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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문화/중국의 풍속

중국고대에 아이의 이름을 어떻게 지어주었는가?

by 중은우시 2014. 10. 2.

글: 예방육(倪方六)

 

새학기가 시작되었다. 많은 새로운 얼굴들이 나타난다. 과거에 아이들이 학문을 시작할 때면 모두 정식이름을 지어주었다. 소위 "학명(學名)"이다. 현대와 비교하면, 옛사람들이 이름을 짓는데는 규칙이 있었다. 송나라이후에는 틀에 박히게 되었다. 다만 각각의 시대에는 각각의 시대의 특징이 있다. 그것은 분명하다.

 

상대적으로 일치되는 견해는 이름을 함부로 지어서는 안된다는 것이고, 글자를 함부로 골라서도 안된다는 것이다.예를 들어, 현대의 여자아이들에게는 "미미(美美)", "려려(麗麗)"같은 중자명(重字名)을 붙이는 것이 유행이다. 고대의 가장들이 거의 지어주지 않던 방식이다. 그저 청루의 여자들만이 '예명'으로 중자명을 쓰기를 좋아했을 뿐이다. 왜 그랬을까?

 

선진시대에는 아이가 3개월이 되면 '부친이 이름을 지어준다'

 

이름(名字)은 현대인들이 보기에 그저 하나의 글자조합이고 하나의 뜻이다. 고대에는 명(名)은 명이고, 자(字)는 자였다. "명"과 "자"는 서로 완전히 다른 개념이었다. "명"도 있고, "자"도 있다는 것은 고대에 신분있는 사람의 표지였다.

 

고인들은 어떻게 이름을 지었을까? 동한의 문자학자 허신(許愼)는 이렇게 말했다. 이름은 처음에 밤에 만났을 때 서로를 구분하기 위하여 나타났다. 그래서 <설문해자>에는 이렇게 "명(名), 자명야(自命也). 종구종석(從口從夕). 석자명야(夕者冥也). 명불상견(冥不相見), 고이구자명(故以口自名)"

 

고대에 일반적으로 아이가 3개월이 되면 부친이 이름을 지어준다. 이것은 <의례.상복>에서 말하는 소위 "고자생삼월(故子生三月), 즉부명지(則父名之)" '자(字)'를 짓는 것은 20세때 성인례(관례)를 행할때 한다. 주의할 점은 후세에는 그렇게 따지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적지 않은 경우에 아명(奶名)으로 짓고 6,7세가 되어 공부를 시작할 때 정식으로 이름을 짓기도 했다.

 

이름을 짓는데 관건은 좋은 글자를 고르는 것이다. 초기에는 비교적 간단했다. 은왕(殷王)은 고정적으로 천간(天干)을 이름에 넣었다. 나중에는 학문이 된다.

 

선진시기에 이름을 짓는데 대가는 노나라의 대부 신유(申繻)이다. 그는 이름을 짓는데 '오원칙'을 내놓았다: "신(信)이 있어야 하고, 의(義)가 있어야 하며, 상(象)이 있어야 하고, 가(假)가 있어야 하며, 류(類)가 있어야 한다" 이는 <좌전.환공6년>에 기록된 것이다. 당시 환공의 태자가 태어났는데, 신유에게 태자의 이름을 어떻게 지을지 물어보았을 때, 신유가 이렇게 말한다.

 

신유는 보다 구체적으로 이렇게 해석한다: "이명생위신(以名生爲信), 이덕명위의(以德命爲義), 이류명위상(以類命爲象), 취어물위가(取於物爲假), 취어부위류(取於父爲類)". '신,의,상,가,류' 이 이름짓는 기본원칙은 고대에 광범위한 영향을 미친다. 구체적으로 글자를 고를 때, 신유의 방법은 "불이국(不以國), 불이관(不以官), 불이산천(不以山川), 불이은질(不以隱疾), 불이축생(不以畜牲), 불이기폐(不以器幣)."했다.

 

공자의 이름은 구(丘)인데, 이것은 그의 부친이 '이류명위상'의 원칙에 따라 지은 것이다. 공자는 태어난 후에 정수리가 특별했다. 볼록했던 것이다. 소위 '우정(圩頂)'이다. 그래서 이름을 '구'로 한 것이다. 공자가 아들을 낳은 후, 마침 노소공(魯昭公)이 그에게 잉어(鯉魚) 한 마리를 하사했다. 그래서 아이의 이름을 '리(鯉)'로 한 것이다. 이는 '취어물위가'의 원칙에 따른 것이다.

