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유비)

유비는 왜 관우에게 작위를 주지 않았을까?

중은우시 2015. 2. 10. 19:43

글: 생활문적(生活文摘)


고대의 제왕들은 인심을 얻고, 심복의 충성심을 얻어내고, 위엄을 보이고, 은총을 보여주기 위하여 왕왕 가관(加官), 진작(晋爵), 봉후(封侯)등등을 유효한 수단으로 자주 쓴다. <삼국지.촉지>를 뒤적여 보면 알 수 있다. 유비의 서촉에서도 적지 않은 사람들을 후(侯)로 봉한다. 


장비(張飛)는 다리를 막아 호위한 공으로 신정후(新亭侯)에 봉하고, 장무원년에는 서향후(西鄕侯)로 고쳐 봉한다; 황충(黃忠)은 정군산 전투에서 하후연을 참한 대공을 세워 관내후(關內侯)에 봉한다; 마초(馬超)는 한헌제에 의하여 도정후(都亭侯)에 봉해졌는데, 장무원년 태향후(斄鄕侯)에 봉해진다; 방통(龐統)은 죽은 후에 유비가 그를 관내후에 추봉한다; 법정(法正)이 죽은 후에 유비는 그의 아들 법막(法邈)을 관내후에 봉한다. 건흥원년 조운(趙雲)을 영창정후(永昌亭侯)에 봉한다; 건흥원년 위연(魏延)은 도정후(都亭侯)에 봉한다; 건흥6년 제갈량을 무향후(武鄕侯)에 봉한다.


명성이 혁혁한 사람들만 후에 봉해진 것이 아니라, 일부 명성이 그다지 크지 않은 자들도 속속 후에 봉해진다. 예를 들어 마대(馬垈)는 진창후(陳倉侯)이고, 동궐(董厥)은 남향후(南鄕侯), 유민(劉敏)은 운정후(雲亭侯)이고, 왕평(王平)은 안한후(安漢侯)이다.


이 명단을 보면 한 가지 곤혹스러운 점이 있다. 첫째는 공로가 개세적인 제갈량이 후에 봉해진 것이 아주 늦었다는 것이고, 둘째는 여기에 관우의 이름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유비의 결의형제이고, 고굉지신이며, 문도무략에 공헌이 탁월하며, 의박운천(義薄雲天)하며, 세상에 이름을 크게 떨친다. 그런데 어찌 그는 후에 봉해지지 못했을까?


혹자는 관우에게 한수정후(漢壽亭侯)라는 봉호가 있지 않느냐고 말할지 모르겠다. 다만 이것은 유비가 봉한 것이 아니라, 건안5년, 관우가 조조를 도와 원소를 막고 그의 대장 안량을 죽여 백마의 포위를 풀었기 때문에 나중에 조조에 의하여 봉해진 것이다. 여기서 말이 나온 김에 하자면, 유비의 의성정후(宜城亭侯)도 조조가 봉한 것이다.


혹자는 관우가 장무후(壯繆侯)가 아니냐고 말할지 모른다. 그러나 이는 사후에 추봉된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이는 유선(劉禪)이 진지(陳祗)를 총애한 덕을 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촉서>에 분명하게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처음에 선주(先主, 유비)때는 법정만이 시호를 받았고, 후주(後主, 유선)때는 제갈량의 공이 개세적이고, 장완, 비위가 국가의 중임을 맡아서 역시 시호를 받는다; 진지는 총애를 받아서 특별히 상을 더해주고자 한다. 하후패는 멀리서 귀순할 때, 다시 시호를 얻는다. 그리하여, 관우, 장비, 마초, 방통, 황충 및 조운도 시호를 추봉받는다. 구체적인 내용은 법정은 익후, 방통의 정후, 관우는 장무후, 장비는 환후, 마초는 위후, 제갈량은 충무후, 조운은 순평후, 황충은 강후, 장완은 공후, 비위는 경후이다.


청나라의 조일청이 편찬한 <동잠문고>에 <관장무봉작고>라는 짧은 글이 있다. 관우가 왜 혼자서 작위를 받지 못했을까? 진수의 <삼국지>에는 '봉배원훈(封拜元勛)'이라고만 말하였고, 명호는 없고 들어보지 못했다'라고 했다. 이는 도대체 어찌된 일인가? 원인은 무엇일까? 그가 내놓은 해석은 이러하다 "선주는 관우에게 한나라에서 후로 봉했으므로 고치지 않은 것이다. 특별히 현을 하나 두어 관우의 공봉읍으로 삼는다." 즉, 관공은 조조가 한왕조 황실의 명의로 작호를 내렸으므로 유비는 이 봉호를 존중하여 계속하여 쓰게 했다는 것이다. 다시 새로운 봉호를 내리지는 않은 것이다. 그저 광한군 가맹현의 땅을 '한수현'으로 하여 관우의 봉읍으로 삼게 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