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동호소주(東湖少主)
유비의 가장 열정적인 시기는 적벽대전을 전후해서일 것이다.
이전에 그는 아무 것도 지닌 것이 없고, 어느 곳도 머물 곳이 없었다. 사방을 돌아다니면서 이사람 저사람에게 의탁했으며,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면서 살아야 했다.
"황숙'이라는 명분은 그럴 듯하기는 했지만, 어쨌든 유명무실했고, 가는 곳마다 위험이 가득했다. 형주일대로 도망쳐 오고나서 유비는 더더욱 의기소침해 있었다. 산궁수진(山窮水盡)의 상황에 빠지자, '도원결의'때의 맹세는 물거품으로 되었다. 그러나 생각지도 못하게 '수경선생'이 한 마디 해주어서, 비로소 이곳에 고인이 칩거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마치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유비는 즉시 관우, 장비를 데리고 찾아나선다.
가르침을 구하려 간 것이니, 당연히 겸허한 자세로 몸을 낮추어야 했다. '삼고초려', 이처럼 여러번 찾아가는 것은 단지 유비만이 해낼 수 있는 것같다. 만일 관우, 장비와 같은 사람이었다면 아마도 그런 인내심이 없었을 것이다. 다행히 유비는 끈기가 있어 마지막 찾아갔을 때 제갈량을 하산시킬 수 있었다. 만일 마지막에 유비가 제갈량을 하산시키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그는 분명 네번, 다섯번 계속 찾아갔을 것이다. 어쨌든 점찍어 두었다면 절대로 쉽게 포기하지 않았을 것이다. 나중에, 제갈량은 남만왕 맹획에 대하여 '칠종칠금'하게 되는데, 마마도 유비에게 배운 것인지 모르겠다.
유비의 '삼고초려'도 좋고, 제갈량의 '칠종칠금'도 좋다. 내용은 다르지만 기실 그 맥락은 같다. 겉으로 보기에는 그저 하나의 숫자에 불과하지만, 기실 이것이 바로 창업의 열정이 드러나는 것이다. 열정이 없다면 모든 것은 헛되다.
제갈량의 기획이 있게 되자, 유비집단의 국면은 큰 변화가 발생한다. 다만 아무리 뛰어난 며느리도 쌀이 없으면 밥을 지을 수 없다. 유비집단의 기반은 너무 약했다. 짧은 시간내에 효과를 나타내고, 기사회생시킬 수는 없어싿. 그래서 먼저 가장 기초적인 일부터 시작해야 했다. 형주는 비록 크지만, 어쨌든 자신의 영지가 아니다. 그러므로 신야(新野)라는 작은 성에 웅크리고 있으면서 시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설사 그렇다고 하더라도 유비는 불안했다. 채모 오누이는 그를 눈엣가시로 여겨서 시시때때로 그를 해치려 한다. "마약단계(馬躍檀溪)'의 교훈은 유황숙으로 하여금 깊이 느끼게 만들었다: 자신의 영지가 없으면, 아무 것도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유비가 가장 힘든 나날을 보내고 있을 때, 기회는 온다. 조조의 20만대군이 형주로 쳐들어온 것이다. 유종(劉琮)은 성문을 열고 투항한다. 조조는 병졸 한 명 희생시키지 않고, 가볍게 형조의 유지를 점령한다. 승리가 너무 쉽게 왔으므로 조조의 속전속결로 전쟁을 끝내려는 교만한 심리가 나타나게 된다. 이렇게 되었으니, 기세를 틈타 유비를 제거해버리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한다. 그후에 다시 군대를 이끌고 남하하여 동오를 치려는 것이다. 이때의 유비는 비록 제갈량이 계획을 세우고 있지만, 역량이 너무 약했다. 한번 전투를 붙자마자 바로 궤멸하여,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뻔한다. 싸울 수 없다면 도망치는 수밖에 없다. 그래서 한편으로 도앙치면서 한편으로 유격전을 펼친다.
