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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여포)

여포는 백전백승이 아니었다.

by 중은우시 2015. 6. 16.

글: 이치아(李治亞)


삼국시대의 여포는 아주 유명하다. 삼국연의에서는 심지어 그를 최고명장으로 꼽았다. 그래서 소위 "일여이마삼전위(一呂二馬三典韋), 사관오조육장비(四關五趙六張飛), 황허손태양하후(黃許孫太兩夏侯), 이장서방감주위(二張徐龐甘周魏), 창신장수화문안(槍神張繡和文顔), 수용무내명태비(雖勇無奈命太悲), 삼국이십사명장(三國二十四名將), 타말등애화강유(打末鄧艾和姜維)"라는 말이 있다. 이를 보면 여포의 명성이 확실히 보통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아쉽게도 여포가 명성을 얻은 가장 유명한 사건은 모두 가짜이다. 그것은 바로 인구에 회자되는 호뢰관의 삼영전여포(三英戰呂布)이다. 그 내용은 이렇다. 화웅이 목을 베이고, 이숙(李肅)이 급히 보고한다. 동탁은 친히 대군을 이끌고 십팔로제후를 토벌하러 나선다. 여포는 선봉에 섰는, 여러 제후들이 포위당하여 죽어가고 있었다. 여포는 용맹하기 그지없어 십팔로제후는 속속 말에서 떨어진다. 마지막에 유비, 관우 장비의 삼형제가 차륜전을 펼쳐서 막아낼 수 있었다. 이야기는 아주 멋있게 만들어졌지만, 아쉽게도 이는 가짜이다. 왜냐하면 당시 공손찬이 하북에서 마침 유우와 혈전을 벌이고 있었다. 그러므로 소설에서 나오는 "온주참화웅"과 "삼영전여포"는 모두 허구의 것이다.


여포의 명성은 대부분 부풀려진 것이다. 어쨌든 동탁이 조정에 나와서 일을 하려면 의지할 곳이라고는 곁에 있는 이들 전장(戰將)들 밖에 없었다. 이각, 곽사, 번조, 장제는 모두 그리 잘 싸우지 못했다. 그래서 그저 여포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상 여포는 병력을 이끌고 전투하는 데 그다지 뛰어나지않았다. 아마도 그는 자신의 힘을 쓰기 좋아하는 사람이었던 것가다. 전투에서는 빠른 말과 자신의 좋은 병기에 의지했다. 그는 부대를 지휘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어떤 때는 성깔을 부리기도 하여, 심지어 손견의 적수도 되지 못하였다.


당시 여포는 호진(胡軫)과 함께 양인(陽人)으로 진공했다. 손견은 막 원기를 회복하고 양인에서 잔여 병사들을 끌어모으고 있었다. 여포는 기병을 지휘하고, 호진은 보병을 지휘한다. 성격이 불같은 호진은 병졸들보다 앞장서서 싸우겠다고 한다: "오늘 이번에 가면 청수(靑綬, 관인을 묶는 끈)를 죽여야 하다. 그래야 정돈될 것이다" 영장의 이십여명은 모두 여포의 심복이었다. 한참 후, 여포가 서두르지 않고 일어서서 말한다: "나에게 계책이 하나 있다. 호진을 참할 수 있다." 그 후에 암암리에 견제한다. 호진, 여포 두 장군은 광성으로 간다. 이곳은 양인에서 수십리 떨어진 곳이다. 날이 저물고, 병사들과 말은 극도로 피로했다. 원래 광성에서 군영을 차리고 하룻밤을 자려 했다. 그리고 동탁도 사전에 지시를 내려두었다. 호진에게 밤에 광성에서 자면서, 말과 사람에게 먹을 것을 준 다음, 밤에 양인성으로 들어가서, 새벽에 공성을 하라고. 다만 군내에 있는 심복들이 모두 "양인성에 있던 적은 모조리 도망쳤으니, 마땅히 쫓아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놓칠 것이다" 호진은 밤을 틈타 진군한다. 생각지도 못하게 병력이 성아래에 도착하자 멍해지고 만다. 성은 경비가 삼엄했고, 아예 공격할 수가 없었다. 이때 사병들은 배고프고 목말랐으며, 사람과 말이 모두 심히 피로했다. 그리고 저녁이며, 참호와 보루도 없었다. 사병들은 갑옷을 벗고, 말안장에서 내려 그 자리에서 휴식을 취한다. 이때 군대내에서 누군가 크게 소리친다: "성안의 적이 나온다." 여러 병사들이 어지럽게 도망치며, 갑옷을 벗어던지고, 말을 잃는다. 십여리를 가서 적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날이 밝자 되돌아 와서 병기를 수습하고, 공성을 하려고 했다. 성의 수비는 이미 견고했고, 참호는 이기 밒었다. 호진등은 공격하지 못하고 돌아온다. 호진이 패전하자, 여포도 손견을 막을 수가 없었다. 이것이 바로 여포의 처녀전이다. 아쉽게도 실패로 끝나고 말았지만. 이를 보면 여포는 내부투쟁을 좋아하였던 것같다.


진공때 여포는 기회를 잘 잡지 못하였다. 그것은 그만이라고 쳐도, 나중에 철수할 때도 여포는 패배하니, 탄식이 나오지 않을 수 없다. 초평2년 사월, 동탁은 손견의 군대가 혼자서 깊이 들어온 것을 보고, 군대를 철수시켜 장안으로 돌아가 그 날카로운 공격을 피한다. 그리고 여포를 낙양에 남겨서 지키게 한다. 최후의 방어선인 셈이다. 손견이 쇄도해 들어오자, 여포는 선양문을 잠깐 지키다가 도망쳐 버린다. 이는 여포의 성격에 부합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여포의 "인중여포(人中呂布)"라는 말은 어디서 나온 것일까? 삼국지의 기록에 따르면, 여포는 동탁을 죽인 후, 갈 곳이 없이 떠돌아 다니다가 원소의 휘하로 들어간다. 일찌기 원소와 함께 장연을 흑산에서 물리친다. 연나라는 정예병 만여명, 기병 수천필이었다. 여포는 좋은 말을 몰고 다녔는데, 적토라 했고, 성과 참호를 뛰어넘을 수 있었다. 그의 건장 성렴, 위월등 수십이 기병과 연나라진영으로 돌진하여 하루에 3,4번 모두 목을 베고 나왔다. 십여일을 연속해서 싸워서 연나라군대를 격파한다. 여포는 전투에서 용맹하였고, 남들보다 뛰어난 성과를 보여서 당시 사람들이 '인중유여포(人中有呂布)' '마중적토(馬中有赤兎)'라고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