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독서삼매(讀書三昧)
당나라의 대신 곽자의는 이당왕조에 큰 공을 세운 인물이고, 극도로 호화사치한 인물이다. 곽자의의 매년 얻는 봉급은 24만관(貫)에 이르렀다. 백거이가 막 일을 시작했을 때 교서랑(校書郞)이었는데, 월급이 1만6천전(錢)이다. 1년으로 따져도 19만전가량이 된다. 곽자의의 봉급은 백거이의 1,250배에 이른다. 이는 당연히 곽자의 집안의 다른 소득은 계산하지 않은 것이다. 곽자의의 집은 장안의 친인리(親仁里)에 있었고, 친인리면적의 4분이 1을 차지한다. 중간에는 긴 골목이 통하고 있고, 집에 사는 사람이 3천명이었다. 그와 함께 드나들지만 그가 어디에 거처하는지는 몰랐다. 그는 전후로 황제가 하사한 양전미기(良田美器), 명원대관(名園大館), 진귀완물(珍貴玩物)과 가기여색(歌伎女色)이 수도 없이 많았다. 한번은 당대종이 한꺼번에 곽자의에게 미인6명, 시종8명을 하사한다; 대력2년 이월, 곽자의가 반군을 토벌하고 돌아오자, 재상 원재(元載), 황제의 심복인 환관 어조은(魚朝恩)등이 곽자의의 집에서 그에게 연회를 베푸는데, 한번에 30만전을 썼다. 어조은은 그외에 2백필의 나금(羅錦)을 꺼내어 곽자의가 가기에게 상을 내리는 비용으로 쓰게 했다. 이를 보면 그가 얼마나 호화사치의 극을 달렸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중국역사상, 곽자의처럼 호화사치한 대신이 적지는 않다. 그러나 그들은 대부분 사람들에게 욕을 먹었다. 이처럼 호화사치한 곽자의가 사람들의 비난을 받지 않았을 뿐아니라, 생전 그리고 사후에도 사람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는다. 생전에, 당대종은 능연각에 곽자의 화상을 걸어 그에 대한 존경을 표시하도록 명한다; 사후에 당덕종은 특별히 조서를 내려 그의 분묘를 10척 높여준다. 송, 명, 청의 역대왕조에서도 모두 그를 주공단, 제갈량등 역사명신과 함께 제사지내는 대상으로 삼고, 떠받든다; 일부 문인묵객은 그를 자신이 추구하는 인생가치의 우상으로 삼고, 존경하여 마지 않는다. 예를 들어, <요재지이>의 작가 포송령은 이렇게 읊었다: "타일훈명상인각(他日勛名上麟閣), 풍규아사곽분양(風規雅似郭汾陽)"
이는 보기에 약간 이상하다. 그러나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
곽자의는 일생동안 당현종, 당숙종, 당대종, 당덕종의 4명의 황제를 모신다. 이 "사조정란(四朝靜亂)"의 사건사고가 많은 시기에 곽자의는 그의 비범한 군사적인 재능을 가지고 당제국을 안정시키는데 걸출한 공헌을 하고, 탁월한 공훈을 세웠다. 당현종에서 당덕종까지 네 천자가 모두 곽자의를 특별하게 대우하고, 그에게 높은 지위를 부여하여 중서령의 자리에서 백관을 24년간이나 통할하게 한 것은 곽자의가 중요한 카드였기 때문이다. 안사의 난을 평정할 때, 당숙종은 곽자의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대당은 비록 나의 집이지만, 실은 경이 새로 세웠다!" 그의 말은 마음 속에 있는 진심일 것이다. 그리고 사실이다. 역사학자들의 곽자의에 대한 평가에서 그의 공을 얘기할 때는 "진,한 이래로 공로가 크기로 그와 비교할 수 있는 자가 없다." 비록 약간 지나친 점이 없지 않지만, 사실에 가깝다. 확실히, 곽자의가 없었더라면, "안사의 난(외적의 침입을 포함하여)"으로 인한 고난이 두보의 시에서 진실되고 생생하게 묘사한 것처럼 얼마나 더 오래 지속되었을지 모른다. 이 점 하나만으로도 곽자의는 호화사치하더라도 사람의 존경을 받을 만하다. 위로는 지고무상의 천자로부터 아래로는 보통의 한유(寒儒)들까지도 그를 존경했다는 것을 이해하기 어렵지 않다. 감정적으로 말하자면, 이는 바로 애옥급오(愛屋及烏)이고, 사사오입해서 크게 계산하는 것이다.
