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서세평(徐世平)
청나라때 문관의 최고시호인 '문정(文正)'을 받은 자는 모두 8명이고, 탕빈이 최초의 인물이다.
그러나, 이력을 보면, 탕빈이 관직은 겨우 예부상서, 공부상서이다. 유통훈(劉統勛), 주규(朱珪), 증국번(曾國藩), 이홍장(李鴻章)등과 같은 등급의 인물이 아니다. 장정옥(張廷玉), 왕걸(王傑)등은 공훈이 탁월하지면 사후에 '문정'이라는 시호를 받지 못했다. 탕빈이 무슨 덕과 능력이 있어, 만청 최초의 문정공이 되었는가. 그리고, 나머지 7명의 문정이라는 시호를 받은 사람은 모두 죽은 후 바로 문정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오로지 이 탕빈은 사후 꼬박 50년이 자니서, 건륭제에 의하여 문정이라는 시호를 받는다. 이것은 또 무슨 이유에서일까?
탕빈(1627-1687), 자는 공백(孔伯), 별호는 형현(荊峴), 나이든 후의 호는 잠암(潛庵)이다. 일반적인 평가는 그가 청초의 이학명신(理學名臣)이면서 청렴봉공(淸廉奉公)한 능신이다. 순치9년에 진사가 되어 명사 편찬에 참여하고, 강소순무, 명사총재관, 예부상서, 공부상서등의 관직에 있었다. 강희26년 돌연 병이 나서 사망한다. <청사고(淸史稿)>에 <탕빈전>이 있어, 그의 평생 업적을 기록한다.
탕빈과 관련한 역사적 평가는 대체로 3가지이다. 근정휼민(勤政恤民), 강정불아(剛正不阿), 치학유성(治學有成). 이것은 바로 그가 나중에 옹정제에 의하여 현량사에 뽑혀 들어가고, 건륭제에 의하여 문정이라는 시호를 받는 주요 이유가 된다.
첫째, 근정휼민, 청렴자율(淸廉自律)
탕빈은 전후로 섬서, 강서, 강소, 북경의 네 곳에서 12년간 관직에 있었다. 탕빈은 말했다: "공정하면 밝고, 청렴하면 위엄이 생긴다(公則明, 廉則威)"
탕빈이 강소순무를 맡을 때 현지의 수재상황을 보고하면서 강남일대의 부세를 면제해줄 것을 건의한다. 탕빈은 또한 선참후주(先斬後奏)로 관청의 창고를 열어 국고의 보관금 5만냥으로 현지의 이재민을 구제한 바 있다. 탕빈은 강소순무로 있을 때, 소북에 수천수만의 이재민이 소주로 밀려와서 질서가 아주 혼란스러웠다. 이 때는 마침 강희제가 남순중이었고, 소주에 곧 도착할 예정이었다. 양강총독등은 성안의 이재민이 길을 따라 누추한 건물을 지어서 살고 있어, 도로가 막히곤 했다. 그래서 민거(民居)를 철거하고자 한다. 길을 넓혀서, 황제의 가마가 통과하는 어도(御道)로 삼으려 했다. 탕빈은 그 소식을 들은 후, 즉시 이를 말린다. 강희제의 가마가 소주에 도착하여 성안으로 들어왔는데, 가도가 협소하여 교통이 막혔다. 그래서 탕빈을 불러서 묻는다. 탕빈은 강희제의 앞에서 보고한다. 황상은 민간의 고통을 잘 헤아리고 관심을 가졌기 때문에 남순을 했다. 만일 일시통행을 위하여 도로를 넓힌다면, 여러 민중들은 잠을 잘 곳이 없어진다. 이것은 황상의 본 뜻이 아닐 것이다. 탕빈의 이 말은 이치에 맞았고, 강희제는 만족한다. 탕빈은 민중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하여, 민거를 철거하지 않았고, 백성들의 사랑을 받는다. 탕빈이 강소순무를 맡은 2년후 예부상서로 승진한다. 이임하는 날, 소주의 백성들은 3일간 시장을 파하고, 통곡하며 만류한다. 그 정경은 정말 감동적이었다.