 

신수의 이름짓는 사상은 선진시대의 이름짓는 풍속을 반영한다. 그 핵심은 '피휘(避諱)'이다. 중국봉건시대에 성명에서 피휘의 기풍은 아주 성행했다. 그 근원을 따지자면 선진시대이다.

 

한나라때는 외자(單字) 이름을 짓는 것이 유행하다.

 

한나라때의 이름짓는 것은 선진시대와 비교할 때 크게 바뀐다. 존로(尊老), 칭호, 신분, 품성등의 경겸미사(敬謙美辭)는 한인들이 이름을 짓는데 가장 먼저 선택하는 것이다. 선진인들은 백(伯), 중(仲), 숙(叔), 계(季) 4글자의 기초위에 원(元), 장(長), 차(次), 유(幼), 소(少), 공(公), 옹(翁), 군(君), 신(臣), 후(侯), 빈(賓), 사(士), 민(民), 랑(郞)등의 글자를 증가시켰다. 예를 들어, <염철론>의 집필자인 환관(桓寬)의 자는 '차공(次公)'이다. 한무제때 구경(九卿)에 올랐던 주매신(朱買臣)의 자는 '옹자(翁子)'이다.

 

한나라때 가장 선명한 이름의 특색은 외자이름이라는 것이다. 황실에서부터 일반백성에 이르기까지, 모두 외자를 좋아했다. 예를 들어, 한고조 유방, 한혜제 유영, 한문제 유항이 있다. 동서양한의 24명의 황제중에서, 한소제 유불릉(劉弗陵)만이 두자이름인데, 등극후에는 피휘를 고려하여 '릉'을 빼버리고 외자이름인 '불(弗)'로 개명한다.

 

외자이름을 취하는 유행은 후대에도 영향을 깊게 미친다. 당나라때 21명의 제왕 가운데, 오로지 당태종 이세민, 당현종 이융기가 두자이름을 취했을 뿐이다. 남송 및 이전의 황제도 대다수가 외자이름이었다. 명청 두 왕조에 이르러 외자이름이 냉대받는다. 명청왕조의 28명 황제중에서 외자이름은 명성조 주체(영락제) 한 사람뿐이다.

 

서한말기에, 왕망이 옛것을 숭상하기를 좋아하여, 외자이름을 짓는 것을 고례(古禮)에 맞는다고 보았다. 왕망의 영향하에, 외자이름을 짓는 것이 더욱 유행한다. 왜 한족들은 외자이름을 좋아했을까? 원래 당시에 이런 견해가 있었다. 두자이름은 천하고, 예수(禮數)에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런 '천명관(賤名觀)'은 선진시대에 이미 존재했다.

 

<춘추공양전.애공십삼년>에 이런 말이 있다: "진나라의 위만다(魏曼多)는 군대를 이끌고 위(衛)나라를 침범했다. 사람들은 그를 위만다라고 부르지 않고 위다(魏多)라고 불렀는데, 그거슨 두 자이름을 짓는 것은 꺼리고, 두자이름은 예수에 맞지 않는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명비례(二名非禮)"에 대하여 명말청초의 대학자 고염무가 이렇게 고증했다. <춘추공양전>에서는 '이명(二名)'의 뜻을 잘못 이해했다는 것이다. 즉, 한 사람이 두 가지 이름을 가진 것이 예수에 부합되지 않는다는 것이지, 두자이름을 갖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위진남북조인들은 "지(之)"자를 좋아하다

 

위진남북조시대가 되자, 두자이름을 짓는 기풍이 점점 고개를 든다. 이 시기에, 사람들이 이름을 짓는데에는 두 가지 특징이 있었다: 첫째는 조사 '지'가 가장 많이 쓰였다는 것이다. '지'자가 들어간 이름이 유행한다. 둘째는 부자, 장유간에 이름을 쓰는데 더 이상 피휘하지 않고, 이름 가운데 같은 글자가 나타나는 현상이 있었다는 것이다.

 

모두 잘알고 있는 왕희지(王羲之), 왕헌지(王獻之)는 부자간이다. 그들의 이름에는 모두 '지'자가 들어간다; 이것은 당시의 이름짓는 기호를 잘 보여준다. '지'자는 당시에 특히 사랑받았다. 지위가 높은 자, 권력이 큰 자, 특히 당시의 문벌사인들은 이름에 왕왕 '지"자를 붙였다. 이것은 엘리트계층을 나타내는 표지와 같았고, 체면이 있는 이름이었다.

