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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당)

적인걸(狄仁傑)의 남다른 말년

by 중은우시 2015. 2. 10.

글: 이숙금(李淑琴)

 

 


적인걸(630-700), 당나라때 병주 태원(지금의 산서성 태원시) 사람이고, 자는 회영(懷英)이다. 당고종, 무측천의 두 황제시대를 거치면서 일생동안 관료생활을 하였고, 청렴하며, 사람을 잘 기용하고, 사건을 잘 처리했으며, 간악한 자들을 제거했다. 원래 혼란스러웠던 당나라를 번영창성하게 만들었으며 시종 백성들을 헤아리고, 권세를 두려워하지 않는 본색을 유지했다. 시종 "묘당의 위에 있으면서 백성들을 걱정했다(居廟堂之上則憂其民)" 백성들의 고통에 관심을 가져, 역사에 이름을 남긴다.


말년의 적인걸은 계속하여 여황제 무측천에게 충성을 다하면서, 당황실중흥의 중임도 어깨에 짊어졌다. 그는 명확히 보았다. 서경업 형제, 낭야왕 이충, 월왕 이정이 전후로 거병하여 무측천에 반란을 일으켰지만 모두 토벌되었고, 밀고의 기풍이 성행하고, 주흥, 내준신등 혹리가 형옥을 장악하여, 많은 대당조일을 죽였다는 것을 그리고 무주의 세력이 중천에 뜬 해처럼 강대하다는 것을. 당황실의 부흥은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당나라황실을 부흥시키려면 한바탕 정변이 필요하다는 것을. 그리고 지금은 시기가 아니라는 것을, 필수불가격한 조건이 갖추어 지지 못했다는 것을, 그래서 그는 인이불발(引而不發), 도광양회(韜光養晦)하여 시기가 무르익기를 기다려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가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각진직수(恪盡職守)하며, 무측천을 전력으로 보좌하는 동시에, 무주정권을 되돌려 당황실을 부활시킬 수 있는 기초를 마련하도록 하는데도 힘을 아끼기 않았다.


비상시기, 적인걸이 만년은 비범한 말년으로 운명이 결정되어 있었다.


686년, 56세의 적인걸은 영주자사가 된다. 당시 영주(寧州)는 각민족이 혼거하는 곳이었다. 적인걸은 백성들의 사정을 잘 살피고, 이민족을 잘 다독이며, 각민족간의 관계를 적절하게 처리했다. 그렇게 하여 인심을 안정시켜서 안팎으로 평안무사했다.


687년, 공부시랑으로 승진한 적인걸은 강남순무사가 되어, 당시 오,초 지방의 미신의 폐습이 심하여, 사묘 1700여곳을 불태워 없애고, 사사(四祠)만을 남겨서, 강남인민이 부담을 경감시킨다.


688년, 무측천은 적인걸을 예주자사에 앉힌다. 당시의 예주는 월왕 이정, 낭야왕 이충등이 '토무(討武, 무측천토벌)'를 시도했으나, 실패한 다음이었다. 반란을 진압한 당시의 재상 장광보(張光輔)는 30만의 병력을 이끌고 와서 공을 탐하며 약탈을 했다. 이정의 일당을 소탕한다는 명목으로 사방에서 가산을 몰수하고, 무고한 사람을 붙잡아 연좌된 자들이 6,7백개 집안에 이르렀고, 몰적된 자들이 5000여구에 이르렀다. 일시에 억울한 자들이 나타나고, 무고한 피해자가 무수했다. 막 부임한 적인걸은 애홍편야(哀鴻遍野), 민불요생(民不聊生)의 상황을 보고는 한편으로 사형수들의 형구를 풀어주고, 다른 한편으로 무측천에게 글을 올려, 원래의 사건이 잘못되었으니, 무측천에게 백성들을 긍휼이 여겨줄 것을 청한다. 무측천은 적인걸이 나라를 중시하여 그가 보고한 것이 거짓일리 없다는 것을 알아서, 사형을 유배형으로 낮추어 모두 풍주로 유배보낸다.