탕빈은 생활이 청빈했고, 그의 집은 판자로 문을 만들고 대나무로 울타리를 만들어 아주 누추했다. 전해지는 바로는 그가 죽었을 때, 집안에 겨우 8냥의 봉은(俸銀)이 남아 있었고, 관을 살 돈조차도 없었다고 한다. 탕빈은 관료로서 청렴했고, 황련(黃蓮)처럼 힘들게 살았다. 여름에, 전당포에서 낡은 장막을 사와서 썼고, 겨울에는 탕부인이 가마에 앉아 집문을 나설 때, 서북풍이 불면 낡은 목화솜(棉絮)이 가마의 주럼안에서 흩어져 나왔다. 탕빈에게는 4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2명은 부임지에 데려갔고, 첫째, 둘째는 수주(睢州)에 남겨두어 할머니를 모시게 했다. 야사에 따르면, 한번은 탕빈이 집을 보는데 장부에 '닭 한마리 구매"라고 쓰여있었다. 즉시 조사해서 알아보니, 노복이 대답한다. 큰 아들이 와서 사라고 했다고. 탕빈은 대노한다. 그의 큰아들 탕부(湯溥)를 불러서, 마당에 꿇어앉게 한 후, 엄히 훈계한다. 탕빈은 소주에 있는 동안 한번도 닭고기를 먹은 적이 없다고 한다. 그는 아들에게 이렇게 훈계했다: 세상에 어느 선비가 풀뿌리를 씹어먹을 줄 모르면서 큰 일을 해낸 적이 있는가?
대만소설가 고양(高陽)은 탕빈을 "천하청관제일(天下淸官第一)"이라고 불렀다. 심지어 탕빈은 강희성세 '청관책'의 제일인이라고 했다. 비록 사료에 증거가 없지만, 어느 정도 이치에 맞는다. 탕빈은 청관이고, 확실히 아주 유명했다. 그는 당시의 저명한 청렴한 관리 우성룡과 나란히 이름을 떨쳤다.
둘째, 불외권귀(不畏權貴), 강정불아(剛正不阿)
순치12년, 탕빈은 섬서동관도를 맡는다. 그는 봉록을 가지고 3마리의 노새를 산다. 한마리에는 두 세트의 낡은 요와 이불과 죽서상(竹書箱)을 싣는다. 그리고 주인과 노복 두 사람이 각각 한 마리씩 타고 간다. 마치 가난한 선비가 과거시험보러 가는 것처럼. 동관에 도착하여, 탕빈은 동관을 지키는 파총(把總)에게 신분을 말한다. 파총은 그들 주인과 노복의 행색을 보니 비쩍 말라 있고, 짐도 별로 없으니, 고개를 흔들며 말한다: "당신은 솥에 넣고 삶아도 관리같은 맛은 전혀 나지 않는다" 그러나, 바로 이 삶아도 관리맛이 나지 않는 그가 바로 사품 도원이었다. 부임한지 3달도 되지 않아, 동관의 각 주현의 토호열신(土豪劣紳)들은 더 이상 나쁜 짓을 감히 하지 못하게 되고, 지방깡패들도 수그러든다. 백성들은 편안하게 생업에 종사할 수 있었다 ."탕청천(湯靑天)"이라는 칭송이 고을에 자자했다.
탕빈이 강소순무를 맡고 있을 때, 강소의 상방산에 '오통신사(五通神祠)"라는 사당이 있었다. 민간의 전설에 따르면 여기에 가서 빌면 소원을 다 들어준다고 하였고, 아주 영험하다고 했다. 사서에 따르면, "수백년간 원근에서 사람들이 가득 몰려왔고, 속담에는 그 산을 가리켜 '육산(肉山)'이라고 부르고 그 아래 석호를 '주해(酒海)'라고 부른다고 했다." 현지인들은 무당의 말을 맹신했다. 탕빈은 이에 대하여 아주 분노한다. 그래서 상소를 올려 신사를 철거하겠다고 요청한다. 무당은 그 말을 듣고는 두렵기도 하고 원망도 했다. 그래서 사람들을 움직여 반대여론을 조성한다. 현지 백성들은 신령을 믿으면서도 탕빈이 백성을 위하여 한 업적을 존경해서 속속 탕빈에게 몰려와서 사당을 철거하지 말라고 권한다. 그러나 탕빈은 고집을 부려서 밀어부친다. 사당을 철거하는 날, 수천수만의 백성들이 향을 태우며 나와서 길을 막는다. 어떤 사람은 땅바닥에 무릎을 꿇고 애원했다. 탕빈은 전혀 흔들리지 않고, "당빈은 그 우상을 거두어 나무로 된 것은 태우고, 흙으로 된 것은 물에 빠트렸다." 이렇게 직접 '오통신사'를 철거해버린 것이다.
탕빈은 권력귀족들에게 영합하지 않는 것으로도 유명했다. 당시는 명주(明珠)가 조정의 권력을 장악하고 있었는데, 지방관리들은 속속 명주에게 선물을 보냈다. 오로지 탕빈만 보내지 않았다. 강희25년, 하도를 수리하는 것을 놓고 논쟁이 일어난다. 탕빈은 정의를 세운다는 입장에서 발언을 하여, 명주의 진노를 산다. 그리하여 명주와 그 일당의 모함을 받는다. 탕빈은 소주에 임직하고 있는데 일찌기 이렇게 평가받은 바 있다.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은 있으나, 백성을 구하는 방법은 없다." 명주는 이를 가지고 그를 모함한다. 황상을 비방했다는 이유로 그를 탄핵한 것이다. 탕빈은 일생동안 광명정대하게 살았고, 근정청렴했다. 그래서 여러번 권력귀족들의 모함을 받는다. 일련의 타격에 오랫동안 제대로 먹지 못하여 영양불량으로 강희26년, 공부상서로 옮겨온지 1달도 되지 않아 탕빈은 집에서 병사한다.
