왕위를 버리고 왔다는 것을 알고 그의 인품에 감동한 사람들이 그의 휘하에 모여들었고, 결국 그는 이들을 모아 ‘오(吳)’나라를 만든다. 사마천은 <사기>에서 오(吳)를 가장 역사깊은 제후국으로 취급했고(주왕실과 성이 같은 姬姓제후국), <오태백세가>를 ‘세가’의 첫머리에 두었다. 만일 태백이 계력에게 왕위를 양보하지 않았더라면, 아마도 그는 계력을 따르는 신하 혹은 야심만만한 창에 의하여 제거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그는 왕위를 버리고 형만으로 도망침으로써 명성도 얻고, 오나라를 세워 군주가 되며, 후세에 동오문화의 시조로 받들어지는 영광을 누릴 수 있었다.
세상사람들에게 송양지인(宋襄之仁)이라는 비웃음을 받는 송양공(宋襄公) 자보(玆甫)는 왕위도 양보를 통하여 얻은 바 있다. 주양왕 원년(기원전652년) 자보의 부친인 송환공(宋桓公)의 병세가 위중해진다. 송환공의 장남은 목이(目夷)인데 모친이 첩이어서 서자(庶子)였고, 차남은 자보인데 모친이 송환공의 정실부인(위문공의 여동생)이어서 적자(嫡子)였다. 적장자계승의 원칙에 따라 자보는 태자의 자리에 오른다. 그러나, 송환공은 자보와 목이를 놓고 누구를 후계자로 삼는게 좋을지 고민하고 있었다. 이를 알고 있는 자보는 아무도 예상치 못한 양보카드를 내민다. 그는 부친의 병상앞에 무릎을 꿇고 태자의 자리를 목이에게 양보하게 해달라고 간청한다: “목이는 저보다 나이도 많고 어지니, 목이를 태자로 삼아주십시오.” 송환공은 목이를 태자로 세울 생각으로 목이를 불러 자보의 뜻을 전한다. 그러자, 총명한 목이는 금방 상황을 파악한다. 만일, 자신이 왕위를 물려받더라도 자보의 세력이 건재하므로 왕위를 오래 유지할 수 없을 것이므로, 그도 역시 사양한다: “나라를 나에게 양보하려고 한다면 그것이 가장 어진 것이 아니겠습니까. 제가 아무리 어질다고 하더라도 어찌 동생 자보를 따를 수 있겠습니까. 하물며 적자를 폐하고 서자를 세우는 것은 법도에 어긋납니다.” 목이는 동생 자보가 다시 사양하는 것을 막기 위하여 스스로 위(衛)나라로 도망친다. 그리하여 자보의 태자 자리는 그대로 유지되고, 송환공이 죽은 후 왕위에 오르니 그가 송양공이다. 송양공은 왕위에 오른 후 목이를 재상에 앉혀 군정대권을 장악하도록 한다.
송양공의 양보벽(讓步癖)은 우둔할 정도였는데, 대표적인 경우가 “송양지인”이라는 고사를 낳은 홍수지전(泓水之戰)이다. 송군과 초군의 전투에서 송군은 홍수의 이쪽에 이미 진열을 정비하고 있었는데, 초군이 홍수를 건너오고 있었다. 목이는 초군이 절반쯤 건너왔을 때, “초군은 병력이 많고 우리는 병력이 적으니, 그들이 강을 다 건너지 않은 틈을 타서 공격하는 것이 좋겠습니다”라고 건의하나, 송양공은 “우리는 인의(仁義)의 군대인데, 어찌 상대가 강을 건너는 틈을 타서 공격할 수 있겠는가”라며 받아들이지 않는다. 초군이 강을 다 건넌 후 강가에 포진을 시작하자, 목이는 “초군이 아직 포진을 다 하지 못한 틈을 타서 공격하는게 좋겠습니다”라고 건의하나, 송양공은 역시 “안된다”고 받아들이지 않는다. 결국 초군이 전열을 다 정비한 후 송군을 공격하자, 송군은 대패한다. 송양공도 이때 다리에 큰 부상을 입어 다음 해 사망한다. 송양공은 패전한 후에도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군자는 이미 부상을 입은 적을 공격하지 않고, 이미 반백이 된 노인을 공격하지 않는다. 특히 옛사람들은 전쟁때 험준한 지형에 의존하여 승리를 취하지 않았다. 과인의 송나라가 곧 망하게 되더라도, 차마 아직 포진하지도 않은 적을 공격할 수는 없었다.”
송양공의 예양(禮讓)이 황위를 놓고 다투면서 목이에 대하여 사용했을 때는 큰 효과를 발휘했지만, 전쟁때 초군에 대하여 사용했을 때는 전혀 효과를 얻지 못하고 오히려 ‘송양지인’이라는 고사와 천고의 멍청한 군주라는 오명만을 남겼다. 이를 보면 같은 행위도 경우와 상황에 따라 전혀 다른 결과를 가져옴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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