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노리람사(老李覽史)
명나라때의 일대명신 송렴(宋濂)은 <원사(元史)>에서 단지 스무 글자로 일대천교 징기스칸이 사망한 과정을 표현했다. 그러나 문자는 너무 간략하여 명확하지가 않다. 그래서 후세에는 줄곧 징기스칸이 도대체 어떻게 죽었는지를 잘 알지 못했다.
징기스칸의 사인에 관하여 많게는 5가지 설이 있다. 대부분은 서하(西夏)와 직접적인 관계에 있다. 그중 가장 정통적인 것은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것인데, <원사>에 나오는 "낙마설"이다.
몽골인이 편찬한 <원조비사(元朝秘史)>(권14)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징기스칸은 겨울이 지나면서 당올(唐兀)을 정벌하고자 했다. 새로 군마를 점검한 후, 구아년(狗兒年) 가을에 당올을 정벌하러 갔다. 부인 예수도 따라간다. 겨울에 아르부허에서 사냥을 하는데, 징기스칸은 홍사마(紅沙馬)를 탔는데, 야생마에 놀라서, 장기스칸이 말에서 떨어져 부상을 입는다. 삭알아합척에 군영을 차린다. 다음 날, 예수부인이 대왕과 여러 관리들에게 말한다. '황제는 오늘 밤에 열이 나니, 당신이 상의해라.'"
'당올'은 몽골인들이 서하인을 부르는 명칭이고, '구아년'은 송이종 보경2년 즉 1226년이다. 징기스칸은 이해 가을에 부인을 데리고 서하를 정벌하러 떠난다.야생마때문에 놀라서 아무런 대비없던 징기스칸을 낙마시켜 부상을 입는다. 그날 잠에 고열이 난다. 다음해 7춸에 "불예(不豫)"한데, 병의 화근은 이때 심어진 것이다. 왜 낙마 한번으로 이렇게 중상을 입었을까? 전해지는 바로는 피를 너무 많이 흘렸다고 한다.
당시, 예수는 따르던 장수들에게 이 일을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물어본다. 어떤 사람은 서하의 성은 도망갈 수 없으니, 아예 돌아가서 요양하고 건강이 좋아지면 다시 치자고 한다. 징기스칸은 평생 강하게 살아왔다. 그렇게 하면 서하인들에게 웃음거리가 될 것을 우려한다.
징기스칸이 사신을 보내어 서하국의 국정을 정탐할 때, 마침 서하의 아사감불이라는 대신이 조소를 한다. 재주가 있으면 와서 덤벼라고. 징기스칸은 그 말을 들은 후 죽어도 병력을 물리지 않겠다고 하며, 하란산으로 쳐들어가 아사감불을 쳐부순다. 그러나, 그 후에 징기스칸의 병세는 계속 좋아지지 않고, 오히려 가중된다. 1227년 음력 칠월 십이일에 병사하니, 당시 나이 67세이다.
그외에 "뇌격설(雷擊說)"을 보자. 이 견해는 비록 비교적 터무니없기는 하지만 역시 사료에 기록이 남아 있다. 당시 몽골에 사신으로 갔던 로마교황청의 사절인 요한 푸란노 자비니가 쓴 글을 보면, 징기스칸은 아마도 벼락을 맞고 죽었을 것이라고 한다. 요한 푸란노 자비니는 당시 몽골국에 도착했을 때, 여름의 벼락이 사람을 다치게 하는 일이 빈번하다는 것을 발견한다. "그곳에는 흉맹한 천둥과 번개가 많은 사람을 죽게 하였다."
이런 이유로 몽골인들은 벼락을 두려워한다. 남송의 팽달아가 쓴 <흑달사략>에는 이런 기록이 있다. "달인(오랑캐)는 매번 벼락소리를 들으면, 반드시 귀를 가리고 몸을 땅바닥으로 굽힌다. 피하는 모습을 하는 것이다."
요한 푸란노 자비니는 포르투갈인이다. 중국에 사신으로 온 시기는 확실히 1245년에서 1247년 사이이다. 교환 노슨4세가 파견했고, 돌아간 후 교황에게 <우리가 달단이라고 부르는 몽골인의 역사>라는 사신보고서를 제출한다. 요한 푸란노 자비니가 왔을 때는 징기스칸이 죽은지 겨우 18년이 지났을 때이다. 마르코 폴로보다도 30년이나 빠르다. 이런 주장이 아무런 근거도 없는 것은 아닐 것이다.
