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생활문적(生活文摘)
김아매는 1864년 절강성 영파(寧波)에서 태어났고, 중국근대 최초의 여자유학생이다. 그녀의 성취는 뛰어나서 동시대의 <뉴욕타임즈>에서는 그녀를 가리켜, "전형적인 중국의 진보여성", "당대 가장 오래된 제국의 신여성" 그리고 "당금 세계이 가장 걸출한 여성중 하나"라고 칭송했다.
김아매는 두,세살 때 부모를 전염병으로 모두 잃는다. 그 후 중국에 온 선교사인 의사의 양녀로 들어가 양부모를 따라 먼저 일본으로 갔다가, 다시 미국으로 가서 생활한다. 이때부터 그녀의 전설적인 인생은 시작된다.
김아매는 성적이 우수했다. 17살때 뉴욕여자의과대학에 입학하고 4년후에는 수석의 성적으로 졸업하며, 의학학사 학위를 받는다; 이어서 3년간의 연구생과정과 실습을 거쳐 이론과 실무를 모두 겸비한 아주 뛰어난 의사가 된다. 그녀는 여러 미국의원의 요청을 거절하고, 한마리 '보춘조(報春鳥)'가 되어 조국으로 돌아와 봉사한다.
김아매는 하문, 성도, 상해등지에서 의료업에 종사한다. 그동안 일본과 미국의 하와이 등지에서도 의료업에 종사한다. 그녀는 미국에 있는동안 사회각계와 널리 교류하며, 여러 집회에 출석하거나 강연을 하곤 했다.
1905년, 김아매는 다시 중국으로 돌아와서 의료업에 종사한다. 그후 천진으로 가서 북양여의원의 초대 원장이 된다. 2년후에는 원세개의 요청으로 의과학교와 북양여의학당을 창설하여, 여성의료인원을 배양하는데 힘쓴다. 비록 여러가지 제약은 있었지만, 북양여의학당은 그래도 어렵게 창설하고 성공을 거둔다. 이는 천진의료,간호교육의 시작을 알리는 쾌거이다. 김아매는 그 시대 가장 명성있는 여의사였다.
1916년, 김아매는 사직후 천진을 떠나 북경으로 가서 거주하며, 계속 의료업무를 한다. 그리고 의료간호인재를 적극적으로 육성하며 자선사업에도 적극 참여한다. 1934년 협화의원에서 병사하니, 향년 70세이다. 임종때 그녀는 일생동안 모은 재산을 전부 중국의 교육사업에 기부한다.
그녀의 인생은 많은 사람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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