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중국의 역사분석/황자쟁위술

[황자쟁위술] 선참후주술(先斬後奏術) – 고천즉위패(告天卽位牌)

by 중은우시 2015. 7. 27.

 

중국인들이 잘 쓰는 말 중에 “쌀이 익어 밥이 되었다(生米煮成熟飯)”, “나무로 벌써 배를 만들어 버렸다(木已成舟)”라는 말이 있다. 이미 돌이킬 수 없게 되었다는 뜻이다. 황제가 수도를 벗어나 도망쳐 있거나, 적군에 포로로 잡히는 등 황제로서의 권력을 정상적으로 행사할 수 없는 사유가 발생했을 때, 권력을 장악한 후계자가 스스로 황제에 즉위하는 경우가 있다. 이렇게 되면, 수도를 벗어나거나 포로로 잡혀갔던 황제가 돌아오더라도 기정사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게 된다.

 

욕심많고 충신의 간언을 듣지 않던 초회왕(楚懷王, 초나라에는 2명의 초회왕이 있다. 또 한명은 이 초회왕의 손자(혹은 현손)로 초나라가 망한 이후 항연/항우에 의해 옹립되었다가 항우에 피살당하는 초회왕 웅심이다) 웅괴(熊槐)는 당시의 강국 진(秦)과 제(齊)의 사이에서 오락가락 하다가 양국으로부터 모두 공격을 받아 상당한 영토를 잃는다. 진나라는 무관에서 결맹을 맺자고 초회왕을 유인한 후 수도로 끌고가 연금시키고 추가로 영토를 할양할 것을 요구한다. 그는 진나라의 요구를 거부하고 기회를 틈타 도망치다가 다시 붙잡히는 등 갖은 고생을 겪다가  3년후에 병사한다. 초회왕이 진나라에 연금되어 있는 동안, 제나라에 인질로 갔다가 초나라로 돌아온 태자 웅횡(熊橫)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국군에 즉위한다. 그가 바로 경양왕(頃襄王)이다. 그러나, 그는 국군에 오른 후, 부친을 구해오는 것이나 나라를 강성하게 만드는데는 신경쓰지 않고 자란(子蘭) , 정수(鄭袖)등 간신을 가까이 하고, 굴원(屈原)과 같은 충신을 내쫓아 결국 이 “세상사람들이 모두 취해 있어도 혼자서 깨어 있던(世人皆醉而我獨醒)” 삼려대부(三閭大夫) 는 오월오일 멱라강(汨羅江)에 몸을 던져 후인들이 단오절이면 그를 그리워하게 만들었다.

 

당현종(唐玄宗) 이융기(李隆基)는 집권초기 송경, 요숭등 현상(賢相)을 기용하여 개원성세를 구가한다. 이때도 그는 총애하던 무혜비(武惠妃)의 참언으로 태자 이영(李瑛), 악왕 이요(李瑤), 광왕 이거(李琚)등 세 아들을 죽이고 셋째아들 이형(李亨)을 태자에 앉힌다. 집권후기에는 양귀비에 빠져 국정을 소홀히 하며 양국충, 이보국등 간신을 기용하여 결국 755년 안록산의 난이 일어난다. 756년 안록산은 장안을 점령하기에 이르는데, 장안이 함락되기 전에 당현종은 황급히 서쪽으로 도망친다. 그런데 마외파에서 용무대장군 진현례(陳玄禮)등 장병들의 요구로 양국충과 양귀비를 죽이고 사천으로 도망친다. 이때 태자는 북상하여 천하병마대원수가 되어 삭방, 하동, 평로절도사를 겸며 반란군을 평정할 책임을 부담한다. 태자 이형은 반란군을 평정하는데 필요하다는 이유등을 들어 756년 칠월 십이일, 영무(靈武)에서 즉위하니 역사에서는 당숙종이라 부른다. 그는 당현종을 태상황으로 올리고, 곽자의, 이광필등에게 안록산, 사사명의 난을 평정하도록 명하여, 756년 육월과 십월에 장안, 낙양을 수복한다. 당현종은 757년 사천 성도에서 장안으로 돌아오지만 태극궁 감로전에 연금되어 만년을 우울하게 지내다가 762년 사월에 사망한다. 얼마 후 당숙종도 궁중정변으로 목숨을 잃는다.

 

북송말기 송휘종, 송흠종이 거란에 포로로 잡힌 후, 겨우 도망쳐나온 송휘종의 아홉째아들 조구(趙構)는 남경(지금의 하남성 상구)에서 황위에 오른 후, 임안(지금의 항주)로 가서 남송을 개창한다. 그리고, 몽골의 몽케칸이 조어성전투에서 사망하자, 몽케칸의 동생들인 쿠빌라이와 아릭부케가 각각 황위에 등극한다. 쿠빌라이는 개평에서 쿠릴타이를 개최하여 황제에 오르고 아리 부케는 카라코룸에서 쿠릴타이를 개최하여 황제에 오른다. 누가 먼저 칸에 올랐는지에 대하여는 <원사>와 <몽골비사>의 기록이 서로 다르지만, 양자의 실력은 대등하거나 아릭부케쪽이 약간 강했다고 한다. 그러나, 양자간에 수년간 전투를 벌인 후 최종적으로 아릭부케가 쿠빌라이에 투항하는 것으로 끝난다.

 

명영종 주기진(朱祁鎭)은 1449년 환관 왕진의 종용으로 오이라트의 예센(也先)을 정벌하기 위하여 친히 출정하나, 토목보에서 오이라트에 포로로 잡힌다. 예센은 명영종을 포로로 잡은 후 바로 북경성을 포위공격한다. 당시 주전파(主戰派)인 병부상서 우겸(于謙)은 명영종의 아들로 겨우 2살된 견심(見深)을 황태자로 세우고, 주기진의 동생인 성왕(郕王) 주기옥(朱祁鈺)을 감국(監國)으로 삼아 예센의 계속된 공격을 막아낸다. 예센은 앞뒤로 적을 마주할 수밖에 없게 되자 명영종을 데리고 물러난다. 그런데, 권력의 맛을 한번 본 주기옥은 우겸등과 모의한 후, 대신들과 황태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황제로 등극하고, 명영종을 태상황으로 올린다. 주기옥은 역사상 경태제로 불린다.  그는 국가위기를 틈타 자신의 권력욕을 채운 것이다. 명영종은 1년후 북경으로 돌아와서 7년간 연금당한 후 탈문지변으로 다시 황위에 오른다. 명영종은 경태제를 다시 성왕으로 끌어내리는데, 경태제가 죽은 후 친왕의 예로 장례지내며, X조, X종과 같은 묘효도 주지 않았다. 그리고, 명나라황제의 묘는 주원장의 묘가 남경에 있고 정난지역때 실종된 건문제의 묘가 없는 것을 제외하면 모두 명십삼릉에 있는데, 경태제만은 명십삼릉이 아닌 북경 서산에 별도로 매장되어 있다. 명영종은 동생에 대한 원한을 이렇게 나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