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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유비)

도원결의때 관우,장비는 왜 유비를 '큰형님'으로 모셨는가?

by 중은우시 2015. 2. 20.

글: 복녕객(福寧客)

 

삼국연의를 보면, 도원결의는 장비가 제안한다. 왜 장비가 제안했을까? 그것은 도원(桃園)이 장비의 것이기 때문이다. 유비와 관우는 말할 자격이 없는 것이다. 기실 '도원결의'에서 가장 핵심문제는 어디에서 결의하였느냐가 아니라, 누가 '큰형님'이 되느냐는 것이다. 세 사람 중애서 재력을 따지면 유비가 장비만 못하다. 무예로 따져도 유비는 관우와 장비보다 아래이다. 나이로 따지만, 야사에서는 관우가 유비보다 많다고 한다. 다만 세사람이 결의할 때 왜 관우와 장비는 기꺼이 둘째, 셋째가 되고, 유비를 큰형님으로 모셨을까? 필자의 생각에 이는 세 사람중 유비의 나이가 가장 많은 외에 관우, 장비가 짧은 기간동안의 접촉에서 유비가 지닌 남다른 능력을 발견한 것과 관련이 있다. 두 사람이 기꺼이 유비의 아래가 되도록 만든 것이다. 그렇다면 유비는 도대체 어떤 남다른 점을 지니고 있었을까? 아래의 몇 가지 방면에서 한번 살펴보기로 하자.

 

첫째, 관우는 자신의 엄청난 힘으로 마반(磨盤)을 옮겨, 장비가 우물 안에 숨겨둔 돼지고기를 꺼내어 여러 동네사람들에게 나누어준 후, 장비는 대노하여 그를 찾아와서, 두 사람은 있는 재주를 다하여 싸우게 된다. 그러나 난형난제로 승부를 가릴 수 없었다. 이때 유비는 왼손으로 관우를 잡아끌고, 오른손으로 장비를 잡아끌어 두 사람을 제지하는데 성공한다. 이를 통하여 유비는 관우, 장비에게 좋은 첫인상을 남긴다. 관우, 장비로 하여금 유비의 무예가 그들 두 명보다 못하지 않다는 것을 알았고, 그도 비범한 재주를 지닌 인물임을 알았던 것이다.

 

둘째, 유비, 관우, 장비의 세 사람이 장비의 집에서 술을 마실 때, 장각(張角)이 일으킨 '황건적의 난'이 국내를 휩쓴다. 조정은 바빠서 어쩔 줄을 몰랐고, 백성들은 도탄에 빠졌다. 세 사람은 그래서 천하국세를 논하기 시작하는데, 유비가 발언하자, 당시의 시국을 확실하게 분석하고 조정의 폐단을 날카롭게 드러냈다. 천하대세를 가슴 속에 다 품고 있었던 것이다. 이는 관우와 장비로 하여금 유비가 그냥 백정이 아니라, '무략(武略)'을 지니고, '문도(文韜)'까지 가진 인물이라고 여기게 되어 더욱 존경하게 된다.

 

셋째, 유비, 관우, 장비의 세 사림이 국가정세를 논한 후, 유비는 관우, 장비도 가슴에 큰 뜻을 품고 있으며, 큰 사업을 하려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자신의 신세를 털어놓는다. 자신은 누상촌의 사람이고, 중산정왕의 후예이며, 15세에 사방으로 배움을 찾아서 떠나 스승과 친구를 만나고 항상 위로는 나라에 보답하고, 아래로는 백성을 안정시키고 싶었다는 등의 말을 한다. 관우, 장비는 유비가 일반인이 아니라 귀인이라고 여긴다. 장비는 '고상폐호(古桑蔽戶), 필출귀인(必出貴人)'이라고 말한다. 그리하여 장비는 유비를 따르면 사출유명(師出有名, 군대를 일으키는데 명분이 있다)하다고 여기며, 앞날이 더욱 밝을 것이라고 여긴다.

 

관우, 장비도 원래 우국충정이 있고, 가슴에 큰 뜻을 품고 있었으며, 큰 일을 하고 싶었다(황건적의 난 때 유주태수가 모병령을 내리자, 관우, 장비는 모두 발걸음을 멈투고 이를 보며 장탄식을 했다). 세 사람이 모이니, 유비는 명분이 있고(한황실의 종친), 관우는 재주가 있으며(힘이 무궁하고 신수가 비범하다), 장비는 돈이 있었다(고기를 파는 부자였다). 세 사람은 상호 보완이 되고, 자원이 충분히 통합되었다. 유비는 관우, 장비에게 사업을 하면서, "하필 다른 사람의 밑에 있을 필요가 있느냐"고 종용한다. 관우, 장비도 자연히 유비를 따라 거사하기를 원한다. 그래서 두 사람은 유비를 큰형님으로 모신 것이 당연한 일을 진행이라 할 수 있다.

 

기실, '도원결의'는 역사적 사실이 아니다. 사서에 기록이 없다. 다만 매번 '도원결의' 이야기를 읽을 때면, 형제 3명의 이 정의는 정말 얻기 힘든 것이라고 여기게 된다. 그리고 도원결의의 이야기는 널리 알려져 있고, 영향도 아주 깊다. 관우의 천리주단기(千里走單騎), 신재조영심재한(身在曹營心在漢), 손권이 형주를 기습한 후 피살당한다. 그의 이미지는 인민대중에게서 정의의 화신이 된다. 그리고 민간에서는 그를 제사지내고 명청시대의 학자 모종강은 관우를 <삼국연의>의 삼절(三絶)중 '의절(義絶)'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역사의 발전과 더불어  관우는 점점 좀도둑, 강도, 깡패등 삼교구류의 인물들에 이용당한다. 일부 학자들은 '도원결의'는 그저 방파를 결성한 깡패행위로 보고, 사회안정에 극히 불리하다고 보았다. 당연히 방파를 만드는 것은 세상사람들에게 좋게 받아들여지지는 않지만, 나관중 선생이 말하고 싶었던 것은 유비,관우,장비간의 천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정의(情誼)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현제 도덕이 날로 떨어지고, 사람들의 마음이 옛날같지 않은 사회에 살고 있다. 부족한 것은 바로 그러한 '정의'이다. 돈을 위하여 친구를 팔아먹고, 돈을 위하여 처자식을 버린다. 원인은 바로 많은 사람들이 친구과 가정에 충성해야 한다는 관념을 버렸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