 

예를 들어 <삼국지>에 주석을 단 남송의 문인은 배송지(裴松之)이고, 북위의 저명한 도사로 구겸지(寇謙之)가 있다. 이름에 모두 "지"가 들어간다. 당시 황족은 "지"자를 아주 좋아했다. 진선제의 동생, 안평헌왕은 사마부지(司馬孚之)이고, 아들인 여남왕은 사마량지(司馬亮之)이다. 후손중에 사마경지(司馬景之), 사마담지(司馬曇之)가 있다. "지"자가 이름에 들어간 것은 그 의미가 깊고, 문채(文采)도 있어, 지금까지도 사용하는 사람이 있다. 위진시대에 사람들이 '지'를 좋아하는데은 전통적인 이름의 피휘도차도 따지지 않을 정도였다.

 

"지"자는 원래 입교(入敎)의 암호였다. 입교자와 비입교자를 어떻게 구분할 것이며, 상대방이 나와 같은 신앙을 가졌는지 어떻게 구분할까? 구분은 바로 '지'자를 쓰느냐 아니냐에 있다. 부자, 조손, 형제가 모두 오두미교에 입교하면 이름에 모두 '지'자가 들어간다. 그래서 이런 현상이 나타난 것이다. 나중에 '오두미교'의 우두머리인 손은(孫恩)이 반란을 일으켜, 이름에 '지'자가 들어간 많은 사람들이 연루되고, 적지 않은 사람들이 피살당한다. 이것도 그런 추단을 증명해준다. 당연히, 당송이후에 사람이름에 더 이상 '지'자를 쓰지 않는다. 종교와는 관련이 없고, 그저 일종의 기호일 뿐이다.

 

위진남북조때, 사람들이 이름을 지을 때 확실히 종교적인 고려를 많이 했다. 당시 사람들이 이름을 지을 때 고르는 글자에서 '지'자 다음으로 많은 것은 '승(僧)'자이다. 예를 들어, 남조 양(梁)의 명장으로 왕승변(王僧辯)이 있고, 양무제때 의사 요승원(姚僧垣)이 있다.

 

송나라때의 이름에는 '오행', '팔자'를 고려한다.

 

당송시대, 사람들이 이름을 짓는 수법이 크게 변화한다. 여(予), 신(臣), 여(汝), 우(友)와 같은 류의 글자와 가(可), 여(如), 사(斯), 야(也)와 같은 어조사가 인기를 끈다.

 

송나라사람들은 복고적인 경향이 있었다. 한나라때의 존로자가 송나라사람들의 환영을 받는다. 노(老), 수(叟), 옹(翁)등의 글자가 자주 이름에 들어간다. 이름에서 확실히 '노기(老氣)'가 나타난다. <동경몽화록>의 작자는 맹원로(孟元老)이고; <학산집>의 작자는 위료옹(魏了翁)이다.

 

송나라 및 그 이후에 이름을 지을 때는 인위적으로 제한을 설정하는 것이 확실히 많아진다. 전통적인 피휘를 고려하는 외에, 이름을 지을 때 음양오행, 생진팔자, 생초속상, 오격부상, 팔괘육효등등을 고려한다. 그중 '생진팔자'와 '음양오행'을 이름에 넣는 것이 가장 유행했다.

 

소위 '팔자'는 '사주'라고도 한다. 즉 한 사람의 출생년,월,일,시의 간지로 구성된 연주,월주,일주,시주의 4주를 합치면 8글자가 된다. '오행'은 금,목,수,화,토의 5글자로 구성된다. 이는 다섯가지 물질을 대표한다.

 

'팔자'원리에 따라, 명(命)에 부족한 것이 있으면 이름을 지을 때 보완하는 것이다. 즉, 명에 '화(火0가 부족하면 이름을 지을 때 '화'자를 넣는다. 명태조 주원장의 후계자인 혜제의 이름은 '윤문(允炆)'인데, 바로 명에 화가 부족했기 때문에 이름을 지을 때 '불 화'를 포함한 '문'을 고른 것이다. 실제로 이는 미신이다. 혜제는 바로 불에 타서 죽어 황제의 보좌를 잃는다. 정난때 궁안에서 불을 질러 자결한다.

 

송나라때는 이름을 짓는데 큰 변화가 하나 발생하는데, 그것은 '자배취명제(子輩取名制)'가 유행하기 시작한 것이다. 중국의 족보중 가장 완전한 공씨족보는 바로 북송 원풍연간부터 편찬되었다.

