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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여포)

여포(呂布)는 왜 백문루에서 목숨을 잃었는가?

by 중은우시 2013. 4. 27.

글: 이치아(李治亞) 

 

여포는 삼국명장이다. 일찌기 삼국의 전장에서 풍운을 질타한다. 동탁을 위하여 자사 정원을 죽였고, 호뢰관에서는 혼자서 도원삼영(유비,관우,장비)와 싸웠다. 나중에 왕윤과 공모하여 동탁을 죽인다. 그리고 일찌기 이각 곽사에게 도전한 바 있다. 그는 그 이름도 유명한 1:1 결투의 명장이었다.

 

여포가 이처럼 강대하였지만, 아쉽게도 명성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나중에 이각, 곽사의 추적으로 더 이상 도망칠 곳이 없게 되자 원술, 원소의 문하로 들어간다. 그러나, 원씨형제도 여포가 반복무상하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아서, 그에게 살수를 쓴다. 여포는 어쩔 수 없이 다시 도망치고 마지막에는 장막, 진궁등의 아이디어로, 조조를 치려는 생각까지 한다. 조조가 서주를 치는 틈을 타서 조조의 본거지인 연주를 칠려는 것이었다. 만일 성공했더라면 조조는 설 자리가 없어졌을 것이다.

 

그래서 조조는 몸을 돌려 서주를 포기하고 여포와 싸운다. 나중에 승부는 서로 갈렸지만, 최종적으로 여포는 백문루에 갇히고, 결국 조조에 의하여 목이 베인다.

 

그렇다면 여포는 왜 이렇게 잘나가다가, 졸지에 내리막길을 달리게 된 것일까?

 

첫째, 여포는 교만했다. 여포는 스스로 필마화극(匹馬化戟)으로 천하에 적수가 없다고 생각했다. 역사에서도 그렇게 사실대로 기록했다. 여포는 말타기와 활쏘기를 잘했고, 팔 힘이 다른 사람보다 세어서 '비장(飛將)'이라고 불렀다. 여러번 여포는 자신의 일신상이 무공으로 천하를 종횡할 수 있다고 믿었다. 삼국연의를 보면, 이런 말이 있다. "사람들이 우려하고 있을때 하급장교가 와서 보고한다. '여포가 싸움을 걸고 있습니다' 그러자 팔로제후가 모두 말을 타고 나갔다. 군을 8대로 나누어, 높은 언덕에 배치한다. 멀리서 보니 여포는 군마를 타고 깃발을 흔들며 앞장서서 돌진했다. 상당태수 장양의 부장인 목순이 말을 타고 창을 휘두르며 나가서 응전했으나, 여포가 손을 들어 극을 휘두르자 찔려서 말아래로 떨어진다. 사람들이 깜짝 놀란다. 북해태수 공융의 부장 무안국이 철추를 휘두르며 말을 타고 날듯이 나갔다. 여포는 극을 휘두르고 말을 치며 응전했다. 십여합에 이르자, 극을 한번 휘둘러 무안국의 팔을 잘라버린다. 그래서 철추를 땅에 버리고 도망쳤다. 팔로의 군병이 모두 나가서 무안국을 구한다. 여포는 물러난다."

 

둘째, 여포는 자부심이 강했다. 자부심이 강한 여포는 다른 사람의 말을 듣지 않았다. 설사 진궁이라 하더라도, 여포는 마찬가지로 모사는 별 것아니라는 생각으로 대했다. 그래서 여포는 여러번 진궁의 건설적인 건의와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진궁은 조조의 병사가 다가온다는 말을 듣고 계책을 올린다: "지금 조조의 병사는 멀리서 와서 피곤하니, 속전속결하는게 유리합니다. 그들이 기운을 차리도록 시간을 주어서는 안됩니다." 그러나 여포는 말한다: "나의 필마는 천하를 종횡하는데 조조가 뭐 겁나느냐. 그가 진을 다 치기를 기다려서 내가 붙잡겠다." 나중에 조조가 패배한다. 진궁이 말한다: "서채는 긴요한 곳인데, 만일 조조가 습격하면 어떡하려고 합니까?" 그러자 여포가 말한다: "그는 오늘 한번 패배했는데 어찌 감히 다시 오겠는가?"

 

셋째, 충간(忠奸)을 구분하지 못했다. 진궁은 여포에게 충성심이 강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천하인물에 대하여는 비판적이었다. 그는 여포라는 사람은 지모는 없어도, 마음이 나쁜 사람이 아니라고 보았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속이 좁거나, 마음이 악독하거나, 음험하고 교활하다고 보았다. 그래서 죽어라 여포를 따른 것이다. 그러나 여포수하의 진규(陳珪), 진등(陳登) 부자는 신재조영심재한이었다. 여포를 겉으로는 받들지만 속으로는 다른 생각을 품고 있었다. 그러나 머리가 모자란 여포는 시비를 구분하지 못했으니 안타까운 일이다.

