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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문화/중국의 풍속

중국고대의 식사와 바지의 관계

by 중은우시 2013. 9. 15.

글: 이개주(李開周)

 

 

 

중국인의 식사습관은 3가지 번혁을 겪었다.

아주 오랜 옛날에, 중국의 조상들은 식사때 분찬제(分餐制)를 취했다. 양식을 먹거나 일식을 먹을 때처럼 각자 자신의 것을 먹었다. 나중에 공찬제(共餐制)로 바뀌어 함께 나눠먹는 것으로 바뀐다.

아주 오랜 옛날에, 중국의 조상들은 유럽인과 마찬가지로 나이프와 포크를 썼다. 나중에 젓가락을 쓰는 것으로 바뀐다.

아주 오랜 옛날에, 중국의 조상들은 일본인들이 다다미에서 식사하는 것과 바찬가지로 식사했다. 나중에 식탁을 놓고 의자에 앉아서 식사하는 것으로 바뀐다.

 

이 3대개혁은 위진남북조때부터 시작되어 송나라때 완성된다. 바꾸어 말하면, 송나라때에 이르러, 중국인은 철저히 오래되고, 신선한 분찬제, 나이프와 포크를 쓰는 방식, 꿇어앉아 먹는 전통을 벗어나서, "현대화"된 식사방식으로 변신을 완성하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먼저 검토할 것은 중국의 조상들은 왜 꿇어앉아서 식사를 했을까 하는 점이다.

지금까지 전해져 내려오는 조각, 벽화 및 화상전(畵像塼)을 보면, 최소한 남북조이전에, 중국조상들이 식사를 할 때면 모두 석자(席子)나 낮은 상(床)에 꿇어 앉아 먹었다. 당나라와 오대십국때도 수구적인 사람들은 식사때 의자를 쓰지 않고 여전히 꿇어 앉아서 먹었다. 학자들은 일찌감치 이런 기이한 생활습속에 주목했다. 다만 사람들은 그렇게 했다는 것은 알아도, 왜 그렇게 했는지는 몰랐다. 아무도 당시에 왜 꿇어앉아서 식사를 했는지에 대하여는 말해주지 않았다.

 

도대체 왜 꿇어앉아서 먹었을가? 원인은 아주 간단하다. 발가벗은 맨몸이 드러나지 않게하기 위함이다.

옛날에 중국의 복식은 상의하상(上衣下裳), 상은 치마이다. 남녀를 불문하고 모두 치마를 입었다. 치마의 안에 내의를 입지 않았다. <서유기>의 손오공이 관세음보살의 앞에서 근두운(筋頭雲)을 뒤집지 않는데 그것은 바로 그의 호피치마의 아래는 완전히 비어있기 때문이다. 몸을 뒤집어 싸우면 하체가 드러나서 보살에 불경하기 때문이다.

 

상,주때, 포자(袍子)를 속옷으로 삼는 것을 배운다(나중에 포자는 겉옷으로 바뀐다). 상의하상의 안에 포자가 한층 더 생긴 것이다. 맨몸이 드러날 리스크가 줄어들었다.

춘추전국시대에 바지가 보급된다. 그러나 당시의 바지는 고당(袴襠)이 없었다. 심지어 고요(袴腰)조차 없었다. 왼쪽과 오른쪽의 두 다리를 덮었고, 중요한 곳은 여전히 비어있었다. 만일 한 사람이 두 다리를 뻗어서 땅 위에 앉는다면, 이는 하체를 노출시키는 것과 같았다.

고당의 발명은 아주 늦었다. 고고학적인 발견으로 보면, 최소한 동한이전에는 연당고(連襠袴)가 없었다. 어떤 사람은 한나라 궁녀들이 입은 궁고(窮绔)가 연당고라고 말한다. 그러나 잘못된 말이다. 궁고는 그저 개당고(開襠袴)에 몇 개의 연결단추를 붙인 것이므로 연당고라고 말할 수 없다). 그래서 동한이전의 어른들은 모임이나 식사때, 반드시 두 다리를 모아서 땅 위에 꿇고 있어야 했다. 그리고 겉옷을 내려뜨려서 중요부위를 가리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고인들이 꿇어앉은 자세로 식사를 하게 된 유래이다.

 

연당고는 동한이후에 발명된다. 위진남북조때 널리 사용되었다. 그래서 위진남북조부터 어떤 사람들은 꿇어앉아 식사하는 습관을 버리게 된다. 송나라때에 이르러서는 모든 사람들이 연당고를 입게 되므로, 식사를 할 때 의자에 앉는 습관이 들게 된 것이고, 더 이상 하체가 드러날까 걱정할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