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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제갈량)

제갈량부자와 사마의부자의 차이점

by 중은우시 2015. 1. 6.

글: 유려평(劉黎平)

 

삼국시대의 정치적 구도를 보면 기실 가족의 구도이다. 조(曹), 손(孫), 유(劉)이 대국면하에, 다시 다른 성씨의 국면이 있다: 예를 들어, 제갈가족, 육(陸)씨가족, 사마가족, 가(賈)씨가족등등. 그중 제갈가족은 세 국가의 경영진에서 모두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어, 역사상 보기 드문 경우이다.

 

그중 촉한의 제갈가족은 절대적인 발언권을 가지고 있었다. 제갈량이 촉한의 정치무대에서 이미 실질적인 최고경영자가 되었을 때, 사마가족의 조위에서의 경영자지위는 아직 확정적이지 못했고, 촉한의 제갈량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러나, 이 두 가족, 혹은 두 부자집단의 발전은 완전히 달랐다. 촉한 제갈가족의 권위는 제갈량의 사망과 더불어 돌연 사라진다. 권력은 후주 유선에게 일부가 돌아가고, 일부분은 강유에게 일부분은 황호에게 넘어가며, 또 다른 일부분은 문관집단에 귀속된다. 제갈량 가족의 권력은 분할되어 소리소문없이 사라져 버린다. 제갈량의 아들 제갈첨은 그저 관료집단의 일원일 뿐이었다. 한중군구이외의 병력을 장악하여, 비록 지위는 높았지만, 그의 부친과 비교할 수는 없었고, 하락세를 보였다.

 

사마가족은 달랐다. 사마의가 죽기 전에 이미 가족의 권력탈취를 위하여 준비작업을 해두었다. 그 대표적인 사건은 바로 조상(曹爽)집단을 제거한 것이다. 사마의가 죽은 후, 정권의 바통은 계속하여 사마부자의 손에 쥐어져 있었다. 사마의에서 사마사, 사마소, 다시 사마소의 아들 사마염까지. 그리고 사마염의 손에서 정권교체가 완성되고, 진(晋)왕조를 건설한다.

 

기실, 사마의는 조위의 손에서 통치권을 빼앗아, 독보적인 일가를 이루어 심지어 다른 견제할만한 세력을 남기지 않았는데, 그 난이도는 제갈량보다 컸다. 왜냐하면 북방가족세력은 개별적인 수로 보나, 방대한 것으로 보나 촉한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였기 때문이다. 당시 중국의 대가족은 여전히 북방에 집중되어 있었다. 다만, 이 번잡한 가족역량이 사마의에 의하여 하나하나 정리되었고, 그후에 아들 사마사에게 넘겨주어 사마사가 처리하게 했다.

 

왜 두 가족의 부자계통은 이렇게 상반된 발전방향을 가지게 된 것일까?

 

첫째, 부친대의 경영스타일이 달랐다. 제갈량이 이후 선비들의 존경을 받는 우상이 된 것은 그의 개인적인 품성과 관련이 있다. 제갈량은 완전히 자신을 개별적인 경영자로 생각했다. 단순한 경영자로, 그는 오너에 대하여 보은심리가 있었다. 그래서 이 국가의 중임을 맡은 것이다. 제갈량이 생각한 것은 오너로서의 사업이 아니고, 자신의 가족을 발전시키는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천고이래로, 제갈량은 가장 충성스러운 경영자로 인식되는 것이다. 제갈량은 의도적으로 관료사회에서 제갈량가족집단을 만들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아들의 정치적 지위를 의도적으로 배양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사마의는 계속하여 자신의 가족을 경영하고자 했다. 그가 하려했던 것은 조위집단을 위하여 힘을 다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가족이 조위집단을 대체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그가 조위집단에 한 모든 것은 기실 자신의 가족을 위하여 한 일이었다.

 

경영자가 주인을 충성의 대상으로 삼느냐, 아니면 차지하려는 대상으로 삼느냐는 것이 바로 제갈량부자와 사마의부자의 차이이다.

 

둘째, 이 두 가족의 부자전승은 시간적인 차이가 존재한다. 부친 제갈량에서 아들 제갈첨으로 이어지는 것은 부자간에 직접적인 전승이 이루어지지 못했다. 제갈량이 사망할 때 제갈첨은 겨우 8살이었다. 아들이 너무 어려서, 가족세력을 형성하는데 불리했다. 제갈첨이 나중에 정치무대에 나서는데, 그것은 제갈집단권력의 자연스러운 연장이 아니었다.

 

이 점에서 조위집단도 손해를 본 셈이다. 위명제 조예가 사망할 때, 아직 젊은이였고, 그의 후계자인 조모(曹髦)는 겨우 14살이었다. 조위정권은 이 연결고리에서 약화된다.

 

사마의 부자는 달랐다. 그들은 부강자장(父强子壯)이라 할 수 있었다. 사마의는 장수하여, 아들이 충분히 성숙한 후에야 사망한다. 이렇게 하다보니 한 가족의 권력승계가 순조롭게 완성될 수 있었다.

 

경영권이전이 완성되려면, 합법적이어야 할 뿐아니라, 합리적이고 순리에 맞아야 했다. 부자간에 나이 차이가 많으면, 비록 합법적이라고 하더라도, 성숙도 면에서 보자면 합리적이지 못하다. 성숙한 부친대의 경영층이 성숙한 아들대의 경영층에게 넘겨주는 이런 경영권이양이야말로 진정한 경영권이양이다.

 

촉한에서, 유선이 약세였으므로, 국민들은 아마도 정치적으로 강력한 제갈가족을 원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제갈첨이 조정에 있을 때 일단 사람들이 모두 옹호하는 정책결정이 이루어지면 사람들은 모두 제갈첨의 공로라고 했다는 것이다: "갈후지소위야(葛侯之所爲也)"

이 점에서 보자면 삼국무대에서 강세부자집단이 나타나는 것은 기실 민중의 기대에 부합한다. 왜냐하면 그 시대에 한 국가를 하나의 강력한 가족이 장악하면, 발전잠재력과 전투력이 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