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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당)

문성공주(文成公主): 티벳으로 시집간 후의 비참한 처지

by 중은우시 2015. 2. 22.

글: 문사여교사(文史女敎師)

 

 

 

 

중국사서에서는 모두 문성공주가 송찬간포(松贊干布)에게 시집간 것은 대당왕조의 특별한 은전이며, 중원문명이 사이(四夷)를 위엄으로 굴복시킨 모범사례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한다. 역사가 과연 그러할까?

 

634년(정관8년), 송찬간포는 장안에 사신을 보내어, 대댱과의 화친을 하고 이를 통해서 중원과의 교류를 강화하고, 정치, 무역등 여러 방면의 이익을 얻기를 희망했다. 이때의 당태종은 토번이라는 오랑캐국가를 아예 눈아래 두지 않았었으므로 단칼에 거절한다. 송찬간포는 대노하여, 병력을 출동시켜 대당의 비호를 받던 토곡혼(吐谷渾)을 친다. 대당은 자신의 번속국을 비호할 능력이 없었다. 그래서 그냥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취급한다. 다만 송찬간포는 여전히 화가 풀리지 않아, 4년후에 다시 병력을 이끌고 대당의 본토를 공격한다. 당나라에서 공주를 보내지 않으면 강제로 붙잡아가겠다고 큰소리친다.

 

당태종은 이때까지는 아직 타협할 생각이 없었다. 공주를 보내지 않았을 뿐아니라, 오히려 각지에서 군대를 긴급히 불러모은다. 그리고 동돌궐과 철륵의 각부를 정벌하여, 여 대군을 모아서 구원하러 보냈지만 대패한다. 그후 송찬간포는 계속하여 당나라의 변경을 기습하고 교란시켰으며, 당나라군대는 연전연패했다.

 

640년 10월, 송찬간포는 다시 사신을 장안에 보내어 화친을 요청하고 이를 조건으로 대당과 의화(議和)를 할 것을 청한다. 당태종은 마음 속으로 이 화친에 거부감이 컸지만, 형세가 어쩔 수 없이 되자, 결국 부득이하게 양보하여 문성공주를 보내게 된다.

 

송찬간포는 강경책과 유화책을 모두 써서, 결국 당태종으로 하여금 공주를 내놓게 만들었다. 이는 대당의 체면이 바닥에 떨어지는 일이었다. 그래서 사관들은 극력 이 화친의 '핍박성'을 완화하는 동시에 대거 문성공주가 티벳에 들어간 후의 지위와 영향을 선전한다. 대당의 공주가 오랑캐국가에서 지위를 존중받았다는 것을 통하여, 여러 오랑캐가 모두 숭배하고 굴복했다는 가상(假像)을 보여주고자 한 것이다. 이러한 거짓된 역사는 역대 사관들에 의하여 알면서도 그대로 답습하게 된다.

 

실제로, 문성공주가 티벳에 간지 여러해동안 자식도 낳지 못하고, 총애도 받지 못했으며, 지위도 평범했다. 평소에는 궁녀처럼 송찬간포의 음식과 기거를 돌보았다. 실은 그 높은 자리에 앉아서, 옹용고귀하고 토번인들의 존경을 받는 국모의 이미지와는 큰 차이가 있었다. 문성공주의 일생은 상당히 불행했다. 그녀는 머나면 오랑캐땅에서 40년을 생활했고, 그중 31년을 과부로 지낸다. 청춘시기의 절반을 모조리 설역고원에서 보낸 것이다. 송찬간포가 죽기 전의 9년동안도 그녀의 혼인은 절대로 행복하지 않았다. 나이가 이미 많았던 송찬간포는 모두 6명의 명분있는 여인과 무수한 명분없는 여인들이 있었다. 그러니 문성공주를 얼마나 신경써줄 수 있었겠는가. 문성공주가 송찬간포에 시집간 후 9년중 3년은 서로 교류가 있었고, 대부분의 시간은 버려져서 잊혀져 있었다. 확실히 총애를 받았다고는 말할 수 없다.

 

문성공주가 시집갈 때 혼수는 아주 풍성했다. 많은 재물을 보냈을 뿐아니라, 장인들도 많이 데려가서, 토번에 선진적인 농업, 수공업생산기술을 전수한다. 그러나 돈황문서의 기록을 보면, 토번인들은 이런 것들을 당나라가 토번의 위세를 겁내서 평화를 구걸하는 공물로 보았다. 이를 보면 당태종이 여인과 재물을 주고 평화를 얻은 것은 다툼없는 사실이라 할 수 있다.

 

그외에 송찬간포는 네팔에서 온 척존공주(尺尊公主)를 위하여는 거금을 들여서 대소사(大昭寺)를 짓고, 척존공주가 가져온 석가모니 8세등신불을 그 안에 모신다; 대당의 문성공주는 비록 불가지보, 석가모니12살때의 등신불을 가져왔지만, 송찬간포는 그녀를 위하여 규모가 훨씬 적은 소소사(小昭寺)를 지어 안치한다. 두 사람의 지위차이는 이를 보아도 알 수 있다. 나중에 금성공주(金城公主)가 티벳에 가서 토번국왕의 정실부인이 된다. 그제서야 비로소 두 불상을 서로 바꾸어 위치하게 하고, 지금에 이른다.

 

이를 보면 알 수 있듯이, 당나라가 처음에 화친에 동의한 것은 실로 어쩔 도리가 없어서였다. 그저 일부 역사기록자들이 체면을 억지로 살리기 위하여 약한 모습을 보인 것은 은혜를 보인 것이라고 쓴 것이며, 송찬간포가 여러번 청혼하여, 대당은 그의 성의에 감복하여 혼인을 허락하였다는 이야기를 만들어 냈다. 그렇지만 역사의 진실은 바꿀 수가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