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호각조(胡覺照)
위연은 유비집단의 철간(鐵杆)중 하나이다. 일찌기 유비가 탁주(涿州)에서 무장을 조직하여 황건적의 난을 진압할 때, 위연은 바로 그 중의 한 명이었다. 즉 유비집단의 철간중 한 명이다. 이는 유비의 임명에서도 엿볼 수 있다. 219년, 유비는 스스로 한중왕(漢中王)을 칭하고, 성도로 돌아가 후방을 경영하고자 할 때, 한중의 군사, 경제적 지위는 아주 중요했다. 자연히 중요한 장수를 뽑아서 이곳을 지키게 해야 했다. 사람들은 모두 한중을 지키는 중요임무는 분명 장비가 맡게 될 것이라고 여겼고, 장비도 그렇게 보았다. 그러나 사람들의 예상밖으로, 유비는 위연을 한중태수(漢中太守)로 임명하고, 독한중진원장군(督漢中鎭遠將軍)으로 발탁한다. 이렇게 임명하자, 전군은 깜짝 놀란다. 그래서 그는 비록 의양(義陽) 적관이지만, 확실히 탁군출신 방파의 골간이다. 유비, 관우, 장비등이 사망한 후에는 위연이 말그대로 탁군출신의 대표인물이 된다.
유비가 죽은 후, 서촉은 제갈량시대로 접어든다. 위연이 배제되고 탄압당하는 경력은 제갈량의 방파주의 관리노선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때의 위연은 인생의 곤란한 시기로 접어들었다. 한편으로, 직무와 작위는 대폭 승진했으나, 제갈량이 작위를 봉할 때 위연은 '도정후(都亭侯)가 된다. 227년 제2차 '북벌'때 제갈량은 위연을 부수(副帥)에 임명하고, 상부사마(相府司馬), 양주자사(凉州刺史)를 겸직하게 한다. 230년, 위연은 조위(曹魏)의 명장인 후장군(後將軍) 비요(費瑤), 옹주자사(雍州刺史) 곽준(郭準)과 양계(陽溪)에서 대전을 벌여 전승을 거둔다. 군사적 승리는 위연에게 더 많은 영예를 가져다 준다. 정서대장군(征西大將軍)으로 승진하고, 가절(假節, 황제의 부절을 들고 황제를 대신하여 출순하는 것), 남정후(南亭侯)에 봉해진다. 남정후는 현후(縣侯)이다. 제갈량의 무향후(武鄕侯)보다도 한 등급이 높은 것이다. 관우는 한수정후(漢壽亭侯), 장비는 서향후(西鄕侯)이고, 이엄(李嚴)은 백제성에서 탁고(托孤)를 받았지만 겨우 도향후(都鄕侯)였다. 황충(黃忠)은 비록 많은 공훈을 세웠지만, 작위는 채읍(采邑)이 없는 관내후(關內侯)에 불과했다. 제갈량이 병사하고 위연의 사건이 일어날 때까지, 촉군의 여러 장수들 중에서 '정서대장군'의 군함(軍銜)을 받은 사람은 위연 한 명 뿐이다; '가절'이라는 영예를 획득한 사람은 장비, 제갈량, 이엄, 위연의 4명 뿐이다; 오로지 관우만이 멀리 형주(荊州)에 상대적으로 독립하여, "가절월(假節鉞, 황제를 대리하여 순찰하고, 선참후주할 수 있는 권력이 있음)"이다. 위연은 4명중에서는 얻은 영예가 가장 높고, 관우와 비교하더라도 서로 높고 낮음이 있을 정도이다.
더욱 중요한 또 다른 일면은 그가 탄압받고 배제되었다는 것이다.
포스트유비시대에 정령군령은 모두 제갈량 혼자서 결정한다. 유선은 그저 도장찍는 황제에 불과했다. 위정은 계속하여 승진하였는데, 이를 가지고 제갈량이 위연의 공로, 재능, 덕망을 인정하고 포상한 것이라고 하기 보다는, 오히려 그를 다독이는 수단을 써서 배제하고 멀리하려는 목적이었다고 말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제갈량의 오출기산(五出祁山)때 형주출신을 중용하고, 탁군출신의 대표인물인 위연을 탄압하는 것은 비교적 분명했다. 제1차출병 '북벌'때 여러 장수들은 일치하여 탁군출신의 위연 혹은 익주출신의 숙장 오일(吳壹)을 부수(副帥, 督前部)로 추천한다. 제갈량은 그러나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전쟁터에 참가한 경험이 전혀 없고, 경력도 아주 일천하며, 명망도 부족한 마속(馬謖)에게 부총사령관직을 맡긴다. 이 중간에는 마속을 가까이하고 발탁하여 군대를 장악하게 하고, 위연을 탄압 배제하려는 의도가 분명하다.
