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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분석/황자쟁위술

[황자쟁위술] 투량환주술(偸梁換柱術) 서자입적패(庶子入嫡牌) 명영종편

by 중은우시 2015. 8. 13.

 

명영종(明英宗) 주기진(朱祁鎭)은 명선종(明宣宗) 선덕제(宣德帝) 주첨기(朱瞻基)의 장남으로 명나라황제중 유일하게 황제에서 물러났다가 다시 복위(復位)한 황제이다. 명,청의 황제들은 기본적으로 1황제1연호의 원칙을 지켰는데, 명영종 주기진만은 처음 즉위시 사용한 정통(正統)과 복위후 사용한 천순(天順),  두 개의 연호를 가지고 있다. 그리하여 혼란을 피하기 위해 통상적으로 다른 황제들은 영락제, 건륭제등과 같이 연호로 부르지만, 주기진만은 정통제로 부르는 경우도 있지만 명영종으로 부르는 것이 일반적이다.

 

주첨기는 명인종(明仁宗) 홍희제(洪熙帝) 주고치(朱高熾)의 적장자이고, 주고치는 명성조(明成祖) 영락제(永樂帝) 주체(朱棣)의 적장자이다.

 

주첨기는 할아버지 영락제의 총애를 받아 황태손(皇太孫)이 되는데, 그가 황태손으로 있을 때, 영락제가 그의 배우자를 골라주기 위해 사천관(司天官)에게 천문을 관측하게 하니, 별이 규루(奎婁)의 사이에 있으니 산동성 제하(濟河)의 사이에서 찾을 수 있다고 말한다. 그리하여, 사람을 산동성에 보내어 알아본 결과 호영(胡榮)의 셋째딸인 호선상(胡善庠)이 총명하고 아름다워 그녀를 황태손비(皇太孫妃)로 삼는다. 그런데, 그 전에 주고치의 황후인 장황후의 모친이자, 주첨기의 외할머니인 팽성백 장부인은 영락제에게 예쁘고 총명한 영성주부 손립(孫立)의 딸 손씨를 추천한다. 그런데 손씨는 나이가 10살밖에 되지 않아 입궁시킨 후 장황후에게 맡겨 기르게 한다. 팽성부인의 거듭된 요청으로, 영락제는 손씨를 황태손빈(皇太孫嬪, 빈은 비보다 한 단계 아래임)으로 삼는다.

 

주첨기가 등극한 후, 할아버지가 정해준 호씨를 황후에 올리고, 손씨를 귀비에 올리게 된다. 그런데, 이 손씨는 나이를 먹을수록 요염해져서 주첨기의 총애를 독차지한다. 그녀를 귀비로 책봉할 때 주첨기는 모든 예제를 황후와 동급으로 해준다. 원래 황후에게는 금보금책(金寶金冊)을 주지만, 귀비에게는 금책(金冊)만 주는데, 손귀비에게는 금보도 주도록 하였다.

 

호황후는 주첨기와의 사이에 공주만 2명을 낳고 아들을 낳지 못했다. 하루는 주첨기가 자식이 없음을 탄식하며, 황후든 귀비든 아니면 후궁이든 아들만 낳아주면 그 아들을 태자로 삼겠다고 말하는 것을 듣는다. 자신이 낳은 아들이 태자가 되고 황제가 되면 자신은 최소한 황태후의 자리를 차지하게 되는 것이다. 손귀비는 주첨기가 아들을 간절히 바란다는 것을 알고는, 황후의 자리를 빼앗을 계책을 꾸민다. 그녀는 후궁들과 관계를 잘 유지하면서, 암중으로 임신한 후궁과 밀약을 한다. 아들을 낳은 후 손귀비의 아들로 하면 황태자가 될 수 있으니, 손귀비의 아들로 주기로 하고, 대신 손귀비는 그 후궁에게 섭섭하지 않게 대해주겠다고 약속을 한다. 그리고, 어느 날 주첨기에게는 자신이 임신한 것같다고 말한다. 그러자, 주첨기는 “만일 그대가 아들은 낳으면, 황후로 삼아주겠다”고 말한다. 손귀비는 속으로 기뻐하면서도 겉으로는 “이미 황후께서 계신데 천첩은 절대로 그럴 마음이 없습니다”와 같은 겸양의 말을 한다.

 

후궁의 배가 불러오자, 손귀비도 식물융복술로 자신도 배가 부른 것처럼 하다가, 그 후궁이 아들을 낳자 데려와서 자신이 낳은 아들인 것처럼 한다. 주첨기는 아들의 얼굴을 보니 영기(英氣)가 있어 기뻐하면서 아이를 안고 한참을 보다가, 그자리에서 이름을 “주기진”으로 지어준다. 그리고, 몸을 돌려 손귀비를 안아주며 “이 아이를 태자로 삼겠다”고 말한다. 그러자 손귀비는 다시 한번, “황후께서 몸이 좋아지셨으니 분명 아들을 낳으실 수 있을텐데, 천첩의 자식이 어찌 황후의 아들을 제치고 태자에 오를 수 있겠습니까?”라고 말하여, 은근히 예전에 말한 “아들을 낳으면 그대를 황후로 삼아주겠다”는 말을 지켜줄 것을 종용한다.

 

주첨기는 호황후에게 여러 번 손귀비가 총명하고 지혜로우며 덕이 있어 모의천하(母儀天下)할 만하다고 말한다. 총명한 호황후는 주첨기의 뜻을 바로 알아듣고 황후에서 물러나겠다고 표(表)를 올린다. 주첨기는 호황후의 이 표를 황태후 장씨에게 올리면서 “비록 손귀비는 받아들이지 못하겠다고 하지만, 호황후의 뜻이 굳다. 그리고 중궁과 귀비는 사이가 화목하니 후환은 없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황태후도 뭐라고 할 말이 없게 된다.

 

호황후는 황후에서 물러난 후 장안궁에 머물며 도고(道姑)가 되고, 주첨기는 그녀에게 “정자선사(靜慈仙師)”라는 도호를 내린다. 그 후에 손귀비를 황후로 삼는다. 그런데, 황태후 장씨는 호황후를 좋아하고 연민의 정을 느껴, 자주 그녀를 자신이 거처하는 청녕궁으로 불렀고, 궁안에서 연회를 베풀 때면 항상 호씨를 손황후의 윗자리에 앉혔다고 한다. 나중에 주첨기도 호황후를 폐위시킨 일을 후회하면서 “그건 내가 어렸을 때 한 일이다”라고 하였다. 나중에 주기진이 황제에 오른 후 전황후가 주청을 드려 호황후는 황후의 지위를 회복한다.

 

손귀비도 원래 딸 하나만 낳았고, 아들은 낳지 못했다. 그녀도 호황후와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암암리에 후궁의 아들을 자신의 친아들로 둔갑시켜 주첨기를 속이고 황후의 자리에 까지 오르고, 그 아들 주기진을 황제에 앉히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