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진사황(秦四晃)
'관료2세'를 얘기하자면 조조와 유비의 아들은 표준적인 '관료2세'인 셈이다. 유비의 친아들은 3명이다. 큰아들 유선(劉禪), 둘째아들 유영(劉永), 셋째아들 유리(劉理). 그러나 모두 인재로 성장하지는 못한다. 가장 유명한 사람은 '도와줘도 안되는' 아두-- 유선이다. 조위에 투항하여, 조조 후손의 포로가 되어 부친이 만든 촉한강산을 망해버린다. "낙불사촉(樂不思蜀)"하며 적국에서 기꺼이 포로로 생활한다.
조조의 여인은 비교적 많았다. 그래서 아들도 많이 낳는다. 전해지는 바로는 25명이라고 한다. 핵심인 두 명을 말하자면, 하나는 태자 조비(曹丕)이다. 조위의 진정한 창립자이고, 부친의 손에서 위왕과 상국의 권력을 이어받는다. 조아만(조조)의 위장을 벗어버리고, 직접 한왕조를 위왕조로 바꾸어 버린다. 그리고 스스로 문황제에 오르고, 부친에게는 무황제의 존호를 올린다. 기세당당하게 강산을 차지한다. 셋째아들 조식(曹植)은 무로는 공을 세우지 못했지만, 문으로는 천고에 이름을 남긴다. 건안문학의 대표자이다. 후세에는 '재고팔두(才高八斗)'로 불린다. 천하의 '재(才)'는 모두 겨우 10두이다.
조조의 아들은 부친이 죽은 후, 부친의 사업을 키웠을 뿐아니라, 무로는 나라를 다스리고 문으로는 세상에 전했다. 유비의 아들은 부친이 죽은 후, 특히 대관가 제갈량이 죽은 후, 힘이 따르지 못하여 남에게 잡아먹히는데 속수무책으로 붙잡힌다. 같은 '관료2세'인데, 왜 차이가 이렇게 클까?
첫째, 아마도 유전자의 문제일 것이다. 후세에 공인하듯이, 조조는 난세의 간웅이고, 치세의 능신이다. 좋게 말하자면 기지있고, 과감하고, 웅재대략이 있다. 나쁘게 말하자면 교활하고, 흉악하며 늑대의 야심을 지니고 있다. 그러면 유황숙(유비)은? 인후하고 관애하다. <삼국지>는 비교적 정확하게 개괄했다. 조조는 "비상지인(非常之人), 초세지걸(超世之傑)"이라 평하고, 유비는 "홍의관후(弘毅寬厚), 지인대사(知人待士), 영웅지기(英雄之器)"라 칭했다. 두 사람의 개성과 기질은 전혀 다르다. 그러니 낳은 아들도 유전이 각각 다를 것이다. 조비는 그의 부친보다 더 마음이 악독하나, 유선은 부친보다 더 온화하고 부드럽다. 이것은 두 사람의 사업의 미래발전방향에 결정적인 요소이다.
둘째, 성장환경과 관련이 있다. 조비는 일찌감치 권력의 운영에 참여했고, 직접 궁중투쟁의 참혹함을 겪었고, 황권정치에 대한 인식이 아주 심도있다. 아두는 어려서 부친을 따라 남정북전한다. 그러나 그가 겪은 것은 그저 누군가 안고 도망쳤다. 촉에 들어간 후에는 또 전혀 달라진다. 빙화양중천(氷火兩重天). 편안하기 지내면서 그저 투계나 말타기를 즐긴다.
셋째, 정치경험의 차이가 있다. 조비는 형제들간에 총애를 다투는 환경하에서 자란다. 권모술수와 임기응변같은 정치적 수단을 그는 형제들과의 내부투쟁과정에서 이미 견식하고, 익히고 익숙해진다. 그리고 자신의 두뇌집단과 집정팀을 구성한다. 그러나 유선은 촉한에서 유일한 황태자로 세워져 계속 선주 유비의 총애를 받는다. 편안하게 살면서 아무런 걱정이 없었다. 그저 조용히 승계할 날만 기다리면 되었다. 승계는 확실한 것이다. 그래서 복잡한 권력투쟁을 겪지 않아서, 내심이 천진하고 질박했다.
