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정만군(程萬軍)
대명왕조때의 중국은 혈성(血性)이 있었다. 송나라때처럼 토지와 금전을 주고 평화를 사는 치욕적인 기록은 없다. 다만, 이 한족왕조는 결국 외족의 손에 멸망한다. 북송과 마찬가지로 여진의 손에 멸망한다. 그리고 북송보다도 훨씬 비참하게 망한다. 북송은 장강이북의 반벽강산을 잃었지만, 대명왕조는 전체 중국을 잃는다. 이것은 무엇때문일까?
사료기록에 따르면, 도르곤은 건주여진 팔기군을 이끌고 입관할 때(산해관을 들어올때), 겨우 6만부락의 군대를 이끌고, 근 1억인구를 지니고, 백만대군을 지닌 대명왕조를 집어삼키고 전중국을 통치했다. 이것은 당초에 그들 자신조차도 생각지 못했던 일이다. 후기에 남명을 친 것은 대부분 만청에 투항한 한족군대였다. 이를 보면, 명나라때 한민족의 정신상태는 도대체 어떤 지경에 처해 있었던 것일까?
<남명사>기록에 따르면, 남명이 멸망하기 전에, 한 거지가 남명의 백관이 향을 사르며 만주병사들이 성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영접하는 것을 보면서, 엄청나게 화가 나서, 시를 지어 다리에 쓰고는 강에 몸을 던져 죽었다고 한다. 시는 이러하다:
삼백년래양사조(三百年來養士朝)
여하문무진개도(如何文武盡皆逃)
강상류재비전원(綱常留在卑田院)
걸개수류명일조(乞丐羞留命一條)
이 시는 어떤 의미인가? 대명왕조가 사대부를 삼백년이나 길렀는데 마지막에는 모조리 삶을 탐하고 죽음을 겁내는 무리가 남았다. 우리처럼 구걸하는 자들도 너희 관리들보다는 체면을 중시하여, 더 이상 이런 후안무치한 세상에는 살아가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대명왕조가 무너진 내부적 원인에 관하여, 극도의 황권에서 환관난정에 이르기까지 사서에는 충분히 많이 기록하고 있다. 다만, 다른 왕조와 비교하여, 명나라에게는 한 가지 더 문제가 있었다. 사람들이 중시하지 않기는 하지만, 이 문제는 명나라의 특색에서 숨어있는 해악이었다.
그것은 바로 '청류의 해(淸流之害)"이다.
"청류"는 명나라 전기 중기에는 좋은 뜻으로 쓰였다. 청류에 대하여, 고염무는 <일지록>에서 '청의(淸議)'라는 조를 남겼는데, 긍정적인 이미지로 묘사했다. 정의늠연하고, 애증이 분명하고, 시비가 분명하고, 절대로 중간적인 입장을 취하지 않는 것이다. 그들은 몸가짐을 단정하게 하고, 절대로 술자리에서 이쪽 저쪽에 듣기 좋은 소리만 하는 화사로(和事佬)가 아니다. 그들은 진흙속에서도 물들지 않았고, 절대로 진흙과 섞이지 않았다.
명나라 역사에서 '청류'는 천고에 그 빛을 비춘 사람으로 전자는 '양수청풍(兩袖淸風)'의 '우겸(于謙)'이고, 후자는 '군자위정(君子爲政)'의 동림당인(東林黨人)'이다.
우겸의 주요 업적은 명나라와 몽골 오이라트부와 교전하다가, 명영종이 토목보에서 포로로 잡힌 위기의 순간에, 단연코 상권욕국의 요구를 거절하고, 따로 새로운 황제를 세워서 오이라트를 이긴다. 이를 통하여 악비와 나란히 이름을 떨치는 '서호삼걸(西湖三傑)'이라는 아름다운 명예를 얻는다.
동림당인의 영광은 화국앙민(禍國殃民)의 엄당과 죽기를 각오하고 싸운 것이다. 아홉번 죽더라도 후회하지 않는 정신으로.
