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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분석/황자쟁위술

[황자쟁위술] 투량환주술(偸梁換柱術) 서자입적패(庶子入嫡牌) 건륭제편

by 중은우시 2015. 8. 13.

 

건륭의 모친은 누구인가? 전설들을 살펴보기 전에 정사의 기록을 먼저 살펴보면 건륭의 탄생과 모친에 대하여 이렇게 적고 있다: “옹친왕 윤진의 넷째아들 홍력(弘歷, 건륭제의 이름), 강희 오십년 팔월 십삼일 자시 왕부(王府, 지금의 북경 옹화궁)에서 탄생한다. 모친은 거거(格格) 뉴후루씨(紐祜祿氏)이다.”

청나라의 황제 12명중에서 모친에 대하여 의문이 있는 경우는 건륭밖에 없다. 다른 황제들은 모친이 누구인지 아주 명확하다. 그렇다면 건륭의 생모에 관하여 몇 가지 설이 있을까? 주로 4가지이다.
 
첫째 전설은 이렇다. 즉 건륭은 절강 해녕 진각로(陳閣老)의 아들이라는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이 해녕진씨(海寧陳氏)가 발해고씨(渤海高氏)에서 갈려져나왔으니, 이에 따르면 건륭제는 고구려 왕족의 후손이 되는 셈이다. 이 전설은 오래전부터 있었다. 청나라중기에 이미 나타났다. 해녕진가는 청나라때 재상을 3명이나 배출한 명문집안이다. 순치제때 재상 진지린(陳之遴)이 있고, 강희제때도 재상을 배출하고, 옹정제때도 재상을 배출했다. 건륭의 부친이 바로 이 해녕진가의 진세관(陳世倌)이라는 전설이 있다. 절강 해녕 사람인 홍콩무협작가 김용(金庸) 선생의 소설 <서검은구록(書劍恩仇錄)>은 이 전설에 살을 덧붙인 것이다. 이 이야기는 유명해서 중국의 누구나 알고 있는 것이 되었다. 다만, 맹삼(孟森) 선생은 건륭의 남순은 친부모를 만나러 갔다는 것에 대하여 자료를 확인해보고, 건륭의 제1차 남순으로 강남에 갈 때 해녕을 들르지 않았고, 제2차 남순때도 해녕을 들르지 않았으며, 제3차 남순때는 해녕에서 지내기는 했으나 그 때 진세관은 이미 죽었다고 고증한다. 그래서 건륭이 강남으로 간 것이 그의 친부모를 만나기 위한 것이라는 주장은 성립될 수 없다고 본다.
 
건륭이 강남으로 갔을 때, 해녕진가의 집중 하나에 머문다. 그 집은 "우원(隅園)"이라는 이름을 가졌다. 성의 한쪽 귀퉁이에 있기 때문이다. 건륭이 그 곳에 머물 때, 이름을 "안란원(安瀾園)"이라고 고친다. 건륭이 그 곳에 간 것은 주로 절강의 해당공정(海塘工程, 바닷물의 범람을 막는 둑을 만드는 공사. 이 지역은 매년 바닷물이 범람하여 엄청난 피해를 입고 있었다)을 위한 것이었으므로, "안란원(파도를 안정시키는 집이라는 의미임)"이라 한 것이다. 그것은 제3차, 제4차 남순 때도 이 곳에 머물렀는데, 그것은 해녕에 머문 것이 바로 해당공정때문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전설은 시간이 흐를수록 신비스럽게 변한다. 진가와 옹정은 같은 해, 같은 달, 같은 날 태어난 자식이 있었는데, 진가는 사내아이를, 옹정은 딸을 낳았다는 것이다. 옹정은 그 사내아이를 보자고 했고, 보고나서는 바꿔쳤다. 진가에서는 사내아이를 보내고 딸을 받은 것이다. 이렇게 바뀐 사내아이가 바로 건륭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전설은 고증을 해보면 근거가 없고, 그저 순수한 날조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이 건륭의 생모에 관한 첫번쨰 전설이다.
 
