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예방육(倪方六)
사료와 고고학발견으로 보면, 고대여성은 헤어스타일에 아주 신경을 많이 썼다. 그래서 적지 않은 유행하는 헤어스타일을 발명한다. 그중 "피발(披髮, 산발)", "단발(斷髮)", "변발(辮髮, 땋은 머리)", "계발(髻髮, 상투머리)"의 네 가지가 가장 유명하다. 이를 중국고대의 "4대헤어스타일'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1. 피발(披髮)
현대에는 헤어스타일을 '발형(髮型)'이라고 부르지만, 고대에는 "발식(髮式)'이라고 불렀다. 사료와 현대의 고고학출토물을 보면, 헤어스타일의 유행과 여성의 관계는 밀접하다. 예를 들어 가장 원시적으로 유행한 헤어스타일은 '피발'인데, 여성들 가운데 먼저 유행하기 시작했다.
피발은 '산발(散髮)', '피발(被髮)'이라고도 부른다. 이는 일종의 머리카락을 얼굴쪽으로 늘어뜨려, 얼굴을 가리는 헤어스타일이다. 보통 사람들이 말하는 "피발복면(披髮覆面)"이다.
<후한서.남만서남이전>에 기재된 작도이인(莋都夷人)은 "개피발(皆披髮), 좌임(左袵)"이라는 기록이 있다. 즉, 몯 머리카락은 산발을 하고, 옷깃을 왼쪽으로 여민다는 마링다. 작도이인은 지금의 사천의 서부지역인 한원(漢源) 일대에서 생활했다. 다만 이런 헤어스타일은 남방이인의 특유한 것이 아니다. <주서.돌궐전>을 보면, 북방의 돌궐인들도 "피발좌임(披髮左袵), 유고지흉노(猶古之匈奴)"라고 한다.
그외에 지금의 강소,절강일대에 살던 월인(越人)들도 피발을 좋아했다. <한비자.설림상>에는 "월인피발(越人披髮)"이라는 기록이 있다.
피발은 어떻게 유행하는 헤어스타일이 되었는가? <후한서.서강전>이 기록을 보면, 아마도 민속학적인 해석도 찾아볼 수 있다. 당시, 춘추말기에 생활하던 서강(西羌)의 수령인 무과애검(无戈愛劍)은 진여공(秦勵公)에게 생포되어 진나라의 노예가 된다. 무과애검은 나중에 도망치는데 성공한다. 야외에서 그는 코를 베인 여자 즉 소위 "의녀(劓女)"를 만난다. 두 사람은 부부로 맺어진다. 강족은 피발이 유행이었는데, 이는 의녀와 관련이 있다. 왜냐하면 의녀는 "그녀의 모습을 부끄러워하여 머리카락을 산발하여 얼굴을 가렸다(피발목면), 강족은 이를 습속으로 삼는다."
<후한서>에 기록된 것은 그저 전설이다. 기실 피발은 상고시대에 이미 출현했다. <산해경.해외서경>에는 상고시대 피발의 풍속을 기록하고 있다. 용어북면에 위치한 "백민국"의 사람은 피부가 하얐고, 머리카락을 산발했다. 소위 "백신,피발"이다. 같은 책의 '장고지국'의 사람도 '피발'이 유행했다.
현대고고학에 따르면, 피발은 중국에서 가장 원시적인 유행헤어스타일의 하나임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강족이 당시 생활했던 청해, 감숙일대에서 출토된 인면채도기물에서 '피발'의 머리카락양식이 있고, 운남 강천 이가산에서 출토된 한나라때 청동장 장식에서도 피발인 형상이 발견된다.
2. 단발
현대의 헤어스타일개념과 더욱 접근한 것으로 일종의 '단발'이라는 헤어스타일이 있다. 소위 단발은 '축발(祝髮)', '찬법(劗法)", "전발(剪髮)"이라고도 부른다. 즉 길다란 머리카락을 잘라버리는 것이다. 현대 헤어스타일중에서 가장 기초적인 손기술인 '커트'이다. 이런 헤어스타일은 남방소수민족중에서 한 시기에 아주 유행했던 것이다. 심지어 민족의 특징이 되었다.
<한서.지리지>의 기록에 따르면, 광동, 광서일대는 고월국(古粤國)에 속한다. 월국 국군은 전설에 따르면, 대우(大禹)의 후손이고, 묘만(苗蠻)의 갈래에 속한다. 월인은 '문신단발(紋身斷髮), 이피교룡지해(以避蛟龍之害)"한다.
고문헌에는 "월(粤)"은 "월(越)"과 통한다. 월족은 백월(百越)이라고도 칭한다. 춘추시대 강소절강일대의 월(越)국 사람들은 백월중의 한 갈래에 속한다. 그들은 선인의 '단발' 풍속을 계승하였고, 진,한시기에도 그러했다. <회남자.제곡훈>에는 "월인찬전(越人劗鬋, 전은 귀밑머리를 기르는 것을 말함) "이라는 말이 있다. 이런 단발풍속은 백월후예인 흘로족(仡老族), 여족(黎族), 고산족, 태족(傣族)등에서도 유행한다.
