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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징기스칸)

18세기 유럽의 중국붐

by 중은우시 2012. 8. 15.

 

글: 양홍리(楊紅利) 

 

1700년 1월 7일, 새로운 세기의 도래를 축하하기 위하여, '태양왕' 루이14세(1643-1715년 재위)는 프랑스 베르세이유궁의 휘황찬란한 대청에서 성대한 무도회를 개최한다. 파리 상류사회의 귀족들이 모두 도착한 후 음악이 울리고, 국왕은 중국식 복장을 차려입고, 중국식 8인이 드는 가마에 앉아서 나타났다. 그곳은 경탄의 소리로 가득찬다. 이 오를레앙 공작이 기획한 중국식 무도회는 기실 당시 유럽의 유행을 보여주는 한 편린이다. 이런 특수한 유행은 18세기를 전후하여 유럽에서 100년간 유행했던 '중국붐'이다.

 

오랫동안, 유럽은 중국을 알고 싶어했다. 로마제국시대에, 중국의 비단은 사치품으로 상류사회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다. 16세기에 들어서면서 많은 선교사들이 중국으로 간다. 그들이 가져온 각종 소식은 유럽인들로 하여금 중국에 대한 흥미를 불러일으켰다. 여러 선교사들 중에서, 마테오 리치는 특수한 지위를 지닌다. 그는 중국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을 뿐아니라, 당시 유럽에 중국문화를 소개한 중요한 인물이기도 했다. 16세기 중엽, 마테오 리치는 유가경전 <사서><오경>을 번역한다. 그의 <마테오리치일기>는 처음으로 유럽에 중국의 도덕과 종교사상을 전면적으로 소개한다.

 

18세기, 중국은 강건성세기였다. 유럽은 여전히 종교분쟁과 전란의 고통을 겪고 있었다. 중국으로 간 선교사들이 중국의 아름다운 광경을 그들에게 소개하자, 전체 유럽은 깜작 놀란다. 그 결과 17세기말에서 18세기말까지 약 100연간, 유럽에서는 사상유례없는 '중국붐'이 일어난다. 물질, 문화이건 정치제도이건, 유럽은 모두 중국을 숭상한다. 1769년 한 유럽인은 이렇게 쓴 바 있다: "중국은 유럽 자체의 어느 지역보다도 더 유명하다."

 

'중국붐'이 유럽에서 유행하는 기간동안, 사람들은 중국에서 온 물건을 좋아했고, 중국의 예술품격과생활습속을 모방하는데 열중했다. 그리하여 '한풍(漢風, Chinoiserie)'의 유행이 일어난다. 이런 유행은 유럽인의 생활의 구석구석에 침투한다. 일상용품, 집안장식, 정원건축등.

 

17세기이래, 비단, 자기, 차등 중국특산품은 유럽으로 대량 수입된다. 상류사회에서 부를 자랑하는 사치품이 된다. 차가 처음으로 유럽에 들어왔을 때, 상류사회에서 만병통치약으로 취급된다. 부녀자들은 통상 편두통이 있으면 차를 마셨다. 1650년, 영국의 보통가정의 1년 생활비는 개략 5파운드였다. 그런데,450그램의 차의 가격이 10파운드에 이르렀다. 중국자기는 유럽의 여러 왕족들이 좋아하는 것이었다. '동방의 마법유리"로 불리웠다. 통상적으로 왕궁과 귀족의 집에서나 볼 수 있었다.

 

중국의 고급 비단도 유럽소비자들로부터 환영을 받았다. 당시 유럽에서 생산하는 비단의 품질은 중국만 못했으므로, 그들은 왕왕 중국식도안에 '중국제조'라는 글자를 써넣어 중국산 제품인 것처럼 사칭하기도 했다. 그외에 중국에서온 칠기, 부채 및 가마등도 유럽 상류사회의 생활에 유입되었다.

 

각종 중국기물을 앞다투어 찾으면서, 유럽사회에는 하나의 유행이 형성된다. 중국식 파티, 중국 피영희(皮影戱)를 관람하는 것, 중국식 금붕어를 기르는 것등이 모두 우아한 품위의 상징이 된다. 이런 유행이 가장 전형적으로 나타난 것은 바로 중국식 정원과 건축이 유럽에 성행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1670년, 호화사치로 유명한 유리14세가, 베르사이유궁에 자신이 사랑하는 후궁을 위하여, '중국궁전'을 건설하도록 지시한다. 이 건축물이 완성되자마자 즉시 유럽각국에서 모방한다. 일시에 유럽에는 많은 중국풍격의 대표적 건축물이 나타난다.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은 프러시아 상수시 궁전의 '중국차정(中國茶亭)'이다.