둘째 전설은 이렇다. 청나라말기에 왕개운(王闓運)이라는 사람이 있는데, 저명한 학자, 작가였다. 그는 <상기루문집(湘綺樓文集)>에 이런 글을 남긴다. 건륭모친이 만주족인 뉴후루씨인 것은 맞지만 그녀의 친정은 승덕(承德)에 있었는데, 집안이 가난했다. 7, 8세때 집안사람들을 따라  시장에 가서 작은 식당을 열어 술을 팔고, 음식을 팔았는데, 그녀 때문에 장사가 아주 잘 되었다. 13,4세가 되었을 때, 그녀는 북경으로 가서 수녀(秀女) 선발에 참가하는데, 그녀는 선발되어 옹정제의 왕부로 보내어진다. 그녀는 옹정왕부에서 잡일을 했는데, 나중에 옹정이 아주 심하게 병을 앓게 된다. 그녀는 밤낮으로 시중을 들었고, 몇달 후 옹정의 병세가 호전된다. 병이 호전된 후 그녀와 같이 지냈고 나중에 임신을 한다. 그리고 아이를 낳으니 그 아이가 바로 건륭이다. 이것은 왕개운이 책에 쓴 이야기이다. 나중에 장채전(張采田, 일명 張爾田)이 <청열조후비전고>라는 책을 쓰면서 영화(英和)의 <은복당필기>와 왕개운의 <상기루전집>의 기록을 인용하고 사람들은 건륭의 모친에 더욱 관심을 갖게 된다. 나중에 청왕조의 유로인 김량(金梁)이 고증을 하는데, 이런 일은 절대로 불가능하다고 한다. 왜냐하면, 청나라궁정의 법도에 따르면 수녀선발이 아주 엄격하여, 승덕의 여자아이가 수녀선발에 끼어들어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이야기를 학자들은 근거가 없다고 본다.
 
셋째 견해를 이야기해보자. 모학정(冒鶴亭)은 열하도통의 막료를 지낸 바 있는데, 그는 여기서 한 가지 전설을 듣는다. 그것은 바로 건륭의 모친이 열하행궁의 한 궁녀라는 것이다. 이가씨(李佳氏)라는 궁녀이다. 대만에 장련(莊練)이라는 학자와 또 한명의 유명한 소설가 고양(高陽)이 이 설에 찬동한다. 그리고 고증을 거쳐 말한다. 이 이가씨의 이름은 이금계(李金桂)라고 한다. 고양의 소설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강희49년 팔월, 강희제는 여러 황자, 황손을 데리고 아격구장(阿格鳩場)으로 사냥을 떠난다. 사아거 윤진은 제1분대의 분대장이었는데, 삼척짜리 뿔을 가진 숫사슴을 발견하고 전력으로 쫓아간다. 한참을 쫓아가고 나서야 기회를 잡아 총을 들어 “탕, 탕”하고 쏘았고, 한발은 사슴의 머리에 또 한발은 가슴에 명중한다. 사슴이 쓰러지자 그제서야 말에서 내려 가지고 온 물을 마시며, 수하들이 오기를 기다린다. 청나라때 황제가 황자, 황손들을 데리고 사냥을 나간 목적은 이를 통하여 천하를 다스릴 재능이 있는지 확인하는 것인데, 3척의 뿔을 지닌 사슴을 가져가면 확실히 황제에게 자신의 능력을 어필할 수 있기 때문에 약간은 흥분되어 있었다. 은보(恩普)가 사람들을 이끌고 도착해서 한편으로 사슴의 뿔을 자르게 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사슴피를 가져다 윤진에게 바친다. 윤진은 사슴피를 마시자 욕정이 일었고, 눈치빠른 은보는 윤진을 뒷산의 어느 초가집으로 모셔가고, 거기에 궁녀 하나를 데려다 놓는다. 그 궁녀가 바로 이금계이며, 이 일로 임신하게 된다. 융과다(隆科多)의 주선으로 강희제가 이 일을 알고난 후 그 궁녀를 윤진에게 하사한다. 이금계가 낳은 아들은 용모도 비범하고 목소리도 커서 할머니인 덕비(德妃)의 총애를 받는다. 덕비는 모친의 신분이 자식의 신분을 결정하는 청나라제도를 고려하여, 강희제에게 청하여 이 아이를 정실부인인 뉴후루씨의 아들로 삼게 한다. 그 후 홍력은 조부와 부친의 총애를 바탕으로 비밀입저를 통하여 황제에 순조롭게 오를 수 있었다.
 
넷째 견해는 민국시대에 국무총리를 지낸 웅희령(熊希齡)이 궁중에서 일했던 늙은 사람에게 들었다는 것이다. 그는 궁정에서 일한 적이 있는 사람으로부터 말을 듣고, 이 일을 다시 호적(胡適)에게 말한다. 호적은 이 이야기를 책에 인용한다. 내용은 어떤가? 강남에 한 여자아이가 승덕으로 갔는데, 이 여자아이의 이름은 "사대저(傻大姐, ‘사’는 멍청하다는 뜻이다)"라고 한다는 것이다. 나중에 이 여자아이가 아들을 하나 낳는데, 이 사내아이가 바로 건륭이라는 것이다. 호적은 그것을 <호적지일기>에 썼다.
 