유격전은 말은 쉽지만 싸우기는 쉬운 것이 아니다. 어디로 도망치느냐가 큰 문제이다. 다행히 제갈량은 항상 아이디어를 가지고 있었다. 이렇게 한편으로 싸우면서 한편으로 도망쳤다. 이렇게 강동까지 전화가 이어진다. 조조의 군대가 장강의 북안까지 도착했으니, 전쟁은 이미 유비 혼자만의 일이 아니게 되었다. 조조의 대군을 맞이하여 제갈량은 손권과 연합하여 공동으로 조조에 맞서려는 전략사상을 내놓는다. 그리고 친히 강동으로 가서 동오를 설득한다. 처음에 동오에 갔을 때, 제갈량은 사명을 욕되게 하지 않고 설전군유(舌戰群儒)하고, 주유를 설득하고, 손권을 격분시켜 결국 공동으로 조조에 대항한다는 전략에 합의한다.
실제로 유비, 제갈량은 너무나 잘 알았다. 동오가 이번 전투를 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전화는 이미 장강까지 이르렀다. 싸우든지 투항하든지, 손권에게 선택의 여지는 많지 않았다. 화가 동오에 미치게 되면 유비집단이 받는 압력을 적지 않게 줄어들 것이다. 손권도 강동에 버티고 있으면서 전략적인 방어를 결정했다. 바로 조조대군의 주력부대에 맞서기로 결정한다. 적벽대전은 손권부대의 정면작전이고, 유비는 그저 몇 갈래의 인마를 퍄견하고, 매복하여 유격전을 벌인 것뿐이다. 손권과 조조의 군대가 실컷 싸우고 난 다음에 유비의 부대가 나타난다. 편안히 쉬면서 피곤해진 군대를 상대한 것이다. 그러다보니 이들 패잔병을 처리하는 것은 쉬운 일이었다.
방휼지쟁에 어부지리를 본 겻이다. 적벽대전에서 손권이 가장 큰 손해를 입는다. 유비는 이전까지 아무 것도 없다가, 근거지가 생긴다. 기회를 보아 형주를 점거한 것이다. 그리하여, 손권은 골치가 아파졌다. 근거지가 생기고 나니, 유비는 더 이상 예전처럼 이곳저곳을 뛰어다니며 싸우는 유격대장이 아니게 된다. 그가 해야할 일은 영토를 넓히고 나라를 발전시키는 것이었다. 그래서 조운은 계양을 거두고, 관우는 장사에서 싸우며, 장비는 무릉을 취한다. 유비집단이 계속 밀고 들어오자, 손권은 가시방석에 앉은 것같았다. 아무리 해도 잠을 푹 잘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사람을 보내어 계속 형주를 돌려달라고 한다. 이때, 유비의 태도가 급격히 변한다. 안된다고는 말하지 않으면서, 상대방을 손바닥 안에 놓고 놀았다. 리스크를 안고 손부인을 취하고, 주공근(주유)를 세번 화나게 만든다. 주도권을 쥐지 못한 손권은 결국 손해를 보게 된다.
아무 것도 먹을 게 없을 때는 무엇을 먹어도 맛있다. 그러나 일단 기반을 갖게 되면, 눈앞의 상황에 그다지 만족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형주를 얻고 나니, 유비는 바로 서천을 갖고 싶어졌다. 영토가 뭉텅뭉텅 유비의 손에 들어가는 것을 보면서 손권은 다시 후회막급이었다. 조조라는 호랑이를 쫓아내고 나니, 유비라는 이리가 들어온 것이다. 강동은 이후 하루도 편안한 날이 없게 된다.
세력이 아직 커지지 않았을 때, 차계생단(借鷄生蛋)은 일관된 수법이다.
유비의 뛰어난 점은 바로: 이익을 쫓고 손해를 피하고, 다른 사람의 힘을 빌어 자신을 발전시켰다는 것이다. 일단 돈도 있고, 영토도 가지게 되니, 누가 유비를 짚신이나 만들던 자라고 말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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