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우좌(于左)
조광윤은 일개 무부로 군림천하를 하게된다. 그는 빈천할 때 감히 천자의 자리를 차지할 수 있겠는지 신에게 점을 쳐서 물어보았던 사람이다. 그는 다른 사람도 자신과 같을 것이라고 생각하여, 여러 사람들 가운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신과 같은 생각을 가졌을지를 걱정했다. 그리거 이를 잠재적인 위협이라고 여겼다.
조광윤은 그 위험을 잘 인식해서, 등극한 후에는 여러가지 예방조치를 취하게 된다. <정사(桯史)>의 기록에 따르면: 조광윤이 취한 조치중 하나는 즉시 천하의 참서를 금지시키고 수색했으며, 몰래 참서를 숨기는 것을 사형에 처할 죄로 취급했다.
금지령이 실시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아주 난감한 문제가 발생한다. 조보(趙普)의 상소에 따르면, 민간에 돌아다니는 참서의 수량이 너무나 많아서, 모조리 금지시킬 방법이 없고, 참서를 소장했다고 모조리 주살한다는 것은 비현실적이라는 것이다.
조보가 보고한 상황을 보면, 당시의 사람들은 보편적으로 점복과 명리를 믿고 있었고, 그것이 이미 기풍으로 자리잡았다는 것이다. 조광윤의 대책은 그의 뛰어난 모략을 보여준다. 그는 조보에게 말한다. 완전히 금지시키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참서를 엄금할 필요가 없다. 단지 유행하는 참서를 수집하여, 정본을 심의하여 황실에서 소장하고, 그 후에 정본의 내용을 수정하여 대량의 가짜서적을 만들어 사회에 뿌려서 현존하는 참서와 서로 혼동되게 만들라는 것이다.
이런 부저추신(釜底推薪)의 방식은 상당히 악독하다. 가짜서적이 시장에 널리 유통되고, 시간이 흐르게 되면 진위를 구분하기 어렵게 된다. 그리고 가짜서적의 여러가지 논술은 황당하여 앞뒤를 논리적으로 맞추기 어렵게 만들어, 참서의 신뢰도를 크게 떨어뜨릴 수 있었다. 점점, 민간에서는 술수 자체에 대하여 의혹을 품기 시작하고, 많은 참서는 버려지게 된다.그중에는 대량의 정본 참서도 포함된다.
개보9년 십월, 송태조가 돌연 붕어한다. 동생인 조광의(趙光義)가 황위를 승계하니, 그가 송태종이다. 송태종은 술수에 대한 태도가 더욱 조심스러웠고, 더욱 엄격히 통제했다. 즉위초기, 국가대사중 처리해야할 일이 너무나 많았지만, 송태종은 술수점복을 잊지 않았다. 그는 십일월에 영을 내려, 각지의 주현은 현지 신민을 엄격히 조사하여 천문술수를 잘 아는 사람을 모조리 붙잡아 경성으로 보내도록 한다. 참서를 숨겨두고 보고하지 않으면 사형에 처했다. 경성에 모은 후에 시험을 거쳐, 기술이 뛰어난 자는 남겨서 영대(靈臺)에 관직을 주고, 기능이 떨어지는 자는 모조리 경자(黥刺)하여 무인도로 유배를 보내버린다.
태평흥국2년 십월, 다시 명을 내려, 천문, 복상등 서적을 금서로 지정한다. 그리고 사사로이 이를 학습하는 신민은 일률적으로 참살한다. 이에 기하여 중앙정부는 천문술수를 완전히 통제하고, 민간술수의 기초를 뿌리부터 제거했다. 형인 조광윤의 수단과 비교하자면, 송태종이 더욱 철저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조광윤의 계모, 조광의의 금령은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배교점(杯珓占)은 규칙이 너무 간단하기 때문이다. 조개껍질같은 것 2개만 있으면 던져서 3가지 조합이 나오고, 낫놓고 기역자도 모르는 백성이라고 하더라도 그 의미를 알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송나라때에는 배교점이 아주 보편화된다. 송나라때의 필기소설에서 이와 관련한 에피소드가 많이 등장한다. <함순임안지>에는 이런 기록이 있다: 남송의 도성 임안에는 피장표(皮場廟)가 있는데 섭(葉)씨성의 서생이 있는데, 성격이 치완(痴頑)하여 성심성의껏 신령을 모셨다. 매월 초하루와 보름이면, 반드시 제사물품을 가지고 피장묘로 가서 제사를 지낸다. 비바람이 불어도 그렇게 했다. 어느해인가 과거에 실패한 후, 섭서생은 주머니에 돈이 하나도 없어서, 속수무책이었다. 같이 사는 서생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나는 지금 돈이 한 푼도 없다. 내일 피장묘에 가야하니 삼만전을 도와달라."
