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진시황)

진시황이 죽기전에 나타난 3대이상징조(三大異兆)

중은우시 2016. 7. 17. 01:10

글: 촉인삼척안(蜀人三隻眼)


중국역사상 최초의 황제인 진시황은 전설적인 색채가 짙다. 6국을 소멸시키고 중국역사상 최초의 대통일을 완성한다. 필생동안 고도의 권력집중을 추구했던 진시황에게는 더 걱정할 일이 없었다. 대통일후, 나이가 거의 반백이 된 진시황은 어떻게 하여야 장생불로할 수 있을지와 대대손손 자신의 통치지위를 어떻게 유지할 수있을지를 연구하기 시작한다.


진시황36억(기원전211년) 연이어 3건의 진시황을 좌불안석하게 만드는 사정이 연이어 발생한다. 바로 이런 배경하에서, 진시황은 흉상(凶相)을 해소시키기 위하여, 흉(凶)을 길(吉)로 바꾸기 위하여 제5차 순유를 시작한다.


이상징조 첫째: "형혹수심(熒惑守心)"


<사기. 진시황본기>의 기록에 따르면, "삼십육년, 형속수심"이라고 되어 있다. 이 "형혹수심"은 도대체 무슨 뜻인가? 중국고대는 천문학을 성점학(星占學)으로 했다. 성점학가는 '화성(火星)'을 '형혹'이라고 불렀다. 이십팔수(二十八宿)의 '심수(心宿)'은 약칭하여 '심(心)'이라고 부른다. 즉, '천갈좌(天蝎座, 전갈자리)'를 가리킨다. 이 별자리는 천체의 주로 3개의 별로 구성된다. 화성이 이 세개의 별 부근으로 운행할 때가 바로 고대인들이 말하는 '형혹수심'의 천체현상이다. 전갈자리를 구성하는 3개의 별중에서 가장 밝은 별은 황제에 비유되었고, 곁에 있는 두 개의 별은 태자와 서자로 인식되었다. 화성이 대표하는 불은 바로 '큰 재난'의 상징이다. '형혹수심'은 가벼우면 태자가 자리를 잃고, 무거우면 황제가 사망한다는 의미였다.


이상징조 둘째: 운석낙하사건


사료의 기재에 다르면, 진시황삼십육년, 운석 하나가 동군(東郡)에 낙하한다. 이 운석이 추락한 것은 아무 것도 아니다. 기괴한 것은 이 운석 위에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는 것이다: "진시황사이지분(秦始皇死而地分)" 누군가 이 운석을 주워서 그 위에 쓰인 글자를 보고 즉시 지방관리에게 바친다. 관리는 놀라서 즉시 차례차례 상급기관에 보고하여 결국 진시황이 이 일을 알게 된다. 그는 대노하여 어사를 보내어 운석에 글자를 새긴 사람을 찾는다. 그러나 아무런 성과도 없었다. 마지막으로 진시황은 명을 내려 이 운석이 추락한 지점 주위의 모든 사람을 죽이라고 한다. 그리고 사람을 보내어 이 운석을 바로 불태워없앤다. 사람도 죽고, 돌도 불타버렸다. 그러나 진시황의 마음 속에는 그림자가 남는다.


이상징조 셋째: 침벽(沉璧)사건


진시황삼십육년, 또 하나의 괴이한 일이 벌어진다. 진시황이 보낸 사자가 밤길을 걷고 있는데, 옥벽을 지닌 사람이 그를 막았고, 옥벽을 그 사자의 손에 쥐어 주었다. 입으로는 이런 말을 했다: 금년에 조룡이 죽는다(今年祖龍死). 사자는 그 말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여 그 괴이한 사람에게 무슨 뜻인지 묻는다. 그리고 그 괴인이 돌연 자신의 눈앞에서 사라졌다는 것을 발견한다. 도대체 무슨 일인지 이해하지 못한 사자는 일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느끼고 즉시 옥벽을 가지고 진시황을 만난다. 진시황은 사람을 시켜 이 옥벽을 감정한다. 감정결과 이 옥벽은 진시황28년(기원전219년) 그가 장강을 건너면서 수신(水神)에게 제사지낼 때 강물 속에 던졌던 바로 그것이었다! 진시황은 온 몸에 식은 땀이 났다. 진시황은 명을 내려 3만호의 백성을 함양에서 북하, 유중지구로 이주하게 한다. 그리고 기원전210년, 순유의 역정을 시작한다.


