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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문혁전)

100만명의 투항일본군이 남긴 무기장비는 누가 가져갔는가?

by 중은우시 2014. 10. 24.

글: 학길림(郝吉林)

 

과거에 우리는 그저 동북(만주)의 소련군이 항복을 받은 지역에 진입한 일부 팔로군이 관동군의 무기를 일부 '접수'하였고, 소련군이 나중에 일부 장비를 넘겨주었다고 알고 있었다. 이 부분 무기장비가 일본군의 총장비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얼마나 될까? 대부분의 무기는 누가 가져갔을까?

 

이 부분의 역사적 사실에 관한 일부 '자료'를 보면 다음과 같다:

 

"일본이 투항한 후 국민정부는 중국대륙, 대만 및 월남 북위16도이북지역의 항복접수업무를 책임진다. 이 범위내에서 투항한 일본군은 모두 114.5만명이다.

1946년 4월까지, 일본군의 소총 68.6만정, 권총 60.3만정, 기관총 30만정, 각종 화표 1.2만대; 소총총탄 1억발, 수류탄 및 각종 포탄 각 2000만개(이상 개략적인 숫자)를 접수했다. 그외에 전차 383대, 장갑차 151대, 트럭 15,785대, 말 74,159필; 각종 비행기 1,066대, 각종 함정 1,400척을 접수했다."

 

접수한 일본군 무기는 "즉시이용의 원칙에 따라 각부서의 역량을 강화하는데 사용했다", "주요화포는 접수한 후...각 항복접수지역, 각 무기접수군사령부에 통지를 보내어, 접수한 일본군 화포, 기자재, 마필은 편제에 따라 각각 보충사용하도록 허락했고, 일본군화포로 편제한 포병연대가 116개였다." "소총, 기관총, 권총등은 각각 각 정규군에 배분했고, 지방단경찰도 사용했다." 나머지는 "일부 배분되어 사용되지 않은 무기는 군대를 정비한 후, 각각 배분하여 사용했다." 

 

중국의 동북은 소련이 항복을 접수하는 지역이었다. 소련군은 관동군이 수중에서 "소총 약 70만정, 기관총 12,000-14,000정, 화포 약 4000문, 탱크 잡갑차 약 600대, 비행기 800대, 자동차 약 2000대" 접수했다. 

2차대전후 얼마 지나지 않아, 가장 먼저 동북에 진입한 증극림(曾克林) 부대는 관동군 최대의 소가둔무기창고에서 2만정의 소총, 100정의 기관총, 156문의 박격포, 산포와 야포를 운반해 갔다. 

항련의 주보중(周保中)은 창춘대본영의 무기창고를 접수한 후, 역시 5만정의 소총, 2000여정의 경기관총, 800여정의 중기관총, 탄약 1200여만발을 접수했다.

소련군도 직접 무기고를 접수하여 일부 무기,탄약을 꺼내서 중국공산당에 건네 주었다.

동북군구 군공부부방을 지낸 하장공(何長工)의 회고에 따르면, 소련군은 만주리에 '수량이 아주 많은' 무기고가 있었는데, 당초에 '소련군이 일본관동군에게 접수한 것'이었다. "우라르로 가져가서 녹여서 강철을 만들고자 준비했다". 중국공산당은 그와 협상화여 '폐강철과 바꾸었는데, 1톤 대 1톤으로 바꾸었다." 하장공은 이렇게 말한다. "바꾸어온 "이들 무기는 수량이 적지 않았다. 구체적인 수량은 기억하지 못한다. 각종 총,포가 있고, 탱크도 있었다. 우리가 몇 대의 열차로 며칠씩 옮겨서 비로소 다 가져올 수 있었다. 이는 우리의 적지 않은 문제를 해결해 주었다."

동북민주연군 포병사령관 주서(朱瑞)는 나중에 협상을 통하여 소련측과 합의를 달성한다. 소련이 조선에서 중공으로 보낸 일본군의 무기와 탄약을 중공이 농산품과 가격을 환산하여 교환하기로. 중공측에서는 이렇게 하여 수십대열차의 일본군 구무기, 화포와 탄약을 얻었다.

 

어떤 학자의 연구통계에 따르면, 중곡측이 소련군에게서 직접 혹은 간접으로 획득한 일본군장비는 최소한 소총 30만정, 각종 포 1600만정(박격포, 척탄통 포함) 그리고 탱크 20대이다. 수량이나 품질에서 모두 국민정부가 관내에서 접수한 일본군무기와는 비교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