다만 명나라 후기, 청류는 조정내부에서 점점 '좋지 않은 뜻'으로 쓰인다.
청류가 좋은 뜻에서 좋지 않은 뜻으로 바뀐 것은 간단하게 세력을 잃었다는 것으로 설명할 수 없다. 그들의 성질이 이미 변화한 것이다. 전기의 청류는 스스로 모범을 보이고 살신성인하는 신앙집단이었다면, 후기의 청류는 다른 사람을 죽여서 스스로를 이루려는 이익집단이었다.
청나라병사들이 입관할 때 고담준론을 벌이던 청류의 행동은 사람들을 크게 실망시킨다. 자신을 지키려는 사람은 많았지만 나라를 구하려는 사람은 적었다. 입만 열면 '대의'를 논하던 청류는 만청의 칼아래 기개를 보인 사람은 적었다. 대부분은 모두 '옛날 옷을 벗고 새 옷으로 갈아입으며', 앞장서서 '체두변발'을 한다. 당시 청류의 대표인물인 전겸익(錢謙益), 후방역(侯方域)의 두 일로일소의 행동을 보면 후기 '청류'가 어떤 민낯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청나라병사들이 입관할 때, 복왕 주유송은 남경에 남명 홍광 소조정을 구성한다. 유여시(柳如是)는 전겸익이 예부상서를 맡는 것을 지지한다. 얼마후 청나라병사들이 남하하자, 홍광조정은 멸망한다. 유여시는 전겸익에게 그녀와 함께 물에 몸을 던져 순국하자고 권한다. 전겸익은 그러나, "물이 너무 차가워 들어갈 수 없다(水太冷, 不能下)"는 이유를 대며 따르지 않는다. 오히려 청나라병사가 남경에 입성할 때 앞장서서 투항하고 청나라조정의 예부시랑이 된다.
명나라가 망하고 청나라가 들어서며, 청나라정부가 정권을 공고히 할 때 회시를 거행한다. 기개있던 한족 지식분자들은 참가하지 않았다. 그러나 후방역은 평생 가장 한탄할 일을 저지른다: 한 마음으로 "용문삼척랑(龍門三尺浪), 평지일춘뢰(平地一春雷)"가 되고 싶어했던 그는 더이상 적막을 참지 못하고 순치8년의 향시에 참가한다. 그러나 '부방(副榜)'에 이름을 올리는 수모를 겪는다....
외적이 쳐들어올 때, 청루여자 이향군(李香君)은 순국의 뜻을 품었지만, 애인인 후방역은 매국구영(賣國求榮)하고자 했다. '청류'의 기개는 '청루'만 못했다. 이렇게 정신을 비교해보면 후인들로서는 탄식하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은 충분히 설명해준다. 동림당의 후계자로 자처하는 후방역과 전겸익등이 만든 청류 복사(復社)는 기실 일찌감치 청류의 정신에서 벗어나서 완전히 맛이 갔다는 것이다. 그저 독서인들이 조정에 올라가는 디딤돌로 삼았을 뿐이다.
왜 정의늠연한 청류지사가 후기에는 도모안연(道貌岸然)의 거짓군자로 바뀌었을까?
이것은 바로 화하(華夏)의 실혈(失血) 때문이다. 그 근본을 따져보면, 명나라의 극도로 변태적인 전제제도에서 답안을 찾아야 한다. 거짓군자는 어느 때나 존재했다. 명나라때 거짓군자가 다른 어느 왕조보다 성행한 것에는 또 다른 한 가지 요소가 있다. 그것은 바로 최고통치자가 '무뢰한'인 경우가 많았던 것이다. 명나라의 황제는 폭군이 아니면 병부(病夫)였다. 생리적인 장애인이 아니면 심리적인 장애인이었다. 이것이 바로 거짓군자를 탄생시킨 내부적 요인이다. 변태적인 체제, 변태적인 황제, '거세'된 문명이다. 이렇게 많은 무뢰한이 이끄는 국가에는 그저 창백한 '거짓군자'만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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