적인걸의 재능과 인망은 점점 무측천의 칭찬과 신임을 받게 된다. 691년 구월, 62세의 적인걸은 처음으로 재상에 임명된다. 적인걸은 재상의 관직에서 조정에 참여할 때는 마침 무승사(武承嗣)가 득세하여 잘나가던 시기이다. 그는 적인걸을 그가 황태자로 임명되는데 장애중 하나로 여긴다. 그리하여 혹리 내준신과 결탁하여 적인걸등 대신들이 모반을 꾀한다고 무고하고, 그들을 페초하여 하옥시킨다. 그러나 적인걸은 자신의 기지와 재모로 죽음에서 빠져나와 진상을 밝힌다. 그러나 무측천은 그를 완전히 명예회복시켜주지 않고, 그를 팽택으로 보내어 현령의 직을 맡게 한다. 부임한 그 해에 팽택은 가뭄이 들고 비가 내리지 않았다. 백성들은 먹을 양식이 없었다. 적인걸은 조정에 글을 올려 이들을 구제해주고, 세금을 면제하여 백성들을 기근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달라고 청한다.


696년 십월, 거란이 기주를 공격하여 함락시켜, 하북이 진동한다. 국면을 안정시키기 위하여, 무측천은 적인걸을 기주와 이웃한 위주자사로 임명한다. 적인걸은 부임한 후, 백성들에게 다시 돌아와서 농사를 짓도록 호소한다. 거란부족은 이를 듣고 무리를 이끌고 북으로 돌아가서, 위주는 재난을 피할 수 있게 된다.


적인걸은 정무에 부지런하고 백성들에게 혜택을 주었다. 그가 부임하는 곳마다 백성들로부터의 명망은 높았다. 무측천은 그를 더욱 중시하게 된다. 697년 십월, 67세의 적인걸은 무측천에 의하여 다시 조정으로 불려가고, 재상의 직무를 회복한다. 무측천을 도와 국가대권을 요리하는 오른팔이 되어 중대한 의사결정에 참여한다. 이때, 적인걸은 이미 연로하여 체력이 쇠약하고, 건강상태가 날로 나빠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개인의 책임이 중대하다고 느끼면서 힘을 다하여, 국궁진췌한다.


698년, 돌궐이 남하하여 하북을 교란시키고 살인약탈을 저지른다. 하북도안무대사 적인걸은 전란후의 처참한 관경을 보면서 4가지 조치를 취한다.

(1) 상소를 올려 하북의 여러 주에 사면령을 내려 일체의 죄를 묻지 않도록 한다. 그리하여 돌궐에서 강제로 부역을 한 백성들이 안심하고 고향으로 돌아와서 생산에 종사하게 된다.

(2) 양식을 운송하여 백성들을 구제한다.

(3) 역참로를 정비하여 부대의 이동을 편리하게 한다

(4) 부하들이 백성을 교란시키는 것을 엄금하여, 위반자는 참한다. 그리하여 금방 하북은 안정을 되찾는다.