탄압배제는 탄압배제이고, 위연은 어쨌든 얻기 힘든 군사인재였다. '북벌'의 승리를 거두려면 그래도 사병들이 추대하고, 용맹하기 그지없는 위연을 이용해야 했다. 이와 동시에 제갈량은 다시 먼저 참군이 되고 나중에 장사로 승진하는 수군장군(綏軍將軍) 양의(楊儀)를 중용한다. 양의는 소인득지로 제갈량이라는 큰 나무의 그늘에 들어간 후, 위연을 아예 눈에 두지 않는다. 그래서 관계가 긴장되어 회의때 위연이 칼을 뽑아 양의를 죽이겠다고 할 정도가 된다. 서로 물과 기름과 같이 서로를 용납하지 못하고 빙탄불상용의 지경에 이르니 아주 격렬했지만, 제갈량은 이를 본체만체 한다. 그저 흥흥 거리기만 할 뿐이었다. 비위는 호인역할을 하여 자주 중간에서 조정하고 양쪽을 달래고, 이해관계를 분별하여, 회의때는 두 사람의 가운데 앉아서 변고가 발생하는 것을 막았다. 실은 양의를 보호한 것이다.
등급이 삼엄한 전제사회에서 잡패인 수군장군 양의가 정서대장군, 남정후, 양주자사인 위연과 지위의 차이가 큰데, 위연도 부하장수와 굳이 잘 못지낼 이유가 없고, 양의도 위연을 무시할 이유가 없다. 더더구나 위연과 서로 노목상향(怒目相向)할 담량이 없다. 정상적인 상황하에서라면, 양의가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더라도, 그저 조심스럽게 제출하거나, 혹은 개인적으로 제갈량에게 말해야 하는 것이다. 어찌 위연과 서로 칼을 뽑아들 정도로 말싸움을 벌인단 말인가. 삼군총사령관인 제갈량은 이런 국면을 맞이하고서도 그저 흥흥거리고 말도 하지 않을 것인가. 이는 자세히 생각해볼 문제이다. 최고급별의 군사회의는 말할 것도 없고, 개차반같은 작은 부서에서라도 두 명의 부직이 대국을 돌보지 않고 서로 다투어 자주 회의장을 개판으로 만들어 놓는다면, 회의를 주재하는 책임자는 절대로 이를 그냥 두고보지 않을 것이다. 그는 반드시 개인적으로 얘기를 하거나, 시비를 가리거나하여 이런 일이 다시는 발생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만일 해결할 수 없으면, 조직의 조치를 받게 될 것이다. 이는 너무 체면 상하는 일이다. 양의가 윗사람을 무시하는데도 제갈량이 흥흥거리며 해결하지 않은 것을 보면 이렇게 이해할 수밖에 없다. 제갈량이 바로 양의의 막후지시자이다. 고의로 위연을 견제한 것이다. 제갈량의 막후지지가 없다면, 양의는 감히 전혀 거리낌없이 위연에게 그렇게 대하지 못했을 것이고, 위연도 양의를 죽이려 한 것은 실은 제갈량에게 보여주는 것이다.
제갈량의 사후, 위연, 양의의 내분은 신속히 폭발한다. 위연은 내분과정에서 실패하고 희생된다. 내분은 아주 부적절한 시기에 폭발했는데, 제갈량의 임종안배가 아주 중요한 작용을 한다.
양의는 군대를 지휘한 경험이나 명망이 없었다. 군직은 그저 잡패장군뿐이고, 필적할 수 없는 정서대장군 위연과 물과 기름같았다; 더욱 중요한 것은 도덕기준으로 볼 때, 양의는 천생 반골이다. 그는 일찌기 조위의 형주자사 부군(傅群)의 주부(主簿)였는데, 부군을 배반하고 관우에 투항한다. 그리고 치명적인 결점도 있다. 즉 성격이 조급하고, 마음이 좁다. 다른 사람과 일을 같이 할 사람이 아니다. 일찌기 상사인 동윤(董允)과 갈등을 빚어서 유비가 그에게 실직을 주지 않았다. 양의가 제갈량을 따른 후, 장완과 같은 승상참군, 장사인데, 자신이 더 경력이 많고, 재능이 낫다고 여겼다. 그런데, 후계자로 되지 못하자 마음 속으로 불만을 품고 나중에는 대군을 이끌고 오장원에서 철수할 때 무리를 이끌고 조위에 투항하지 않은게 후회스럽고 까지 한다. 이를 보면 양의의 사람됨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제갈량이 죽기 전에, 군중에서 사후를 논의하는 회의를 개최한다. 수군장군 양의로 하여금 주력군을 이끌고 퇴각하게 하고, 정서대장군 위연이 후방을 막도록 했다. 만일 위연이 이 계획에 따르지 않으면 대군은 여전히 계획대로 철수하고, 위연은 신경쓰지 말라고 한다. 이때 제갈량은 이미 급하여 제대로 사람을 고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양의의 재능, 덕망, 인품을 생각지도 않고 황급한 와중에 뒷일을 고려하지 않는 이런 결정을 내리게 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그의 임종안배는 심사숙고를 거친 것이다. 출신이 다르기 때문에 제갈량은 자신 및 형주출신 계파의 앞날과 명운을 고려한 것이다. 자신은 죽으면, 유선과 위연은 더 이상 아무런 제약이 없다. 만일 위연이 중요한 군권을 장악한다면, 가까이는 객관적인 현실을 무릎쓰고 '북벌'을 계속하지 않을 것이고, 멀리는 형주출신 관료들의 앞날과 운명이 우려된다. 이는 자신의 사후 명예와 지위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래서 병사하기 전에 군사회의를 소집하는데, 당연히 참가해야할 정서대장군, 부총사령관 위연을 배제하고, 단지 장사 양의, 사마 비위, 호군 강유등만 불러서 사후 철수방안을 논의한 것이다. 양의로 하여금 전군을 통솔하고 비밀리에 철수하며 위연에게 후방을 막는 일을 맡긴다. 이렇게 위연을 위한 독주는 마련된 것이다.