또 한가지 "중독설"도 있다. 이 견해는 <마르코폴로여행기>에 근거한다. 마르코 폴로는 13세기 이탈리아상인이다. 1275년에 중국에 도착한다. 그때는 바로 원세조 쿠빌라이가 집권한 시기이다. 원나라에서 17년간 있었다. 그는 여행기에서 징기스칸의 사인을 기술했는데, 서하를 공격할 때 태진(길주, 고대의 요새)를 포위공격하는데, 무릎에 불행히도 서하인이 쏜 독화살을 맞았다고 한다.
그 결과는 알 수 있을 것이다. 독화살의 독이 심장으로 퍼져서 상세가 위중해지고 쓰러져서 일어나지 못한다. 그러나 민간에는 또 다른 전설이 있다. 징기스칸은 "중독"으로 죽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서하병사가 쏜 독화살에 맞은 것이 아니라, 포로로 잡힌 서하왕비 고이백륵진곽알합둔(古爾伯勒津郭斡哈屯)이 쓴 독에 당했다는 것이다. 당시 이 서하왕비는 시침하는 기회에 독을 썼다고 한다.
그 다음에는 "암살설"이다. 이 견해는 위에서 말한 포롤 잡힌 서하왕비 고이백륵진곽알합둔과 관련이 있다. 독을 썼다는 주장의 또 다른 버전이다. 몽골의 민간전설에 따르면, 징기스칸의 군대가 서하를 공격하는 과정에서, 병사가 아주 예쁜 서하왕비 고이백륵진곽알합둔을 포로로 잡아 징기스칸에 바친다. 시침하는 첫날에 이 서하왕비는 경계를 늦춘 징기스칸을 암살했다고 한다.
암살당했다는 주장은 청나라 강희원년에 책으로 만들어진다. 즉 1662년의 <몽골원류>이다. 이 책은 아주 진귀하다 100년후, 즉 1766년 몽골 카르카부의 친왕 성곤찰포(成袞擦布)가 선물로 손으로 쓴 초본을 건륭제에 바친다. 건륭제는 이 책을 만주어, 한자의 두 가지 본으로 번역하게 한다. 그리고 책의 이름을 <흠정몽골원류>라고 붙이고, <사고전서>에 수록한다. 징기스칸이 암살당했다는 것은 신뢰도가 높다고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는 "거세설"이다. 이 견헤는 정사에 나오지는 않는다. 야사에도 기술이 없다. 다만 외몽골인들 사이에는 널리 전해져 내려온다. 이 풍류사건도 서하왕비 고이백륵진곽알합둔때문이다. "흉수"는 당연히 이 아름다운 여인이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이 왕비는 징기스칸에게 바쳐진 후, 징기스칸이 자신의 후궁으로 삼으려 한다. 왕비는 겉으로는 동의한다.
그러나 치욕을 견디지 못하고, 집안과 나라의 원한을 지닌 그녀는 시침하는 말 밤에 징기스칸의 아래 중요한 곳을 물어뜯어버리고, 졸지에 피가 엄청나게 흘렀다고 한다.
오랫동안 외지에서 전쟁을 해온 67세의 노인이 어찌 이런 고통을 견딜 수 있고, 이런 고생을 견딜 수 있겠는가. 수치와 원한이 교차하면서 병세가 가중된다. 이 사건은 제왕에게 일어난 차마 말로 할 수 없는 수치스러운 스캔들이다. 그래서 숨기게 된다. 대외적으로는 그저 대왕이 말에서 떨어져 병세가 가중되었다고 한다. 원래 살 생각이 없던 서하왕비는 징기스칸이 자신을 그냥 놔두지 않을 것을 알고 있어 황하에 몸을 던져 자결한다.
이 설은 비록 황당무계하지만, 자세히 분석해보면 어느 정도 이치에 맞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만일 징기스칸이 정말 서하왕비의 손에 죽었다면, 암살이나 독살은 모두 구체적인 조건에 맞지 않는다. 시침할 때는 맨몸이다. 어디에 흉기나 독을 숨길 것인가. 설사 흉기와 독약이 있다고 하더라도, 포로로 집한 사람이라면 몸을 수색당했을 것이다. 이런 상황하에서, 손에 아무런 무기도 없는 왕비의 가장 치명적인 폭력행위는 자연히 이 남자의 중요한 곳을 물어뜯는 것일 것이다.
이 전설은 중국고대제왕의 풍류사건중 극품이라 할 만하다. 정말로 그러했다면 그것은 인과응보이다. 풍류인물은 풍류로 죽는다.