모두가 그를 비웃었다. 섭서생은 과연 다음 날 피장묘로 간다. 돌아온 후에는 기뻐서 어쩔 줄 모르는 표정으로 말했다: "내가 피장묘안에서 배교를 던져보았는데, 신령이 이미 내일 나에게 삼만전을 보내주겠다고 약속했다."
모두가 그에게 어디에서 삼만전을 보내줄 것인지 물었다. 섭서생은 자신도 모른다고 말한다. 그는 그저 멍하니 기다렸다. 저녁이 되었을 때, 과연 누군가 와서 섭서생을 찾는다. 군의 태수가 섭서생을 불러서 막료로 삼겠다고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미리 목돈을 주었다. 피장묘에서 약속받은 3만전은 이렇게 실현된 것이다.
<독성잡지>에는 이런 기록이 있다. 흥국의 부지묘(富池廟)에는 삼국시대 오나라장수 감녕(甘寧)을 모시고 있었다. 남송 소흥연간에 이성(李成)이 도강하여 강서경내를 대거 약탈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부지묘로 가서 배교를 던져 점을 보는데, 기적이 발생한다. 배교가 땅에 떨어지지 않고 높이 튀어올라서 높이 1장여 되는 곳으로 튀어오른 것이다. 그 후에 감녕 신상의 뒤로 떨어졌다. 이성은 크게 놀라며, 신령이 그에게 강서로 가지 말라는 뜻으로 이해한다. 그래서 방향을 호남으로 돌려서 진군한다. 강서의 백성은 전란의 피해를 면할 수 있었다. 강서의 지방관리는 이 일을 조정에 보고하니, 황제는 감녕에게 왕의 작위를 추가로 봉하고, 묘를 확장해준다. 그리고 감녕신상의 뒤에서 배교를 찾아내어 신감에 넣고는 "영교(靈珓)"라 칭한다.
같은 이야기가, <이견지>에도 실려있는데, 서로 다르게 쓰여있다. 부지묘에서 배교를 던진 사람이 건염연간의 마진(馬進)으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당시 마진은 흥국을 공격하여 점령하려고 준비했는데, 배교를 던진 결과 신령이 허락하지 않았다. 마진은 여러번을 던졌지만 모두 허락하지 않았다. 마진은 대노하여 다시 한번 던지며 소리쳤다: "승교(勝珓)가 나오면 성을 도륙낼 것이고, 득양(得陽)이 나오면 역시 성을 도륙낼 것이고, 음교(陰珓)가 나오면 묘를 불태워버리겠다."
그 뜻은 승교가 나오든 양교가 나오든 그는 모두 흥국을 멸해버리고, 만일 음교가 나오면 아예 부지묘를 불태워버리겠다는 말이다.
결과 마진이 말한 3가지 결과가 모두 나오지 않는다. 배교를 던지니, 하나는 땅 위에 떨어지고, 또 다른 하나는 보이지 않았다. 반나절을 찾아보니 묘문의 위에서 찾을 수 있었다. 땅에서 몇척이나 높은 곳에 똑 바로 서 있었다. 이런 결과를 보고는 신기하다고 여긴다. 마진은 놀라서 감히 더 이상 신령과 다투지 못하고 절을 하고는 나갔다.
그 후, 사람들은 묘문에 하나의 감롱을 놓아두어 문 위의 그 배교를 보호한다. 사람들의 숭앙을 받는 것이다. 알려진 바에 의하면 장벽에는 두 개의 대교(大珓)가 감추어져 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당나라말기 황소(黃巢)가 던진 것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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