 

중국유행이 미친듯이 번지면서, 당시에 여러가지 에피소드가 나타난다. 1672년, 도밍고 페르난데스 나바레트는 중국에서 유럽으로 돌아오자마자, 즉시 스타급의 인물이 된다. 1698년 파리에는 자칭 중국공주라는 여인이 나타나서, 상류사회의 귀한 대접을 받는다. 그러나, 나중에 사람들은 이 여자가 프랑스의 시골에서 온 사기꾼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유럽사회가 중국유행을 극력 추구할 때, 지식계는 눈길을 문화적 성과로 돌린다. 18세기, 계몽사상가들이 앞장서서 유럽에 근 반세기에 이르는 중국문화붐을 불러일으킨다. 저명한 사상가 볼테르는 유가학설을 아주 숭상했다. 그는 일찌기 <논어>의 "기소불욕, 물시어인(己所不欲, 勿施於人)"을 모든 사람이 지켜야할 좌우명으로 보았다. 그의 영향을 받아 프랑스대혁명시기의 <인권선언>에도 이 격언이 등장한다. 또 다른 계몽사상가인 디드로는 중국문화를 매우 숭앙했다. 그는 공자를 "중국의 소크라테스"라고 칭했다. 한번은 대담에서 공자와 비교하면, '호머는 멍청이이다'라고까지 말한다.

 

유럽의 다른 나라에서도 중국문화붐이 일어난다. 특히 러시아에는 대시인 푸시킨이 목마른 것처럼 중국과 관련한 문헌을 탐독한다. 그리고 그의 명저 <예브게니 오네긴>의 초고에서 <논어>에 나오는 "후생가외, 언지래자지불여금야(後生可畏, 焉知來者之不如今也)"라는 말을 싯구로 고쳐서 넣었다.

 

18세기를 전후하여 유럽에 중국문화붐이 유행하는데, 가장 집중적으로 나타난 현상은 중국희극이 일세를 풍미하였다는 것이다. 1735년,프랑스의 Joseph de Premare(馬若瑟)신부는 프랑스어판<조씨고아>를 번역출판하여, 사상유례없는 중국희극붐을 불러일으킨다. 볼테르는 다시 개편하여, <중국고아>로 이름을 고쳐 파리에서 상연하고, 민중들의 큰 호응을 얻어낸다. 그후, 영국, 이탈리아등지에서도 이 중국희극이 공연된다. 통계에 따르면, 18세기에만 <조씨고아>는 유럽에서 4개의 개편본과 3개의 영문번역본이 나타난다.

 

관료제도분야에서 유럽은 당시 귀족세습제를 실행했다. 이것은 여러가지 폐단을 불러왔다. 18세기에 이르러, 신흥자산계급의 역량이 정치적 독점을 타파하고, 국가권렉체계에 진입한다. 중국은 과거를 특색으로 하는 "공부를 잘하면 관료가 된다(學而優則仕)"는 문관제도는 이들에게 좋은 모범이 된다. 그들은 중국에서는 농민의 아들이라고 하더라도 모두 총독이나 재상이 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그리하여, 프랑스는 대혁명이후 중국과거제도를 참고하여, 경쟁적인 시험제도를 도입한다. 이렇게 하여 자산계급과 평민이 정치무대에 오를 수 있는 요구를 만족시켜준것이다.

 

국가를 다스리는 분먀에서, 유럽의 많은 정치인들은 속속 중국을 본뜬다. 프랑스의 중농학파의 창시자이자, '유럽의 공자'로 불리는 케네는 유가의 치국사상을 아주 찬양했다. 1756년, 그의 설득으로 루이15세는 심지어 중국황제를 모방하여, 토지에 제사지내는 낯선 의식을 거행하여 유럽에 반향을 불러온다.

 

부인할 수 없는 것은 이번 '중국붐'에서, 유럽은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광경이 나타났었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번 열기는 중국과 서방의 교류에 중요한 추진작용을 했다.아편전쟁을 전후하여, 중국이 날로 쇠락하자, '중국붐'은 유럽에서 점점 쇠퇴한다. 그러나 영향력은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예를 들어 마르크스는 두 딸에게 '중국황제' '중국황태자고고'라는 별명을 지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