 

넷째, 음란했고, 다른 사람의 처첩을 자주 건드렸다. 어떤 사람은 여포가 처첩과 가족을 사랑했다고 하는데, 기실 이것은 문제가 아니다. 자신의 마누라와 자식을 사랑하는 것은 적절하다면 가화만사성의 좋은 일이다. 그러나 여포가 좋아한 것은 다른 사람의 여자였다. 여포는 동착의 시첩을 좋아했기 때문에 동탁과 등지게 되고, 여포는 자기 대장의 처를 좋아해서, 여러번 간통을 저질러 병변을 불러온다. 사서의 기록에 따르면, 태조가 말하기를 "경은 처를 등지고 여러 장수의 부인을 사랑하니 그게 어떻게 후하다고 할 수 있겠는가?" 그러자 여포는 아무 말도 못했다. 여포는 자신의 처자식을 좋아하면서 자신의 대신은 믿지 못했다. 조조가 서주를 공격할 때, 진궁은 병력을 나누의 의각지세(角之勢)를 형성하자고 건의한다. 여포의 처가 말하기를 "옛날에 조씨는 공대(진궁)를 아들처럼 대했는데, 지금 장군은 공대를 조조만큼 잘 대해주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전체 성을 맡기고 처자식을 맡기고 군대를 몰고 멀리 떠난다면, 만일 무슨 변이 있을 때 첩이 어찌 장군의 처가 될 수 있겠습니까." 그러자 여포는 포기한다.

 

다섯째, 여포는 다른 사람들이 치켜세워주는데 속아서 죽었다. 여포는 당시에 명성이 아주 높았다. 당시에 이런 말이 있었다. "사람중에는 여포요, 말 중에는 적토이다(人中有呂布, 馬中有赤兎)". 다음으로, 원술이다. 원술은 이렇게 말한다: "옛날에 동탁이 난을 일으켜 왕실을 파괴하고 그 화가 술(원술)의 집에까지 미치게 되었다. 그래서 본인은 관동에서 거병하였으나 동탁을 도륙하지 못했다. 그런데 장군이 동탁을 죽이고, 그의 목을 보내와서, 나를 위해 원수를 갚아주어, 나로 하여금 당금세상에 사생에 부끄러움이 없게 눈을 뜨게 해주었으니 그 공로의 하나이고, 옛날 김원휴가 연주로 향할 때, 조조가 배신하여 패배하고 떠돌아다니며 거의 멸망했는데, 장군이 연주를 격파하여, 내가 다시원근에 눈을 뜨게 해주었으니 그 공로의 둘이오, 본인이 태어난 이래, 천하에 유비가 있다는 말을 듣지 못했는데, 유비는 거병하여 본인과 싸우려 하고, 본인은 장군의 위령으로 유비를 격파할 수 있었으니, 그 공로의 셋이다. 장군은 나에게 세 가지 공이 있으니, 본인이 비록 불민하나 생사를 받들겠다."

 

여섯째, 여포는 가슴에 큰 뜻을 품고 있지 못했다. 여포는 하루종일 요란하게 다니면서 뭘하는지 몰랐다. 다른 사람이 그에게 치라고 하면 자신은 가서 쳤다. 그는 유비가 아니었다. 유비는 가장 어려울 때에도 여전히,관우, 장비와 같은 형제들이 도와주었다. 큰형의 모습으로 늠연하게 다른 사람들이 함부로 범하게 하지 못했다. 나중에 원소의 대영에서 있을 때에도 여전히 자신과 고난을 함께 하는 충신이 있었다. 그는 조조도 아니었다. 조조는 가장 어려울 때도 목표가 분명했다. 난세영웅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강대한 동탁과 감히 싸웠고, 여포식으로 적을 부친으로 모시지도 않았다.

 

일곱째, 여포는 대장부의 기개가 없었다. 여포는 생포되고서도 진궁처럼 강개하게 죽을 결심도 하지 못했다. 고순처럼 죽음을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기개도 없었다. 여포는 말한다. "제환공도 자신의 허리띠를 화살로 쏜 원수인 관중을 재상으로 앉혔는데, 지금 나 여포도 고굉의 힘을 다 보태어 공을 위하여앞장사겠다. 어떻겠는가?" 그리고 여포는 유비에게도 말한다. "현덕 경은 좌객이고 나는 포로로 잡혔는데, 좋은 말이라도 한마디 해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태조가 웃으면서 그를 살려주고자 하고 묶은 것을 풀어주라고 말하자. 주부 왕필이 급히 나서서 이를 막고 나중에 유비가 참언을 하여 결국 조조에게 피살당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