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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여포)

여포(呂布)의 세가지 이슈: 여포의 어린 시절은 어떠했을까?

by 중은우시 2017. 6. 21.

글: 뇌정직(賴正直)


여포는 삼국시대에 가장 유명한 무장중 하나이다(만일 '중 하나'라는 말을 빼더라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삼국'을 소재로 하는 소설, 드라마, 영화, 게임에서 여포가 빠져서는 안된다. <삼국지>, <후한서> 및 <삼국연의>에서 여포에 관한 얘기들은 이미 역사를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모두 들어서 알고 있을 것이므로, 여기서 다시 언급하지는 않겠다.


여기에서 얘기하고 싶은 것은 여러분들이 주목하지 않았던 여포에 관한 몇 가지 문제들이다:


(1) 여포의 동년은 행복했을까? 우리는 여포의 팬이 많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의 우상이 동년시절을 어떻게 보냈는지 알고 있을까? 그가 성장하면서 어떤 고민을 했는지 알고 있을까?


(2) 여포는 기병을 잘 쓰는 명장이다. 기병은 당연히 우수한 마필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그가 연주, 서주를 전전하는 기간동안, 그의 기병에 필요한 말들은 어디서 조달했을까? 중국에서 말이 나는 곳은 동북, 서북, 새북이지 연주, 서주는 말이 나는 곳이 아니기 때문이다.


(3) 여포는 어떻게 죽었을까? 아마도 이 문제를 듣자마자 누군가 손을 들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건 내가 압니다. 여포는 조조에게 죽었습니다." 정답이다. 100점. 그러나 조조가 어떤 방법으로 여포를 죽였을까? 우리는 사서의 기록에서 여포가 사망하는 과정을 환원시켜볼 필요가 있고, 피살될 때 여포의 고통을 한번 체험해볼 필요가 있다. 이를 통해서 우리가 가진 현재의 건강하고 행복한 생활을 더욱 아낄 수 있을 것이다.


1, 여포의 동년은 행복했을까?


1-1 여포의 가족배경


<삼국지> <후한서>에 명확히 기록해놓지 않았다. 다만 여포의 경력 및 당시 사람들의 여포에 대한 태도를 보면, 여포의 집안은 상당히 높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최소한 한 지방에서 중요한 영향력을 지닌 고급호족이었을 것이다.


첫째, 병주(幷州)지역은 여(呂)씨의 발원지중 하나이다. 여포의 관적은 병주 오원군(五原郡) 구원현(九原縣)(지금의 내몽고자칙 빠오터우시 구원구)이다. 그리고 병주(지금의 산서성 대부분, 섬서성 북부, 하북, 감숙,내몽고의 일부분을 포함함)는 춘추시대에 "여씨의 고향"이다. <독사방여기요> 권41 곽주여성조(霍州呂城條)를 보면, "주의 서쪽 3리는 옜 여향(呂鄕)이다. 진(晋)의 여생읍(呂甥邑)이다. 지금도 여피(呂陂)가 있다. 주의 서남쪽 10리에ㄴ도 여생(呂甥)이라는 이름이 있다. 수(隋)나라ㅏ때에는 여주(呂州)를 설치했다." 곽주는 바로 지금의 산서성 임분(臨汾)시이다. 지금의 산서성을 핵심으로 하는 병주는 바로 여씨의 주요 발원지중 하나이다. 지금 많은 여씨종족의 사당은 "하동당(河東堂)"이라는 당호를 쓰고 있는데, 하동(河東)은 바로 황하의 동쪽이고, 기본적으로 산서성을 가리킨다. 즉 한,위때의 병주의 핵심지구이다(병주를 다스리는 치소는 태원군 진양현인데 지금의 산서성 태원시이다). 그러므로, 여씨는 병주(하동)지구의 대성이고, 여포는 이 대가족에서 태어난 것이다.


둘째, 여포는 어디를 가든 모두 각 세력들이 서로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려는 대상이었다. 여포 본인의 무예가 뛰어난 것도 원인중 하나일 것이다. 다만 가족문벌을 극히 중시하던 동한의 호족사회에서 출신이 고귀한 인사만이 이렇게 누구든지 자기 편으로 끙러들이려는 특수한 대우를 받을 수가 있었다.


여포는 정원(丁原)의 수하로 있을 때, "대견친대(大見親待)"를 받았고, 동탁에 의탁한 뒤로는 동탁이 "심애신지(甚愛信之), 서위부자(誓爲父子)"했다. 왕윤도 여포를 "후접납지(厚接納之)"했다.


이각(李傕), 곽사(郭汜)가 실패한 후, 여포는 무관으로 도망친다. 먼저 생각한 것은 원술, 원소에게 의탁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원술, 원소는 모두 집안출신을 극히 중시했다. 여포가 먼저 원술, 원소에게 의탁하려고 생각했다는 것은 당연히 자신의 집안배경이 원술,원소로부터 인정받고 받아들일만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후에 조조, 장양(張楊), 원술, 유비, 장막(張邈)등 각세력간에 여포의 귀속을 둘러싸고 일련의 싸움이 벌어진다. 이때, 여포가 움직일 수 있는 병력은 이미 상당히 적었다. 각 정치세력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포를 여전히 중시한 것은 여포의 개인무예만이 아니라, 더더욱 그의 가족배경이 가져다주는 거대한 정치적 영향력때문이라고 할 것이다.


