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문방장궤(文房掌櫃)
진시황의 일생은 수수께끼로 가득하다. 여러 수수께끼들 중에서 가장 심원한 의안의 하나는 그의 후궁이 도대체 누구냐는 것이다.
중국의 역대왕조의 황제는 후궁에 대하여 모두 기록이 남아있다. 특히 황후에 대하여는 모의천하의 퍼스트레이디로서 제도상으로도 따로 규정을 두었으며, 크고 특별하게 기록을 남겼으며, 비석도 세우고 사서에 전기도 남긴다. 진시황은 중국역사상 첫번째 황제이다. 그의 황후 즉 시황후가 누구인가라는 문제에 관하여 사서에는 전혀 기록이 없다. 2천년동안 아무도 알지 못했다. 이것은 기괴한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기괴한 일은 이것만이 아니다. 만일 진시황의 황후 즉 시황후가 누구냐는 것에 대하여 사서에서 잊고 기록하지 않을 수 있다. 혹은 모종의 원인으로 쓰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그만이다. 더욱 기괴한 것은 시황후 외에 진시황의 후궁에 관한 모든 소식이 사서에 거의 기록되어 있지 않은 점이다. 이천년이래로 아무도 알지 못했다. 이것은 기괴한 일일 뿐아니라, 아주 비정상적인 역사의 수수께끼이다. 역사탐정에 있어서 이것은 반드시 해결해야할 사건인 것이다.
2007년 3월, 필자는 진시황의 조모인 하태후의 묘장이 발굴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래서 일부러 두번이나 시안으로 가보았다. 그리고 이 진시황과 관계있는 여성의 유적을 고찰했다. 필자는 진동릉을 가서, 진시황의 조부인 효문왕와 양조모인 화양태후, 부친인 장양왕과 모친인 제태후(帝太后)의 묘장을 찾았다. 진왕과 왕후는 모두 부부를 한곳에 합장했다. 음양상배(陰陽相配)로 정리에 맞고, 제도에 맞는다. 친조모인 하태후와 고조모인 선태후의 묘도 규모가 큰 편이다. 그러나, 두 태후는 모두 측실이었고, 정실이 아니었으므로, 다른 곳에 매장되었다. 모든 것은 질서정연하고, 전통에도 맞고, 예제에도 맞는다. 오로지 진시황릉은 외롭게 떨여져 있는 큰 묘이다. 황후의 묘가 곁에 없다. 그 고독하고 홀로 서있는 모습은 실제로 누가 시황후인지의 역사적 의문을 고고실물로 보여준다. 도대체 시황후묘는 있는 것일까 아닐가. 만일 있다면 시황후묘는 도대체 어디에 있는가?
진시황의 비밀을 깊이 파고 들어갈수록 의문은 더욱 깊어진다. 이런 의문들에 대하여 사실이 분명하지 않고 진상이 명확하지 않으므로 여러가지 추측과 가설이 나타나게 되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추측하여 말한다. 진시황은 아마도 황후를 두지 않았을 것이다. 그가 황후를 두지 않은 것은 후궁이 너무 많아서, 결정을 내리지 못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조금만 머리를 굴리면 알 수 있다. 후궁이 얼마나 많은지는 진나라와 역대이래로 모두 제도가 있고, 규정이 있다. 황후를 두느냐 아니냐와는 아무런 직접적인 관계가 없다. 황후를 두는 것은 왕위계승의 질서를 위함이다. 후궁의 질서를 위함이다. 후궁이 많든 적든 그것은 관계가 크지 않은 것이다. 이런 주장은 너무나 비전문가적이고, 학설로 대접해주기는 민망하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추측하여 말한다. 진시황은 방사를 믿고 장생불사를 추구했다. 이런 기대에 대한 특수한 요구로 황후를 세우는 것이 계속 늦어지게 된 것이다 운운. 그러나, 사서를 찾아보면 알 수 있다. 진시황이 방사를 믿어 장생불사를 추구하였는데, 그것은 천하통일후 말년에 발생한 일이다. 진나라의 전통과 제도로 보면, 진왕이 정식으로 황후를 두어야 하는 것은 친정을 시작한지 얼마되지 않아서여야 한다. 대체로 20여세인 청장년시기이다. 어찌 4,5십세까지 기다려야 한단 말인가. 나이들고 쇠약해진 후에 황후를 두는 것은 조종들이 허락하지 않는다. 신하들도 일찌감치 난리를 피웠을 것이다. 이런 추측도 말이 되지 않는다.