다만 문제는 이것만이 아니다. 중국의 봉건왕조를 돌아보면, 많은 대신 특히 병권을 장악한 중신은 비록 사직에 공로가 있더라도, 왕왕 공고진주(功高震主)하였다. 곽자의도 시기를 받은 바 있다. 신구<당서>에 이렇게 적었다. "공개일대이주불의(功蓋一代而主不疑)"(공로가 일대를 뒤덮을 만했지만, 황제의 의심을 사지 않았다). "권경천하이조불기(權傾天下而朝不忌)"(권력이 천하를 뒤흔들었지만, 조정이 꺼려하지 않았다). 이는 순전히 황제의 얼굴에 금칠을 하는 거짓말이다. 대력2년 십이월, 어조은은 암암리에 사람을 보내어 곽자의 부친의 분묘를 판다. 그 목적은 바로 위세가 대단한 곽자의가 황제의 자리를 찬탈하려 할까봐 걱정되어, '풍수근기(風水根基)'를 파괴함으로써 곽씨가족의 '용맥(龍脈)'을 차단하기 위함이다. 이는 확실히 조정의 시기하고 의심하는 심리가 만든 해프닝일 것이다. 곽자의는 너무나 잘 알았다: 황제의 묵인이 없으면, 어조은이 그렇게 할 담량이 없다는 것을. 조상의 묘가 파헤쳐지는 것은 자손에게 크나큰 치욕이다. 만일 곽자의가 정말 딴 마음을 먹었다면, 병권을 쥐고 있던 그에게 만일 반란을 일으킨다면 이것은 아주 좋은 핑계거리가 될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곽자의가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은 그가 그렇게 할 수 없기 때문이 아니라, 그는 아예 그런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당대종에게 이렇게 말한다: "신이 오랫동안 병권을 쥐고 있으면서 병사들의 잔혹한 행동을 막지 못하여 사병들이 다른 사람의 분묘를 파헤친 일이 원래 아주 많았다. 이는 신이 불충불효하여 하늘로부터 받는 징벌이다. 인위적인 화가 아니다." 스스로를 자책하는 한 마디 말로 황제의 의심은 해소되고, 사태는 평정되며, 안정을 회복된다. 무엇이 충심인가. 스스로 억울하더라도, 대국을 고려하는 것이야 말로 충심이다.
그러나, 군대는 국가안전과 정권안정을 보장하기 위하여 존재한다. 만일 야심가가 장악한다면, 아마도 그들이 권력을 찬탈하는 도구로 쓰일 것이다. 이 점에서 안록산, 사사명은 바로 좋은 사례이다. 이것이 바로 역대왕조에서 권력자들이 이 문제에 그렇게 민감했던 이유이다. 곽자의는 병권을 손아귀에 쥐고 있고 병력을 이끌고 바깥에 나가 있지만, 황제의 조서가 오면 그날로 길을 떠나 황제를 만나러 달려갔다. 조금도 망설이거나 관망하지 않았다. 그를 도발하거나 이간하려는 시도는 이렇게 하여 성공하지 못한다. 이것은 어쩔 수없이 남송의 악비를 떠올리게 한다. 그를 불러들이기 위하여, 조정은 12도금패를 내려보내지 않았던가. 악비가 애국하는 사람이라는 증거는 여러 가지를 내놓을 수 있지만, 악비는 정치기율을 지키지 않았다. 이 하나만으로도 충분하다. 이 하나만으로도 그의 목숨을 빼앗을 이유는 충분하다. 명령에 복종하고, 지휘에 따르는 것은 군인의 본분이다. 만일 군인이 정치를 논한다면, 이것이야말로 최대의 정치이다. 이는 신하가 조정에 충성을 다하고, 본분을 다하는 가장 직접적인 모습이 된다. 곽자의는 비록 호화사치했지만, 그는 이 점을 잘 처리했다. 이 점을 잘 해냈기 때문에, 그는 선시선종(善始善終)할 수 있었다. 악비보다 훨씬 지혜롭게 처리한 것이다. 곽자의에게서 나타나는 이런 충군사상과 처세원칙은 그가 성실하게 관료로서 일하고, 신용있게 사람됨됨이를 보이는 원동력이 되었다. 그 디시대 윤리도덕의 가장 완벽한 요구조건을 맞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그가 다른 사람의 존경을 받는 또 하나의 원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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