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취역사(趣歷史)
관직을 맡지도 않고, 세금을 내지도 않으며, 무덤을 지키는 임무를 대대로 전한다. 700여년동안 한 전설의 몽골부락인 "다르후트"는 징기스칸능의 영워한 수호자가 되었다.
이 부락은 1227년 징기스칸이 병사한 이후 지금까지 충성스럽게 그의 능묘를 지키고 있다. 신중국이 성립된 후에는 정부에서 징기스칸능관리국을 성립하고, 다르후트인이 그 직을 맡아서, 전문적으로 징기스칸능의 공봉과 제사를 책임지고 있다.
8월 18일 기자는 내몽고 에젠호르기(伊金霍洛旗)에서 일찌기 징기스칸능관리국 국장을 지낸 제36대 수릉인 고르자부(古日扎布)의 집으로 갔다. 75세의 고르자부는 2003년 은퇴하고, 수릉임무를 자신의 장남에게 넘겨주었다. 징기스칸능에 대해 물어보자 노인의 이야기보따리가 바로 풀어진다.
노인은 이렇게 말했다. 그는 1942년에 에젠호르기에서 태어났다고, 어렸을 때, 할아버지, 아버지는 징기스칸능의 수호, 제사임무를 맡아서 하는 것을 눈으로 보면서 자랐다. 어른이 된 후에 자신이 선조의 능을 지키는 것을 무한한 영광으로 생각한다. 그가 알고 있는 바에 따르면, 다르호트는 '다르칸(達爾汗)에서 온 말인데, '다르칸'은 '신성'이라는 뜻이다. 다르호트는 다르칸의 복수이고, '신성한 사명을 맡은 자'라는 뜻이다. 다르호트는 당시 징기스칸이 가장 신뢰하던 우익만호장(右翼萬戶長) 보르츄(博兒術)와 좌익만호장(左翼萬戶長) 무카리(木華黎)의 후대로 구성되어 있다. 그들은 여하한 병역, 세금도 맡지 않고, 전문적으로 징기스칸능의 수호와 제사를 책임지며 이를 신성한 임무로 대대로 이어내려왔다. 다르후트 남자는 어려서부터 구전으로 전해지는 제사예의교육을 받고, 대대로 이어지는데 지금까지 788년의 역사를 지니고 있다(이 글은 2015년에 쓰여짐). 현재의 다르후트는 모두 이 두 장군의 후예들이다.
노인의 집에는 베(布)에 쓴 가보를 소장하고 있는데, 자신은 보르츄의 후예라는 것을 증명한다. 노인의 소개에 따르면, 징기스칸능은 항일전쟁기간동안 파괴를 피하기 위해, 1939년 징기스칸능안의 물품을 전후로 감숙, 청해로 이전했다. 1954년, 국가는 에젠호르에 새로 능원을 건설하면서 이들 물품을 원래 장소로 돌려놓았다고 한다. '문화대혁명'기간동안 능원은 폐쇄되었다. 당시 교통이 불편하여, 현지정부기관은 말을 약간 기르고, 기관의 공무원들이 다닐 때 사용했다. 징기스칸이 쓴 적이 있는 말안장을 부장부에서 가져갔다. 당시 말을 키우던 한 다르후트인이 이것이 징기스칸의 말안장인 거을 알고, 즉시 말안장을 말을 먹이는 풀더미 속에 감춘다. 나중에 다시 여러 해동안 쓰지 않던 창고안에 감춰둔다. 그리하여 국가의 진귀한 보물이 지켜질 수 있었다.
당시 징기스칸의 능원 안에는 대량의 원, 청시기의 제사자료가 있었다. 고르자부 노인은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이들 자료를 훔쳐낸다. 당시에는 비닐이 없어서, 노인은 이들 자료를 병 속에 넣은 후, 다시 밀랍으로 봉하고, 자기 집의 마등에 묻어둔다. 자신의 아이가 철이 없어서 이 일을 얘기할까 우려하여, 이 모든 것을 아이들이 깊은 잠에 빠진 후에 했다. 고르자부노인은 자신의 방문을 안에서 걸어잠그고 자료를 넣어 봉한 후에 다시 마당으로 가서 구덩이를 판다. 처조차도 그가 무엇을 하는지 몰랐다.