 

자배취명은 '세대배명(世代排名)'이라고도 한다. 송나라이전에는 '자배취명'의 현상이 있었지만, 보편적이지는 않았다. 송나라이후, 이 취명방식은 고인이 이름을 짓는 주요한 수단이 된다. 같은 종족의 가은 배분이면 하나의 고정된 글자를 이름에 넣는 것이다.

 

명나라때, 자배취명제가 보편적으로 유행한다. 명혜제 주윤문의 이름에 '윤'자가 있는데, 이것이 배분자이다. 주원장이 자신의 아들에게 20글자의 배분자를 지어주었는데, 태자 일맥은 "윤문준조훈(允文遵祖訓), 흠무대군승(欽武大君勝), 순도의봉길(順道宜逢吉), 사량선용성(師良善用晟)"이다.

 

원나라때는 숫자를 이름에 넣는 것이 유행하다.

 

모든 왕조가운데 숫자이름은 원나라때 가장 유행한다.

 

원나마말기 반란군의 우두머리중 하나인 장사성(張士誠)의 원래 이름은 "구사(九四)"이다. '사성'은 한 독서인이 그에게 붙여준 이름이다. 전해지는 바로는 이 이름은 그를 욕하는 것이라고 한다. 이 말은 <맹자>에 나오는데, "사,성소인야(士, 誠小人也)"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이는 "사성,소인야"로 끊을 수도 있어서 암중으로 장사성이 무학무술한 소인배라고 욕하는 것이다.

 

이런 숫자로 이름을 짓는 풍속은 조정의 정책과 관련이 있었다. 원나라때, 한인의 서민으로 무직인 사람은 이름을 지을 수 없었다. 그저 배항(排行), 부모연령등을 칭호로 삼을 수 있었을 분이다. 이것은 고대에 성명을 규제한 특별한 사례이다.

 

이름은 기실 한 사람의 대호(代號)이다. 다만 이름 안에 동기, 정감, 기대등이 들어간 후에는 더 이상 간단한 대호가 아니다. 이름을 잘 지으면 사람의 일생에 영향을 줄 수 있다. 거꾸로이면 오히려 짐이 된다. 남송초기, 전당휴(錢唐休)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이름때문에 망친 사람이다. 당시 남송은 막 전당이라고도 불리는 임안(지금의 항주)을 수도로 정했는데, 장작의 <계륵편>에 따르면, 당시 재상이 전당휴를 추천했다고 한다. 그러나 송고종은 그의 이름이 불길하다고 기용하지 않았다.

 

당송이후, 사람들이 이름을 짓는데는 온당, 평안을 고려하고, 제왕, 나쁜 사람들과 같은 이름이 되는 것을 꺼렸다. 흉자(凶字), 나쁜 글자는 더 이상 쓰지 않는다. 북송 송휘종때, 강서 평락현에 "손권(孫權)"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삼국의 오나라국왕과 이름이 같았다. 그리하여 그는 반란을 꾀한다고 고발당한다. '우의참절(寓意僭竊)'이라는 것이다.

 

다르게 해석되지 않도록 하는 것도 고인들이 이름을 지을 때 주의한 부분이다. <명황영화류편>의 기록에 따르면, 학자중이 이름이 손일공(孫日恭)이라는 사람이 있는데, 영락제때 갑신 정시에 참가하여 1등을 한다. 영락제가 그의 이름을 본 후에 기분이 나빠진다. 왜냐하면, '일(日)'자와 '공(恭)'자를 합치면 '폭(暴)'자가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2등을 한 형관(邢寬)을 장원으로 끌어올리고, 손일공은 2등으로 내려버린다.

 

현대에는 겹치는 글자로 이름을 짓는 것(重字名)이 유행한다. 그러나, 고대에는 환영받지 못했다. 이름을 겹치게 쓰는 것은 "쌍명(雙名)"이라고도 부른다. 고인들이 보기에 이는 신분이 천박한 사람이 쓰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시첩, 청루여자들이 쌍명을 많이 쓴다. 원진의 첩은 '앵앵(鶯鶯)'이고, 진회명기중에 '진원원(陳圓圓)'이 있다. 여자의 쌍명을 읽으면 남자들에게 쾌감을 준다. 신분있는 사람 특히 남자는 중자명을 취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언급할 점은 고인들이 이름을 지을 때 우아하지 않은 글자를 피했을 뿐아니라, 성조에도 신경을 썼다. '쌍성첩운(雙聲疊韵)"의 글자를 사람의 이름에 넣으면 읽을 때 음절향량, 음운아측한 글자가 되어 뜻이 아무리 좋고, 구조가 아무리 아름다워도, 가급적 사용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