월왕 구천의 라이벌인 오나라들도 단발이 유행했다. <좌전.애공십일년>에 "인심약(人尋約), 오발단(吳髮短)"이라는 문구가 나온다. 이 말은 제나라 장수인 공손휘가 오나라와 교전때 사병을 격려하면서 한 말이다. 그 뜻은 너희는 한 사람당 8척의 긴 밧줄을 준비하여, 오나라병사들의 잘라낸 머리를 묶을 준비를 하라. 왜냐하면 오나라사람들은 머리카락이 짧기 때문이다라는 것이다.
'피발'이 유행한 서북지구도 마찬가지로 있었다. 지금의 감숙 동부 천수시 경내에 있는 '진안대지만유적지'에는 신석기시대의 채도병이 발굴된 바 있는데, 병입구에는 성인의 머리모양이 나온다. 머리의 오관과 머리카락은 생동감있고 사실적이다. 그 헤어스타일은 바로 '단발'에 속한다. 머리카락 앞의 눈썹앞에 정갈하게 단발을 늘어뜨린다. 오른쪽으로 머리카락도 아주 정제되어 있다. 이는 분명 사람이 인공적으로 자른 것이다.
가위가 아직 발명되지 않은 신석기시대에 '이발사'들은 어떤 이발도구를 사용하여 머리카락을 예쁘게 잘랐을까? 이것은 아직도 해결되어야 할 수수께끼이다.
태안(泰安)은 옛이름이 성기(成紀)인데, 일찌기 양을 토템으로 한 고강인이 활동한 범위이다. 중화인의 시조인 복희, 여와의 고향이다. 즉 중화민족의 발상지중 하나이다. 소위 '단발'은 중화민족 초기의 머리모양중 하나였다.
3. 변발
초기에 고인들의 이발예술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은 '변발'이다. 당나라때 학자인 안사고의 이해에 따르면, "편(編)"이라는 음은 "변(辮)"과 같다. 그래서 '변발'은 '편발'이다. 즉 현대인들에게도 여전히 유행하고 있는 머리카락을 땋는 헤어스타일이다.
중국인이 언제부터 머리카락을 땋기 시작했을까? 고고학적 발견으로 보면, 피발, 단발과 마찬가지로 아주 초기부터이다. 1973년 가을, 청해성 대통현 상손가채묘지 M384묘장을 발굴정리할 때, 일찌기 내벽에 그린 무용화문의 채도분이 출토된다. 이는 중국미술계, 무용계를 흥분시킨 문물인데, 여기서 '변발' 스타일이 나타난다. 손에 손을 잡고 춤을 추는 여자아이들의 머리에는 모두 두 개의 작은 땋은 머리가 있다.
M384는 신석기시대의 묘장이고, 지금으로부터 5천년이상 떨어진 마가교문화유형에 속한다. 이를 보면 중국의 땋은 머리의역사는 그렇게 유구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상,주 시기에 이르러, 땋은 머리는 이미 보편적으로 유행하고 아주 많이 연구하는 헤어스타일이 된다. 1976년, 안양 은허 상왕 무정의 배우자인 부호묘에서 10건의 옥인(玉人)이 출토되었는데, 자태가 각각 다르고, 그중 한 쌍의 손으로 무릎을 잡고 꿇어앉아 있는 옥인이 있다. 머리에는 작은 땋은 머리가 있는데 머리 뒤로 늘어뜨려져 있는데, 목까지 내려온다.
변발은 정교하게 설계된 헤어스타일이다. 나중에 땋은머리는 갈수록 길어진다. 일반적으로 허리께까지 내려온다. 좌우에 각각 하나씩 두 개로 땋는다. 이는 젊은 여자들이 좋아하는 양식이다. 진한시기에 한줄로 땋는 것은 인기를 얻지 못한다. 17세기 만청이 중원에 들어온 후에 비로소 한줄로 땋는 것이 유행하기 시작한다.
땋은 머리를 비교적 좋아하는 것은 주로 변방의 소수민족이다. 그중 변발을 가장 좋아하고 잘 땋았으며 가장 특색이 있는 것은 서역의 여성이다. 신구<당서>에 따르면, 당시의 토곡혼, 토번, 고창, 강국, 귀자등 서역주민은 모두 변발의 풍속이 있었다.
<신당서.서역열전>의 기록에 따르면, 당시 토곡혼은 "부인변발영후, 철주패(婦人辮髮萦後, 綴珠貝)"라고 했다. 그래서 지금 신강등 서부의 아가씨들이 "땋은 머리가 굵고 긴 것"은 다 전통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서역의 남자들도 머리를 땋는 것을 즐겼다. <구당서.서융열전>에는 당시의 강국에 '장부전발혹변발(丈夫剪髮或辮髮)'이라고 했다. 그리고 부인은 상투머리가 유행한다.