당시의 '조반파'는 자료를 분실한 것을 발견하고, 노인을 체포한다. 노인은 죽어도 자신과 관련이 없다고 버틴다. '조반파'는 여러번 노인의 집을 뒤졌지만 아무런 소득이 없었다. 노인은 64일간 갇혀 있다가, '조반파'가 아무런 단서도 잡지 못하자 할 수 없이 그를 풀어준다. 1978년, 징기스칸능이 회복되고 대외개방되었을 때, 고르자부등은 숨겨놓았던 이들 문물을 다시 꺼낸다. 고르자부와 다른 두 명의 다르후트인은 개혁개방후 징기스칸능의 관련제사활동에 종사하는 제1대인원이 된다.
징기스칸능에는 12수의 제사가(祭祀歌)가 있다. 그중에는 많은 암어(暗語)와 비슷한 정보가 들어 있다. 현재 전세계에서 부를 수 있는 사람은 고르자부노인 한 사람뿐이다. 그는 말한다: "비록 내가 부를 수 있지만, 가사에 숨은 비밀은 알지 못한다. 왜냐하면 대대로 전해내려오는 것이고, 많은 연구가들이 연구했지만, 명확히 알아내지 못했다." 지금 은퇴후의 고르자부는 후허하오터의 한 민속원내엣 계속 징기스칸제사와 관련된 활동에 종사하고 있다. 처는 에젠호르에서 농사를 짓는다.
새벽에, 태양이 초원을 비춘다. 다르후트의 37대 수릉인인 젊은 하스비리거(哈斯畢力格, 구르자부의 아들)는 이미 징기스칸능에 도착했다. 장명등을 검사하고, 청소를 한다. 마친 후에는 훈향을 피워 징기스칸능의 공기를 청결하게 한다. 이어서 그는 다른 수릉인들과 징기스칸 영포(靈包)앞에 앉아서 매일 하는 노래를 부르는 제사활동을 시작한다. 마친 후, 이들 수릉인들은 제사하러 오는 사람들을 위해 제사활동을 주재한다. 해가 질 때, 능원구역내의 수릉인들은 다시 영포 앞에 모여서, 저녁송가를 불며 제사한다. 다시 능원구역을 청소한다. 이렇게 계속 1년 365일 반복된다. 이것이 바로 다르후트 수릉인들의 일생 직책이다.
이들의 제사활동은 남자에게만 전해지고, 여자는 접촉할 수 없다. 그리고 반드시 다르후트인이어야 한다. 제37대전인인 어얼딩스디(額爾定斯迪)에게는 딸 하나밖에 없다. 그는 희망을 자신의 조카에게 걸고 있다. 조카는 금년에 대학에 들어갔고, 매번 제사활동이 있을 때면 그는 조카를 데리고 온다. 수릉은 쿠빌라이가 정한 규칙이다. 우리는 이미 788년동안 수호해왔고, 우리대에서 실전되게 하지는 절대 않을 것이다. 어얼딩스디에 따르면, 징기스칸능의 제사활동은 매년 모두 28번 행해진다. 매달 초사흘, 초닷새는 소제사이고; 삼월 이십일일, 오월 십오일, 구월 십이일, 십월 초사흘은 대제사이다.
현재, 징기스칸능에서 제사활동에 종사하는 다르후트인은 30명이다.
다르후트인이 예전부터 전해내려오는 규칙을 굳게 지켜서 수백년을 하루처럼 하기 때문에 그들은 각종 곤란을 견뎌내면서 징기스칸능원을 수호한다. 그리고 이 특수한 제사문화를 완전하게 오늘날까지 보존해왔다. 징기스칸이 사망한지 788년이 지났지만 다르후트인의 제사의 성등(聖燈)을 꺼진 적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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