그래서 건륭의 모친에 대하여는 4가지 전설이 있다. 첫째는 해녕 진가의 아들이라는 것이고, 둘째는 승덕의 한 여자아이가 북경으로 가서 수녀로 뽑힌 후 옹왕부에서 일하다가 건륭을 낳았다는 것이다. 셋째는 바로 승덕의 이가씨라는 여자가 건륭을 낳았다는 것이다. 넷째는 이 여자가 남방인이고 북방인이 아니며, 북방으로 가서 승덕에 갔고, 나중에 건륭을 낳았다. 즉 건륭의 생모에 관해서는 최소한 4가지 전설이 있다. 이 네가지는 모두 전설이다. 모두 역사적 진실이 아니다. 어떤 TV드라마, 소설은 이 일에 살을 붙여서 이야기를 만들어 냈다. 그리고 만주족에 대한 불만을 이를 통하여 배설했다. 그래서 위에서 말한 4가지는 모두 전설이다.
 
그렇다면 건륭의 생모에 대하여 의문이 없을까? 그래도 여전히 문제가 남는다.
 
먼저 문헌기록을 보자. 청나라에 소석(蕭奭)이라는 사람이 있다. 그는 <영헌록>이라는 책을 썼다. 소석이 <영헌록>을 완성한 때는 건륭17년이었다. 즉, 건륭초기에 이 책을 쓴 것이다. 이 책에서는 옹정원년의 한 가지 사건을 써놓았다. "옹정원년 나라씨(那羅氏)를 황후로 책봉한다. 그리고 측푸진(側福晋) 연씨(年氏)는 귀비(貴妃)가 된다. 측푸진 이씨(李氏)는 제비(齊妃)가 되고, 측푸진 전씨(錢氏)를 희비(熹妃)가 되었다" 최근 어떤 학자는 청나라궁정의 옹정 자료에서 자료를 하나 찾아낸다. 즉 옹정원년 이월 십사일의 자료이다. 이 자료는 옹정이 측푸진 전씨를 희비로 삼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옹정자료의 이 희비와 소석의 <영헌록>에 나오는 그 희비는 당연히 같은 사람일 것이다.
 
옹정이 사망한 후, 건륭은 <옹정실록>을 쓰는데, <옹정실록>에는 이 일을 어떻게 기록하고 있을까? 측푸진 연씨를 귀비로 하였다는 데는 아무런 이론이 없다. 측푸진 이가씨를 제비로 하였다는데  대하여도 큰 차이가 없다. 세번째는 다르다. 측푸진 뉴후루씨(鈕祜魯氏)를 희비로 책봉했다고 적었다. 이 희비는 소석의 <영헌록>에서는 성이 전씨이고, 옹정원년 이월 십사일에 책봉할 때도 아직 성이 전씨인데, <옹정실록>에서는 희비의 성이 전씨가 아니라, 뉴후루씨로 바뀐 것이다. 현재 정사의 기록에는 건륭의 모친이 뉴후루씨이지 전씨가 아니다. 정사는 이렇게 기록했다: 전 사품전의관(四品典儀官) 능주(凌柱)의 딸이라고. 즉, 건륭의 모친은 사품전의관 능주의 딸이다. 그렇다면 능주의 성은 무엇인가? 뉴후루씨이다. 여기에도 여전히 의문이 남는다. 옹정원년 이월 십사일 책봉할 때는 아직 옹정이 비밀입저를 하기 전이다. 팔월 옹정이 비로소 비밀입저를 하고 건륭이 후계자가 된다. 건륭이 <옹정실록>을 편찬할 때는 이미 황제가 되었다. 그렇다면 그의 모친의 성이 무엇인가? 전씨인가, 뉴후루씨인가? 전씨라면 아마도 한족일 것이다. 뉴후루씨라면 만주족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 희비가 건륭의 생모라는 점은 분명해 보이지만, 이 희비는 전씨인가 뉴후루씨인가, 즉 한족인가 만주족인가? 그것은 역사의 수수께끼이다.
 
청나라의 지배계층은 “만주족”이라고 하는 것보다는 “팔기”라고 하는 것이 보다 정확하다. 팔기는 만주팔기(정백기,상백기,정홍기,상홍기,정황기,상황기,정남기,상남기)가 기본이지만, 몽골팔기와 한군팔기도 있다. 즉 팔기에는 몽골족, 한족, 그리고 조선인들도 포함되어 있었던 것이다. 팔기는 모두 수녀선발에 참가할 수 있고, 후궁이 될 수 있다. 옹정제의 측푸진 연귀비, 이제비도 한족이지만 팔기이므로 후궁이 되었다. 다만, 황제에 오르려면 모친이 만주족이 아니고 한족이라는 것이 약점이 될 수 있다. 아마도, 건륭제는 그런 이유 때문에 모친을 한족에서 만주족으로 민족세탁할 필요가 있었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