금,원시기의 북방남자들은 모두 '변발'이 아름답다고 여긴다. 나중에 만청의 변발풍속은 여기에서 유래한다. 다만 만청에서 유행한 변발은 또 약간 다른 점이 있다. 먼저 앞머리의 전반부의 머리카락을 깍아버리고, 다시 한 줄로 길게 머리카락을 머리 뒤로 땋는다. 만청의 이런 헤어스타일은 초기에 북방의 선비족, 오환족의 곤발(髡髮)과 고나련이 있다. 즉 일부분을 깍아내고 일부분을 남기는 것이다.
4. 계발
고대 중원인의 눈에, 가장 아름다운 헤어스타일은 단발도 아니고, 변발도 아니고, '계발'이었다. 계발은 바로 머리카락을 묶어서 머리 위에 모아두는 것이다. 그래서 계발은 "결발(結髮)"이라고도 부른다.
<사물기원>에서 인용한 <이의실록>의 기록에 따르면, "수인시위계(燧人始爲髻)", 즉, 계발이라는 헤어스타일은 중화민족의 인문시조인 수인씨(燧人氏)가 발명한 것이고, 수인씨기 계발의 풍속을 시작했다. 그러나, 적지 않은 학자들은 이에 의문을 표시한다. 왜냐하면 모든 헤어스타일은 고대인형출토문물에 있는데, 상투를 한 이미지나 상투를 하는데 쓰는 비녀는 연대가 가장 늦기 때문이다. 동한 허신의 <설문해자>에도 "계(髻)"자는 없다. 진한이전에, 사람들이 계발이라는 헤어스타일을 언급할 때는 "결(結)"이나 "개(紒)"자를 썼다.
고대여성의 '머리에서의 풍정'은 대부분 '계"로 표현되었다. 왜 고인들은 계발을 특히 숭상했을까? 왜냐하면 이런 머리카락양식이 중원인이 숭상하는 의관(衣冠)과 가장 잘 어울렸고, 단정해보였기 때문이다.
고고학적으로 발견된 비녀의 수량으로 분석해 보면, 두발에 상투를 트는 것은 황하유역에서 가장 유행한 헤어스타일이다. 이런 헤어스타일은 여성에만 국한되지 않고, 남녀모두 상투를 틀었다. 진한이후, 계발은 이미 중국고대 가장 인기를 끄는 헤어스타일이 되어 있었다. 진나라 병마용을 보면 이미 서로 다른 형태의 상투가 나온다.
한나라때 이르러, 상투머리는 서로 다른 신분의 사람들이 모두 사용하는 헤어스타일이 된다. 다만 구체적인 모양은 약간 차이가 있었다. 예를 들어, 궁녀는 "백합분소계(百合分髾髻)"인데, 이 헤어스타일은 "수계(垂髻)"라고도 불렀다. 상투의 뒤로 한 줌이 머리카락을 늘어뜨리는 것이다. 경사에 사는 한나라때 여성들은 "타마계(墮馬髻)"가 유행한다. 상투를 한측에 치우치게 하거나 거꾸로 세워서 말이 떨어지는 모양을 했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이런 헤어스타일은 동한 권신 양기(梁冀) 집안의 여자들이 먼저 했다고 한다. 경사의 여성들이 속속 모방하여 동한에서 가장 유행하는 헤어스타일이 되었으며, 청나라때까지 유행한다. 그중 당나라여성은 타마계의 발전에 가장 공헌을 많이 한다. 당나라때 시인 이기(李頎)의 <왕가행(緩歌行)>에는 이런 싯구가 나온다: "이팔아미소타마(二八蛾眉梳墮馬), 미주청가곡방하(美酒淸歌曲房下)" 당나라대 여성은 타마계에 새로운 이름도 붙인다. '와추계(䰀鬌髻)"
상투의 기초 위에서 변화한 헤어스타일도 당나라때 가장 풍부했다. 당나라때 유행한 것으로 기록에 남아 있는 '계발'의 양식만도 근 30종에 이른다: 와추계외에 고계, 저계, 소계, 반관계, 오만계, 회흘계, 수계, 추계, 포가계, 뇨부장계, 발총계, 화계, 보계, 봉계, 종소백엽계, 번하계, 반번계, 반수계, 편소계, 쌍라계, 비계, 의계, 목계, 소정계, 망선계, 팔환계, 교심계....
계발의 기초 이에서 당나라때는 다시 운환, 고환, 장환, 원환, 쌍환등 환(鬟, 쪽)형머리도 나타난다. 빈발(鬓髮)에 장식을 하는 선빈, 송빈, 설빈, 총빈등의 빈형 헤어스타일도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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