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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징기스칸)

징기스칸의 묘는 어디에 있을까?

by 중은우시 2018. 5. 9.

글: 역사변연(歷史邊緣)


일대천교(一代天驕) 징기스칸의 능원건축은 아름답고 광활한 오르도스고원에 있다. 파란 하늘, 하얀 구름, 누런 모래와 풀밭 사이에 3개의 몽고파오식의 궁전이 거기에 세워져 있다. 주홍색의 문, 밝은 색의 벽, 금황색의 유리보정(寶頂)은 완전히 옹용(雍容), 전아(典雅)한 모습이다. 그러나 이곳은 진정한 그의 무덤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곳에는 기실 그의 유골(遺骨)이 없기 때문이다.


징기스칸의 이름은 테무진(鐵木眞)이다. 그의 일생은 험난했다. 9살때, 부친은 원수인 타타르인에게 독살당했고, 그는 고아가 된다. 그는 계속 도망다니고 숨어 있고 심지어 붙잡혔다. 그리고 일찌기 사람들 앞에서 모욕을 당하기도 한다. 그러나 생활의 고통은 그의 의지를 연마시켰고, 그는 원한을 역량으로 바꾸고, 조용히 힘을 모으고, 비밀리에 부친의 부하들을 끌어모으며, 자신의 심복을 기른다. 짧은 7년동안 그는 타타르부, 극열부(克烈部)와 나이만부를 휩쓸고, 일거에 몽골 각부락중에서 가장 강력한 우두머리가 된다.


1206년, 쿠릴타이대회에서 테무진은 각부 귀족이 일치하여 몽골의 대칸으로 옹립한다. 그리고 '징기스'로 명명한다. 그리하여, 후세인들은 그를 징기스칸으로 부른다.


징기스칸은 일생을 말등에서 보낸다. 그는 전투에 능하고, 가는 곳마다 적수가 없었으며 사방으로 세력을 확장했다. 그는 먼저 남쪽으로 확장하여, 서하를 복속시킨다; 이어서 금나라의 중도를 함락시킨다; 이어서 그는 서쪽으로 진군하여 일거에 중앙아시아, 동류럽에 이른다. 그는 중앙아시아의 고국인 호라즘이 국왕을 핍박하여 카스피해의 황량한 섬으로 도망치게 만든다. 그리고 동쪽으로 방향을 틀어 러시아군대를 물리친다. 이렇게 하여 강역을 돈강일대까지 확장한다. 1226년, 그는 다시 군대를 이끌고 서하를 친다. 1227년, 그가 서하의 수도를 막 함락시킬 때쯤, 행영에서 사망한다. 징기스칸의 혁혁한 전공의 그의 손자 쿠빌라이가 중국을 통일하고 원나라를 건립하는 기초를 이룬다. 이렇게 말할 수 있다. 그의 몽골철기는 세계를 뒤흔들었다고. 그런데, 그의 무덤은 도대체 어디에 있을까?


몽골족의 습속에 따르면, 군주는 어디에서 죽든지간에, 유골을 반드시 조상의 발상지 막북(漠北)으로 모셔가야 한다.


<원사>의 기록에 따르면, "징기스칸은 기련곡(起輦谷)에 묻었다." 기련곡은 아마도 어느 산골짜기일 것이다. 긍특산맥(肯特山脈)에 있는. '련'은 고대 제왕이 타는 수레이다. '기련'의 의미는 징기스칸이 수레를 타고 시작한 곳, 몽골각부를 통일하고 나중에 유라시아대륙을 연결하는 몽골칸국을 건설하는 걸음을 시작한 곳이라는 것이다. 아쉽게도, 이 '기련곡'은 세월이 너무 오래되어 어디를 말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게 되었다.