셋째, 여포가 원술과 혼인관계를 맺게 되는데, 그것은 그의 가족이 여남원씨(汝南袁氏)에 상당하는 높은 집안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원술은 가족문벌개념이 아주 완고한 사람이다. 그는 항상 자신의 집안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고, 절대로 출신이 미천한 보통백성의 집안과 혼인시키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원술은 그의 아들을 여포의 딸과 혼인시키는데 아주 관심을 가진다. 처음에 원술이 주도적으로 나서서 여포에게 혼인관계를 맺자고 한다.


조조가 서주를 정벌할 때, 여포가 원술에게 구원을 청할 때, 원술은 심지어 여포가 딸을 보내어 성혼하는 것을 출병의 조건으로 내걸기도 했다. 여포의 딸이 아니면 취하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이를 보면 원술의 눈에, 여포가족은 이상적인 사돈이었다. 여남원씨 문중에 상당하는 집안이었다는 것이다.


넷째, 여포는 어느 정도 문화적인 소양이 있었다(아마도 많은 사람들은 믿지 않을지 모르지만)


여포가 가장 처음에 관직에 오른 것은 병주자사 정원의 수하에서 주부(主簿)를 맡았다. 주부는 주군정부기관에서 문서도적당안을 관장하는 고위관리이다. 현대의 비서, 비서실장에 해당한다.(생각지도 못하지 않았는가? 여포가 일찌기 사무실에 앉아서 서류나 작성했다는 것이다. 하하)


정원이 여포를 '대견친대'한 것으로 보면, 여포는 비서로서 상당히 일을 잘한 것같다. 우수한 비서가 되려면 최소한 책도 읽어야 하고, 글도 쓸 줄 알아야 한다. <삼국지> 배송지가 주석으로 인용한 몇 편의 여포와 조조, 원술의 왕래서신을 보면, 여포가 글을 쓰는 스타일은 곧바로 얘기하고, 단도직입, 개문견산의 스타일이다. 당시 문인들이 보편적으로 경전을 인용하는 그런 습관은 없다. 아주 가끔 낙의, 전단등 통속적인 전고를 인용할 뿐이며, 생각이 분명하고, 관점이 선명하다. 당시 비서로 공문서를 잘 썼을 것같다. 그리고 당시에 고급교육을 받고 문화지식을 얻을 수 있는 것은 호족의 자제들 뿐이다. 그래서 여포의 문화소양으로 보더라도 그의 출신은 최소한 낮지 않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1-2 여포의 인생계획과 목표


여포는 명문거족 출신이지만, 사서에서는 그의 부친의 성명조차 언급하지 않고 있다. 그리고 여포는 마치 형제자매도 없는 것같다. 그래서 명문집안 자제같지가 않다.


여포가 유비를 '동생'으로 부른 것을 보면, 여포의 연령은 유비보다 약간 많을 것이다. 유비는 한환제 연희4년(161년)에 태어났으니, 여포의 출생은 이보다 약간 더 빠를 것이다. 추측컨데, 영수2년(156년)에서 연희4년(161년)의 사이일 것이다. 160년대에 동한의 정국에서 가장 큰 사건은 "당고지화(黨固之禍)"이다. 필자의 생각으로, 여포의 부친은 아마도 '당인'이었을 것이고, 당고지화(166년) 혹은 두무정변(168년), 즉 여포가 5-10살 혹은 7-12살때 죽었을 것이다. 환관들이 모조리 제거된 후, 당인은 명예를 회복한다. 당인은 사람들의 마음 속에 영웅이다. 그리고 사회에서 보편적으로 존경을 받는다. 다만 여포는 최종적으로 실패하여 피살된다. "성왕패구(成王敗寇)"(이기면 왕이요 지면 도적이다)의 규율에 따라, 조조 및 나중의 당국자들은 여포를 '반복무상'의 행동으로 부친의 명성을 욕보이고, 이런 영웅적인 부친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보아 여포의 집안내력과 부친의 성명을 감추고 쓰지 않은 것일 것이다.


현대사회의 심리학 연구에 따르면, 사람의 동년경력은 그의 일생동안의 심리, 심리상태에 중대한 영향을 미친다. 여포는 동년때 가정의 변고를 당하고, 일찌감치 강호에서 유랑했을 것이다. 책을 읽고 시를 쓰던 사대부자제가 점차 용맹하고 교활한 청년무뢰배로 성장했을 것이다. 어려서 부친을 잃어, 여포의 내심에는 안전감이 결여되어 있을 것이고, 그는 누구도 믿지 않았다. 그저 자신이 장악하고 있는 힘만을 믿었다. 동시에 그는 자신의 가족이 일찌기 보유했던 명망과 지위를 그리워했다. 그래서 그는 하루빨리 공을 세우고 싶었고, 조정과 세상사람들로부터 다시 인정을 받고 싶었다. 그리하여 가족의 영광을 되살리려고 했다. 이를 위하여 그는 투기주의적인 모습을 보였다. 아무런 거리낌없이 조삼모사했다. 비록 '반복무상', '삼성가노'라고 욕을 먹는 것까지도 마다하지 않았다.


여포는 일찌감치 자신의 부대를 고용병으로 보았다. 그는 높은 가격을 제시하고 그에게 가장 큰 이익을 주는 사람을 위하여 싸웠다. 죽을 때, 여포는 여전히 자신의 마지막 남은 자본을 가지고 조조와 담판하려 했다. 이를 보면, "돈을 얼마 내는지를 보고 결정한다"는 인생관은 여포의 마음 속에 깊이 뿌리박혀 있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