수십년의 남정서진에서 매번 어느 곳에 가면, 징기스칸과 그의 수하는 반드시 여자를 빼앗고 곳곳에 풍류를 남긴다. 후대자손이 무수히 많다. 사학계에서는 '파종기'라고 부른다. 추산에 따르면, 현재 세계에는 약 1600만명의 사람이 징기스칸과 혈연관계에 있을 것이라고 한다. 징기스칸은 여인을 이렇게 좋아했는데, 이는 '유전'이라고 할 수 있다.
당시, 몽골족은 남의 여자를 빼앗는 습관이 있었다. 여인을 재물로 보았다. 징기스칸의 모친은 바로 부친 예수가이가 빼앗아 온 것이다. 한번은 예수가이가 알난하에서 매를 부리고 있는데, 메르키트인 예커츠레투가 아름다운 처를 데리고 곁을 지나갔다.
예수가이는 어린 부인이 예쁜 것을 보고 마음이 동한다. 즉시 예커츠레투를 막아선다. 이 상황을 보고 예커츠레투는 원래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려고 했으나, 처를 버리고 도망치게 된다. 이 젊은 부인이 바로 징기스칸의 모친이고 나중에 선의태후가 되는 허얼룬이다.
징기스칸의 처는 보르테라고 하는데, 모친의 전남편의 부락에 빠앗겼다가 다시 되찾아 온다. 징기스칸과 보르테의 혼인은 아주 재미있다. 당시의 몽골족 습속에 따라, 예수가이는 9살의 징기스칸을 데리고 그의 모친이 소재한 부락으로 가서 '여자를 찾는다' 즉 아들을 위하여 며느리를 구한 것이다.
가는 도중에 보르테의 부친인 더쉐찬을 만난다. 그 말을 들은 후, 다시 징기스칸의 면상을 보니 미소년이어서 더쉐찬은 예수가이에게 말한다. 집안에 나이가 갓 10살이 된 어린 딸이 있는데, 사돈을 맺고 싶다고. 예수가이에게 마음에 드는지 보러 가자고. 예수가이는 보르테를 보고 아주 마음에 들어한다. 하룻 밤을 자고, 다음 날 더쉐찬은 예수가이에게 징기스칸을 남겨서 사위로 삼게 해달라고 청한다. 예수가이는 동의하여, 가져온 말 중 가장 좋은 말을 골라 예물로 준다.
예수가이가 떠날 때 한 마디 말을 남긴다. "내 아들은 개를 무서워한다. 개에 놀라게 하지 말아달라."(<원조비사>권1)" 일대영웅이 어릴 때 개를 무서워했다니, 이는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생각도 못한 일일 것이다. 예수가이가 아들을 남겨두고 혼자 돌아가다가 원수집안인 타타르인에게 독살당한다.
징기스칸의 이름은 테무진, 한자로 철목진(鐵木眞)이다. 첩목정(帖木貞), 특몰진(忒沒眞)이라고도 쓴다. <원조비사>(권1)에 따르면, 징기스칸은 태어날 때 손에 핏덩어리를 쥐고 태어난다. 피는 빨간 돌맹이같았다. 태어날 때, 테무진은 피를 갖고 태어나서, 미신에 따르면 인류에 피비린내나는 재앙을 가져올 것이라고 여기게 된다.
처 보르테를 빼앗아오는 과정에서, 징기스칸은 한꺼번에 300여명의 예커츠레두 부락의 사람을 죽인다. 1183년, 겨우 22살된 테무진은 "칸"에 오른다. 그는 매년 계속되는 정복전쟁과 철혈통치에 의존한다. 테무진은 일생동안 무수히 많은 사람을 죽였고, 매번 어느 곳에 도착하면 풀을 베는 것처럼 미친 듯이 사람들의 목을 잘랐다. 그후의 전쟁에서 성을 도살하는 것은 그가 관용적으로 쓰는 정복수단이었다.
한번은 징기스칸이 20만대군을 이끌고 중앙아시아의 무슬림국가 호라즘(花剌子模)를 정벌한다. 아랄해 부근의 구르간즈(玉龍赤傑)를 칠 때, 한꺼번에 120만명을 죽인다. 이런 방법으로 많은 서역, 중앙아시아 국가가 멸망한다.
다만, 징기스칸이 인류에게 피비린내나는 재앙을 가져올 때, 그 자신도 이를 피할 수 없었다. 비록 그가 어떻게 죽었는지는 영원히 풀리지 않을 수수께끼이겠지만, 정사에서 말한 것처럼 말에서 낙마하여 피를 많이 흘렸건 아니면 민간의 전설처럼 서하왕비가 그의 중요부위를 물어뜯어 피를 흘려 죽었건, 모두 '선혈'이 충만하다. 이런 '선혈'은 그가 태어났을 때 쥐고 태어났던 핏덩어리와 관련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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