또 어떤 사람은 이렇게 추측하여 말한다. 진시황의 모친이 사생활이 지저분하고, 면수(남총)를 두었으며 두 명의 사생아도 낳았다. 이런 일이 진시황에게 큰 영향을 미쳐 그는 모친을 경성에서 쫓아내고, 모친을 원망하는 것이 여인을 미워하는 것으로 발전해서, 일종의 심리적 장애가 되었다. 그래서 그는 황후를 계속 두지 않은 것이다. 맞다. 진시황의 모친은 확실히 면수 노애를 두었고, 사생아를 낳아 길렀다. 진시황도 확실히 그의 모친을 미워했다. 그래서 그녀를 경성에서 쫓아내 버렸다. 그러나, 노애의 일은 직접적으로 그의 모친과 양조모 화양태후간의 정치투쟁에 관련된다. 그는 사후에 책사의 권고를 듣고는 정권을 안정시키고 계승관계를 안정시키려는 고려에서, 신속히 모친을 다시 모셔온다. 그리고 진왕과 태후의 정상적인 모자관계를 회복한다. 진시황은 일류의 정치가이다. 그의 행위에서 첫번째로 고려하는 것은 정치적인 각도이다.
하물며, 진나라역사상, 태후가 면수를 두고 자식을 낳은 일은 아주 많다. 그의 고조모인 선태후는 진나라로 온 외국인 의거왕과의 사이에 두 아들을 낳는다. 선태후의 아들, 진시황의 증조부인 진소왕은 이 일을 알았을 뿐아니라, 모친과 모의하여, 이런 사적관계를 이용하여 의거왕을 암살한다. 그리고 의거왕의 병사를 진나라에 편입시킨다. 이렇게 하여 여러 해동안 진나라를 위협하던 서북변경의 심복대환을 제거하게 된다. 진소황은 일찌감치 선태후의 주재하에 황후를 두었다. 후궁도 적지 않았고, 자녀도 많았다. 무슨 심리적인 장애를 볼 수 없을 뿐아니라, 오히려 실리와 인정이 농후하다. 도덕의 구속은 희박한 옛날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태후의 사생활은 진왕이 황후를 두느냐아니냐의 문제와 실로 무슨 관계를 찾아보기 어렵다. 이런 추측은 듣기는 좋지만, 말이 되지는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다. 이상의 추측들은 모두 억지스러운 억측이라고. 왜냐하면 수수께끼를 풀 단서를 찾지 못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현상을 받아들이는 것이고, 거기에 약간 장식을 위한 칠을 가미한 것일 뿐이기 때문이다. 구체적인 역사적 사실에 연결되어 이치에도 맞고 증거도 있는 수수께끼해결이 되지 못한다. 그렇다면 해결의 열쇠는 어디에 있을까?
정사에는 기록이 없다. 그렇다면 야사에서는 어떻게 말하는가? 현재까지의 자료로 보면, 진왕의 황후에 관한 설은 주로 다음의 몇 가지 판본이 있다: 공손옥(公孫玉, <진시황대전>), 민대공주(敏代公主, <부소의 모친>), 아약공주(阿若公主, 호해의 그 모친), 그리고 그가 좋아한 아방(阿房)이라든지 여강(黎姜)이라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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