<다상몽고사(多桑蒙古史)>의 기록에 따르면, 징기스칸의 묘는 겁녹련(怯綠連), 알난(斡難), 독랄(禿剌) 삼수(三水)의 발원지에 있고, 한합늑돈(罕合勒敦) 여러 산의 위에 있다고 한다. 그러나 아쉽게도 아무런 표지도 남아 있지 않다. 사방을 둘러보아도 산들이 망망한데 도대체 어디에서 찾을 수있단 말인가. 징기스칸에게 제사를 지내기 위하여 몽골인들은 나중에 말등위의 무덤을 만든다. 바로 팔백실(八白室)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팔백실"은 즉 8개의 흰색의 전장(氈帳)을 가리킨다. 전장의 안에는 징기스칸의 유물을 모셔놓고, 이를 가지고 무덤을 상징한다. 이런 무덤은 이동시키기에 편리하고, 제사지내기도 편리하다. 몽골 유목민족의 옮겨다니는 습성에 잘 맞는다. "팔백실"은 일찌기 여러 지방으로 옮겨다녔다. 처음에는 긍특산 일대의 몽공고원에 있었고, 나중에 황하의 하투(河套) 일대로 옮겼고, 마지막에는 오르도스고원으로 옮겼다. 현재 '팔백실"은 이금곽락기(伊金霍洛旗)에 있다. '이금곽락'은 몽골어에서 '주인의 무덤'이라는 의미이다.


왜 징기스칸의 무덤을 찾기 어려울까? 기실 그 원인은 간단하다.


전통적으로 보자면 몽골은 이주가 빈번한 유목민족이다. 초원은 끝이 없고 모래바람이 일어난다. 설사 큰 무덤을 만든다고 하더라도 금방 모래언덕에 묻혀버린다. 그래서 몽골족은 '묘장'을 단순하게 했고, '야장(野葬)'과 '천장(天葬)'을 숭상했다. 천장이건 야장이건, 모두 시신을 황야에 내버려두고, 짐승이나 새가 먹어서 완전히 풍화되도록 하는 것이다. 왕공귀족은 신분이 고귀하여 천장, 야장을 행하지는 않앗찌만, 여전히 '묘이불분(墓而不墳)' 매장은 하지만 봉분은 만들지 않는 원칙을 지켰다. 즉 땅 속에 깊이 뭍는 것을 '묘'라고 하고, 지면으로 봉분을 세우는 것을 '분'이라고 한다. 징기스칸의 능묘는 이런 전통에 따라 땅 속깊이 뭍혀 있을 것이다.


당시의 현실로 보면, 징기스칸은 전쟁중에 사망한다. 당시는 곧 서하를 멸망시킬 중요한 순간이었다. 만일 칸이 사망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 반드시 군심이 동요할 것이고, 적에게 휴식을 취하고 반격할 기회를 주게 된다. 그리하여 그때 징기스칸은 서하를 하루빨리 항복시키기 위하여 반드시 '비불방상(秘不發喪)'하라는 유언을 남겼을 것이다. 서하가 투항한 후에, 비로소 비밀리에 기병부대를 보내어 영구를 예정한 묘지로 운송하는 것이다. 묘지에 도착해서 영구를 깊이 묻은 후, 원래 지면상의 흙과 풀, 나무, 돌등은 모조리 원래 모양대로 환원시켜서 전혀 흔적을 남기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말을 동원하여 땅을 밟아 편평하게 만들었고, 다시 그 땅에 어미 낙타의 면전에서 아기 낙타를 죽인다. 그리고 부대를 보내어 멀리서 그곳을 보호한다. 만의 하나를 대비하기 위해서이다. 다음해 푸른 풀이 자라나서, 이 곳과 사방의 대초원이 함께 녹색으로 바뀌어 어디가 어디인지 판별할 수 없을 때 비로소 이 부대는 철수한다.


왜 어미낙타의 앞에서 아기낙타를 죽었을까? 왜냐하면 낙타는 자신의 혈친을 판별하는 천성이 아주 뛰어나기 때문이다. 나중에 징기스칸의 묘를 찾으려면 그 어미낙타를 앞세우면, 그 어미낙타가 아기낙타가 죽은 곳을 찾아간다. 즉, 칸의 묘를 찾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어미낙타가 죽게 되면, 징기스칸의 묘지가 어디인지는 영원히 아무도 모르게 되는 것이다. 낙타가 죽게 되면 그 후에는 이 수수께끼를 아무도 풀 수 없게 된다.


일대천교 징기스칸의 무덤은 이렇게 묻혀버렸고, 영원히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