기원전210년 7월, 문치무공(文治武功)의 진시황은 돌연 사구(沙丘)에서 사망한다. 즉 오늘날의 하북성 광종현 경내이다. 그는 젊은 나이로 죽었는데, 이는 직접 진왕조의 흥망성쇠에 영향을 미친다. 또한 중국역사의 방향을 바꾼다. 중국최초의 황제가 죽었다. 이는 당연히 아주 중대한 일이다. 그의 사인에 관하여 후세에 여러가지 설이 분분하고 일치되지 않는다. 주로 두 가지 견해가 있다. 하나는 피로가 겹쳐서 병이 되었다는 것으로 '과로사'라고 본다. 다른 하나는 역자모살(逆子謀殺)이다.


전자의 견해에 따르면, 진시황은 "경공노루(驚恐勞累)"로 죽었다고 본다. 전해지는 바로는, 진시황이 어릴 때 연골병(軟骨病)과 기관지염을 앓았다. 성년이 된 이후 불행하게도 간질을 앓는다. 이런 고질병은 자주 발작을 한다. 기원전218년, 진시황은 선약을 구하기 위하여 양무(지금의 하남성 원양현 경내)의 박랑사 부근으로 간다. 돌연 괴이한 소리가 들리면서, 대철추 하나가 날아와서, 그의 뒤에 있는 수레를 맞힌다. 수레는 완전히 부서진다. 확실히 이는 누군가 고의로 암살하려 한 행동이다. 진시황의 경공증(驚恐症)은 이때부터 발생한다. 그후부터는 하루도 편안한 날이 없었다. 기원전210년, 진시황은 제5차 순유를 나선다. 첫째는 소재피난(消災避難)이고, 둘째는 불사약을 구하는 것이다. 이번에는 먼 길을 떠났고, 결국 피로해서 쓰러지게 된 것이다. 함양으로 돌아오는 도중에, 간질이 발작하여 앉은 자리의 옆에 더위를 피하는 용도로 쓰는 청동빙감(靑銅氷鑒)에 머리를 부딛친다. 그 결과 빙감은 쓰러지고, 얼음이 사방으로 흩어진다. 바로 상처입구가 감영되어 두통, 어지럼증, 발열, 구토등 증상이 나타난다. 진시황은 마침내 치료를 성공하지 못하고 사구에서 사망한다.


"모살설"은 곽말약 선생이 제출한 것이다. 그는 이렇게 본다. 진시황은 역자 즉 호해(胡亥)에게 피살당했다는 것이다. 구체적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진시황이 비록 청동빙감에 부딛쳤지만, 치명상은 아니었다. 통상적인 이치로 추측해보면, 설사 진시황의 병세가 악화된다고 하더라도, 2,3주가 지나서 사망하는 것이 정상이다. 이 기간동안 함양으로 돌아가서 후사를 처리해둘 수 있다. 둘째, 당시, 진시황은 비록 발열이 있었지만, 의식은 또렷했다. 이때, 그는 아주 이성적이었고, 돌연 생각이 나서, 원래 멀리하지 말았어야할 공자 부소와 공신 몽염을 떠올린다. 그래서 부소에게 친히 유조를 쓴다: "짐이 천하를 순유하며 명산의 여러 신에게 제사를 지내서 수명을 연장하고자 했으나, 불행히도 돌아오는 길에 병이 발작하여, 이제 목숨이 조석에 달렸다. 군대는 몽염에게 맡기고, 함양으로 와서 장례식을 치르라." 당연히 이 조서는 부소에게 전해지지 않았다. 어쨌든 부소가 즉위한 후에 조고, 이사는 모두 결말이 좋지 않았다. 두 사람은 암중으로 '조서를 고쳤다"  한편으로, 호해를 황제로 옹립하고, 다른 한편으로 진시황이 입을 빌어 '부소, 몽염을 사사한다" 재미있는 것은 진시황이 사구에서 겨우 하룻 밤만 머물렀는데, 괴이하게도 급사했다는 것이다. 다음 날 새벽, 진시황이 온량거에서 사망한다. "오른쪽 귀에 검은 피가 흘렀다(右耳有着黑血) 어느 때부터인지 모르지만 이미 돌맹이처럼 단단해 졌다." 곽말약은 "이는 호해 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이사, 조고도 몰랐다." 만일 현재라면, 해부하는 칼로 진시황의 오른쪽 귀 속에 세 촌 크기의 못이 박혀 있음을 알 수 있었을 것이다. 곽말약의 추론에 따르면, 호해는 황위를 차지하기 위하여, 스스로 손을 써서 친아버지인 진시황을 암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