셋째, 치학유방(治學有方), 저술파풍(著述頗豊)
탕빈은 일생동안 학문으로 천하를 다스리고, 학문으로 시비를 판별하고, 학문으로 후배를 가르쳤다. 그는 이학(理學)의 혁신자일 뿐아니라, 이학의 실천자이다. 그는 1660년 고향으로 돌아가서 부모상을 한 때로부터 근 20년간 관직에 나오지 않고 학문을 열심히 연구한다. 그는 <잠암어록>, <잠암문초>, <춘추증주>등 십여부의 책을 쓴다. 동시에 그는 자식을 잘 가르쳐서, 4명의 아들 탕부, 탕준(湯浚), 탕항(湯沆), 탕준(湯準)등 은 모두 글재주가 뛰어났다. 넷째아들 탕준은 <임의원시집>이 있다.
그러나, 탕빈의 이런 사적은 큰 업적이라고 할 수는 없다. 청왕조때, 이런 사람은 적지 않다. 옹정과 건륭이 탕빈을 선택하여, 사후 46년만에 현량사에 넣고, 50년만에 문정이라는 시호를 내린다. 당연히 더욱 깊은 단계의 역사적 원인이 있을 것이다.
모두 알고 있다시피, 청나라가 중원을 들어와 차지한 후, 당시의 절대다수의 한족지식분자들은 청나라에서 관직을 맡지 않는 기개를 지니고 있었다. 특히 강소절강의 문인들이 심했다. 예를 들어, 저명한 고염무(1613-1682), 황종희(1610-1695), 만사동(萬斯同, 1638-1702), 주지유(朱之瑜, 1600-1682)등은 모두 대학자이면서 항청명사들로 민족기개를 유지했고, 대의를 지켜냈다. 그러나, 일부 사람들은 앞장서서 청나라의 관직을 받는다. 탕빈은 그 중의 한 사람이다. 당시에 유명한 사람으로는 우성룡등이 있다.
<청사고>에 따르면, "명나라말기의 유적들이 수주를 함락시키고, 모친 조순을 절개를 지켜 죽는다. 이 일은 모두 명사 열녀전에 쓰여 있다. 부친 계조는 탕빈을 데리고 병란을 피해 절강 구주(衢州)로 간다. 순치2년, 부친을 모시고 고향으로 돌아간다. 9년, 진사가 되고, 서길사에 뽑히고, 국사원검토의 직위를 받는다." 탕빈, 우성룡의 이러한 행위는 당시 한족 문인들로부터 멸시를 받는 행동이었다. 그러나, 만청통치자에 있어서, 이들은 상당히 필요했다. 그들은 모범사례를 만들 필요가 있었다. 영향력있는 문인들이 그들의 정부에 들어와 봉사하게 만들 필요가 있었다.
탕빈은 두 번 명사편찬작업에 참여한 바 있다. 한번은 순치연간에 그는 관련업무참여자였다. 강희21년, 탕빈은 명사총재관을 맡는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탕빈은 대청왕조의 통치를 안정시키는데 큰 공을 세운다. 그중 가장 중요한 항목은 바로 문화통치이다. 당시, <명사>편찬을 둘러싸고 투쟁이 격렬했고 심지어 혈안(血案)까지 일어난다. 장정룡, 대명세등 혈기왕성한 한인지식인은 역사의 진실한 면목을 남기고자, 고귀한 목숨을 희생한다. 당시, 한족의 전적은 여러번 금지되거나 폐기되거나 일부훼손되어 만싱창이가 된다. 그리고 명나라의 전적은 중수(重修)라는 명목으로 삭제수정한다. 전적을 검색해보면 왕왕 전부가 아니라 일부이거나 심지어 왜곡되어 있다. 노신은 나중에 한마디로 이를 간파한다. 천하의 후세들이 만일 <사고전서>같은 류를 본다면, "영원히 우리 중국의 작자들 중에 일찌기 기개가 있는 사람이 있었다는 것을 알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탕빈은 전혀 달랐다. 그는 만청통치자에 절대적으로 신복했고, 모든 일에서 조정의 뜻을 중시하였고, 심지어 '음예소설(淫穢小說)'이라는 명목으로 문화출판물을 분훼(焚毁)한다. 이 점으로 그는 통치자들의 환심을 한다.