무측천은 나이가 들었고, 조카인 무삼사(武三思)를 황태자로 앉혀, 그냐가 힘들게 닦은 위업을 잇게 하려 한다. 적인걸은 직언한다: "제가 보기에 천하의 백성들은 당황실의 은덕을 잊지 않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흉노가 변방을 침범했을 때, 황상께서 명을 내려 양왕 무삼사가 시장에서 용사를 모집했을 때 양왕은 1개월여동안 천명도 모으지 못했습니다. 폐하께서 다시 여릉왕 이현으로 하여금 양왕 무삼사를 대체하게 하자, 여릉왕은 10일도 되지 않아 5만의 무리를 모았습니다. 지금 태자를 세운다면 이현이 아니면 안됩니다." 무측츤은 그의 말을 듣고 아주 화를 내며 논의를 거둔다. 무측천이 병이 들자, 적인걸을 기회를 봐서 다시 간언한다: "폐하께서 여릉왕을 태자로 삼으면 이현은 폐하의 아들입니다. 그러면 당신이 돌아가신 후에도 여전히 태묘에서 이씨후손들의 제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이 영광은 무궁무진합니다. 반대로 폐하께서 조카 양왕 무삼사를 태자로 삼으면, 지금까지 조카가 황상에 오른 후, 고모를 태묘에 모셨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폐하는 더 이상 태묘에서 후손들의 제사를 받을 자격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적인걸의 이 말은 무측천의 아픈 점을 찔렀다. 그러나 이씨에게서 빼앗아온 천하를 다시 이씨에게 돌여준다는 것은 그녀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녀는 적인걸을 질책하며 말한다: "누구를 세우든 누구를 세우지 않든 이는 나의 집안 일인데, 너는 더 이상 참견하지 말라." 적인걸은 침착하게 대답한다: "황상은 사람의 머리와 같고, 신하는 사람의 수족과 같습니다. 원래 서로 떨어질 수 없는 것입니다. 하물며 나는 재상의 자리에 있으니, 태자를 세우는 것과 같은 대사에 제가 어찌 묻고 듣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무측천은 마침내 깨달았다. 그리하여 서언백을 방주로 보내어 여릉왕 이현을 모셔오게 하고 그를 태자로 세운다.


또 한번은 무측천이 적인걸에게 장상(將相)의 인재를 추천해보라고 말한다. 적인걸은 "형주자사 장간지가 장상의 인재입니다. 칠십여세가 되도록 가는 뜻을 얻지 못하고 있습니다. 폐하가 그를 중용한다면 그는 분명 은혜에 감격할 것이고, 폐하를 위하여 힘을 다할 것입니다." 무측천은 그리하여 장간지를 낙주사마로 임명한다. 시간이 좀 흐른 뒤, 무측천은 다시 적인걸에게 인재를 추천하라고 말한다. 적인걸은 말한다. "이전에 장간지를 추천했는데 아직 쓰지 않으셨습니다." 무측천이 말한다: "내가 장간지를 발탁하지 않았느냐?" 적인걸이 말한다: "신이 추천한자는 재상감이었지, 사마감이 아니었습니다." 그리하여 무측천은 다시 장간지를 추관시랑으로 승진시키고, 시간이 조금 흐른 후 재상에 앉힌다. 그외에 적인걸은 선후로 환언범, 두회정, 경휘, 요숭등 수십명의 충성스럽고 청렴하며, 일을 잘 처리하는 관리들을 추천한다. 무측천은 그들을 중용하고, 그들은 도덕성을 지키면서 관료로서 업무를 수행하여 백성들이 혜택을 보았다.


700년, 무측천은 부도대상(浮屠大像)을 만들고자 한다. 비용은 수백만이 들 것으로 예상되었다. 궁에서 그런 돈을 마련할 수 없었다. 그래서 천하의 승려들에게 시주받은 돈을 내놓아 도우라고 조서를 내린다. 70세의 적인걸은 와병중이었는데, 상소를 올려 간언한다: "여래가 설법을 함에 있어서 자비가 위주입니다. 어찌 백성들을 힘들게 하고 허식을 따지겠습니까. 최근 들어 가뭄이 들었고, 변방이 소란스러운데, 만일 돈을 다 쓰고, 인력을 다 쓴다면, 일단 위난이 닥쳤을 때 어떻게 구하시겠습니까." 무측천은 그의 건의를 받아들여서 이 일을 중단시킨다. 나중에 무측천은 대불(大佛)을 만들고자 하는데 역시 비용이 수백만으로 예상되었다. 적인걸을 그 소식을 듣고 다시 상소를 올려 백성들을 힘들게 하는 공사를 중단시킨다.


705년, 81세의 무측천은 병이 위중해진다. 이미 위기일발의 순간이 된 것이다. 시기가 되었다고 보고, 재상 장간지는 환언범, 최현, 원서기, 경휘등과 연합하여, 궁중정변을 일으켜, 이현을 황제에 앉히고, 소위 '당실중흥'을 완성한다. 이렇게 하여 무측천 사후에 발생가능한 정국혼란을 피한다.


이 일은 적인걸이 죽은 후 5년만에 일어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