넷째, 객관적인 조건이 달랐다. 조비는 사전에 부친이 손에 손을 잡고 사람을 다루고 정치하는 법을 가르친다. 그러나 유선은 부황이 있을 뿐아니라, 더더구나 승상 겸 군사인 제갈량이 있었다. 제갈량이 있으면 유비조차도 군국대사를 거의 신경쓰지 않았다. 하물며 나이어닌 태자 유선은 그저 놀기만 하면 되었다. 조조와 유비가 각각 태자에게 준 유언을 보자. 그러면 두 후계자의 그릇이 부친이 보기에 얼마나 달랐는지 알 수 있다. 조조의 유언에 따르면, "천하가 아직 안정되지 않았다. 장례를 마치면 모두 상복을 벗어라. 병력은 주둔하는 곳에서 떠나지 말라." 강산이 중요하고, 나를 장례지내는 것은 작은 일이다. 사직을 공고히 하는 것이 큰 일이다. 유비가 유선에게 내린 유조를 보면, "악은 작다고 하여 행하지 말고, 선은 적다고 하여 하지 않아서는 안된다.. 현명하고 덕이 있어야 다른 사람이 따른다. 한서, 예기를 읽고, 시간이 나면 제자와 육도, 상군서를 읽어라. 지혜를 더해준다. 듣기로 승상이 신자,한자,관자,육도를 쓰는 것을 이미 마쳤는데 보내지 못했다고 한다. 스스로 다시 구해서 읽어라." 이때 아들에게 책을 많이 읽으라고 한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다시 유선에게 특별히 당부한다. "너는 승상을 모시는 것을 아비를 모시듯이 해라" 그 말에 숨은 뜻은 스스로 결정해서 하지 말고, 모든 것은 제갈량의 말을 들으라는 것이다. 확실히 조조는 자신의 아들에게 믿음이 있었다. 일관되게 그에게 권력을 잡고 정권을 유지하라고 당부하한다. 그러나 유황숙은 죽기 전에 그저 어쩔 수 없이 자식을 남에게 부탁한다. 두 후계자중 누가 먼저 자신의 역할을 제개도 해서 천하를 받들 수 있을 것인지는 말하지 않아도 알 것이다.
다섯째, 나이와 성숙도의 문제. 조비는 재위때 34살이었다. 유선이 승계했을 때는 겨우 17살이었다. 조조가 죽었을 때, 권력을 안심하고 아들에게 넘길 수 있었다. 그러나 유비는 임종전에 '승상제갈량에게 아들을 맡겨야 했다" 성격이 완전히 다르다. 조비는 승계하자마자 혼자서 일을 다 처리한다. 유선은 즉위하고나서 부친의 장례기간동안의 일들도 모두 제갈량에게 하나하나 얘기한다. 11년의 기간동안 제갈량이 촉을 다스리지 유선이 촉을 다스린 것이 아니다. 유선은 진정으로 자신의 권위를 형성하지 못했다. 이 점에서 유비는 아달을 이해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영안에서 병이 중할 때 제갈량에게 이렇게 말한다: "그대의 재능은 조비의 열배이다...만일 아들이 보좌할 만하면 보좌하고; 아들이 인재가 되지 못하면 그대가 황제위를 취하라." 총명한 사람이면 바로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유황숙 자신도 아두는 안된다고 인정한 것이다. 조비는 아예 헤비급이 아니다. 그저 군사 제갈량만이 조비와 상대할 만하다.
여섯째, 사업심의 강약문제. 조조의 아들은 대부분 어려서부터 입신양명의 이상을 품고 있었다. 조비를 예로 들면, 정치적으로 지위를 확립하기 전에, 그는 동생 조식과 먼저 부친의 모습을 본받아 문학분야에서 열심히 갈고닦아, 비범한 재능을 선보인다. 삼조의 문장사부(文章詞賦)는 지금까지도 전해진다. 그래서 조씨자손의 공명사업심은 유씨보다 훨씬 강했다. 유비는 스스로 아들이 향락을 탐하는 군주인 것을 알았다. 자신의 아들의 재능이 얼마 정도인지 알았다. 그래서 할 수 있으면 하고, 할 수 없으면 제갈량이 하게 하라고 유언을 남긴 것이다. 조조는 아들이 웅재대략을 지니고 있음을 알았고, 조비는 부친의 웅심을 이어받았다. 그러나 유선은 안일향락을 추구했고, 강산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었다.
일곱째, 기업규모의 차이가 컸다. 조위는 중원복지를 점거하고, 땅은 넓고 물산은 풍부하다. 병력을 강하고 말도 튼튼하다. 촉한은 한쪽 귀퉁이에 웅크리고 있어 땅이 좁고, 사람은 촌스럽다. 기업규모를 비교해보면 양자의 경영규모와 자본실력은 차이가 너무 크다. 함께 비교할 수 없다. 촉한이 조위에 병합되는 것은 유선 자신이 국면을 만회하지 못한 필연적인 결말이다.
유비의 아들은 조조의 아들만 못했다. 역사는 이미 증명했다. 그러나 한 가지 사실을 우리가 잊어서는 안된다. 그것은 바로 조비는 개국한 후 7년간 황제로 있은 후 39살에 죽어버린다. 그러나 촉한기업을 망친 유선은 안락공의 신분으로 낙양에서 65세까지 살았다. 직접 조위가 사마씨가족에게 빼앗기는 것을 본다. 세상사는 무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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