그가 죽은지 46년이 지나서, 탕빈은 옹정제에 의하여 새로 표창된다. 탕빈을 청나라초기 문화숙청과정에서 뛰어난 활약을 보인데 기초한 것이다.
옹정10년(1732년), 탕빈은 '현량사'에 입사된다. 청나라때, 현량사에 들어간 사람은 모두 175명이다. 많은 사람은 공헌이 있는 만주족 귀족이고 한족은 소수이다. 입사자들은 대부분 높은 관직을 누린다. 예를 들어, 태부(太傅), 태보(太保), 소보(少保), 대학사(大學士)등이다. 이들과 비교하면, 탕빈의 직급은 비교적 낮다. 그런데 그가 어찌 현량사에 입사될 수 있었을까? 이는 당시의 역사배경과 정치배경을 보아야 한다. 그때, 만청은 '문자옥(文字獄)'을 크게 일으킬 때였다. 옹정제는 사상분야의 통치를 강화하기 위하여 대량의 억울한 문자옥을 만들어낸다. 예를 들어, 저명한 '여유량사건'이 있다. 여유량이 죽은 후 여러 해가 지나서 부관참시한다. 많은 한족 지식인들이 박해를 당한다. 여유량은 탕빈과 동시대인 명말청초의 저명한 이학자이다. 그는 명나라가 망한 후 죽어도 청왕조에서 벼슬을 하지 않겠다고 맹세한다. 삼림이 은거하고, 삭발하여 중이 되며, 저술에 힘을 쏟는다. 일찌기 저명한 싯구인 "청풍수세난취아(淸風雖細難吹我) 명월하상부조인(明月何嘗不照人)"를 쓴 바 있다. 한편으로 문자옥이 성행하고, 다른 한편으로, 옹정은 '긍정적인 이미지'를 수립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탕빈과 같이 솔선하여 만청에서 벼슬을 한 한족 고급지식분자를 극력 만청문화정책을 일으킨 문화명인으로 고취시켜야 했다. 자연히 그는 만청에서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의 목표가 된다.
건륭원년(1736년), 탕빈은 건륭제에 의하여 다시 한단계 더 올라간다. 건륭제는 그에게 '문정'이라는 시호를 내린 것이다. 중국역사상 문인들이 관직에 있으면서 꿈에도 바라는 시호는 바로 '문정'이다. 문정이라는 시호는 바로 문인들이 바라마지않는 부호인 것이다. 문정이라는 시호는 과거에 문헌(文獻) 혹은 문정(文貞)이라고 불린 바 있다. 예를 들어 동진의 왕도는 시호가 문헌이다. 당나라의 위징등은 시호가 문정(文貞)이다. 북송때 송인종 조정(趙禎)의 이름을 피휘하여, '문정(文正)'으로 바꾼다. 사마광은 이렇게 말한다: "문정은 시호중 극미(極美)한 것으로 더 이상 높을 수가 없다." 문인도덕의 최고점으로 인정되는 것이다. 청나라에서 문정이라는 시호를 내린 것은 건륭제때부터이다. 그가 문정이라는 시호를 탕빈같은 한족문인에게 내린 것은 나름대로 목적이 있을 것이다. 즉 대청에 귀순한 문인의 글이야 말로 바른 글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청나라때 문정이라는 시호를 받은 자는 모두 한족이다. 이것은 바로 그런 문제를 설명한다.
그러므로, 탕빈은 청나라에서 문정이라는 시호를 최초로 받은 인물이 된다. 상황은 확실히 특수하다. 건륭이 의도도 분명하다. 탕빈을 모범으로 내세워서 한족을 회유하려는 정치적 목적이다. 추용(鄒容)의 말에 따르면, "인중수현(人中雖賢, 사람들 중 현명하다는 사람)"한 사람이라는 것은 실제로 "순정노예(馴靜奴隸, 노예로 길들여진 사람)"일 뿐이다. 탕빈이 죽은 후, 그의 묘지명은 고향사람인 전란방(田蘭芳)이 글을 쓰고, 오학호(吳學顥)가 전각을 했다. 두 사람은 모두 평민학자들이다. 직급이 비교적 낮다. ㅡㄴ본적으로 어제어장(御製御葬)의 규격과는 맞지 않는다. 이를 보면 탕빈은 확실히 정치적인 필요때문에 고의로 받들어진 것임을 알 수 있다.
탕빈이 죽은 후, 영릉현 황강향 기오성촌 촌의 남쪽에 매장한다. 이 가족묘지에는 탕빈과 그의 네 아들, 조카 1명이 묻혀 있다. 탕빈의 묘지명은 현재 상구시박물관에 보존하고 있으면서 참관할 수 있다. 탕빈의 후대는 아주 번성해서 전세계에 분포되어 있다. 탕씨종친회도 있고, 매년 영릉묘에 와서 제사를 지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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