위연은 독주를 스스로 마셨다. 제갈량이 병사하고 양의가 전군을 이끌고 퇴각한다는 소식을 듣자, 흉흉한 기세로 말한다: "승상이 비록 죽었지만, 내가 아직 여기 있다. 승상부의 친척과 문관은 영구를 호송하여 돌아가서 장례를 치르고, 나는 당연히 각로의 대군을 이끌고 계속 북벌해야 한다. 하물며, 나 위연이 어떤 사람인가. 양의 같은 놈의 뒤나 봐주어야 하는가." 동시에 군령을 전달하러 온 비위를 구금하고, 그를 협박하여 전혀 다른 군령을 내리게 한다. 비위는 상황이 좋지 않게 진행되는 것을 보고, 위연에게 양의를 설득하여 군권을 내놓게 하겠다는 말을 하며 그 자리에서 빠져나온다.
이는 명실상부한 쿠데타이다. 비록 촉한정권에 대한 모반은 아니지만, 총사령관대리 양의에 대한 탈권은 성립된다. 이때의 위연은 이미 광조(狂躁)했다. 장기간 배제되고 탄압받은 원한과 분노는 제갈량의 사망소식으로 해소되지 않고, 양의가 군을 이끌도록 했다는데 더욱 분노하게 된다. 그의 이런 행동은 3가지 치명적인 잘못을 범하게 된다.
첫째, 제갈량의 사후 군심과 사기가 바닥에 떨어져 있는 상황이라는 것을 고려하지 못했다. 원래, 제갈량의 '오출기산'으로 조위를 북벌한 것은 궁병독무(窮兵黷武)로 혼자의 뜻으로 진행한 잘못된 조치였다. 서촉이라는 작은 나라가 인구도 적은데 장기간 전쟁의 유린을 받으며 전쟁을 싫어하고 전쟁에 반대하는 정서가 나타난지 이미 오래되었다. 제갈량이 죽자, 장병들은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어하는 정서가 거국적으로 애도하는 배후에 깔려 있었다. 이런 상황하에서 조위와 대전투를 벌이겠다는 것은 이미 불가능한 일이었다.
둘째, 쿠데타의 특징을 잘 몰랐다. 쿠데타는 비밀스럽고 빠르게 일으켜야 한다. 조건이 허용하는 범위내에서, 상대방이 전혀 모르게 해야 한다. 위연은 비위와 연명으로 쿠데타명령에 서명했으니, 비위를 풀어주어서는 안되었따. 하물며 비위는 형주출신 핵심인물이 아닌가. 방법을 강구하여, 양의, 강유등을 하나하나 붙잡아야 하고, 잡아들이기는 해도 풀어주어서는 안된다. 위연은 공개적인 수단으로 군사음모를 실행하려고 했는데 이는 이미 목적과 수단이 서로 배치되는 모순을 나타낸다. 비위가 떠나자, 군사음모는 완전히 군대를 장악하고 있던 정적에게 폭로된다. 위연은 자신이 주도할 수 있는 기회를 잃고 오히려 주도권을 상대방에 넘겨주어 버린 것이다. 양의가 병력을 이끌고 철수하자 쿠데타는 사실상 유산된다.
셋째, 임기응변의 책략이 부족했다. 쿠데타를 발동하기도 전에 이미 실패한 상황하에서, 위연은 생각을 바꾸지 않고, 후방차단부대를 이끌고 먼저 남으로 돌아가서, 주력부대가 철수하는데 써야할 포사잔도(褒斜棧道)를 불테운다. 이는 실로 위연의 히스테리적인 행동이라고밖에 볼 수 없다. 양의와 군사지휘권을 놓고 다투다가 서촉의 양대 대군이 서로 대립하는 데까지 악화되었다. 제갈량의 퇴각과 자신의 진공 사이에 의견대립이 있다는 것을 전군의 상하에 공개한 셈이 되었다; 더더구나 자신을 전체장병의 반대편에 서게 만들었다. 사병들은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어하는데, 위연은 계속 '북벌'을 주장하여 첨예하게 대립한다. 3가지 모순가운데 위연은 모두 고립되어 버린다. 그래서, 남곡구에서 양의의 군대와 만나 국지전이 벌어질 때, 위연이 이끄는 부대는 위연이 잘못했다고 여겨 위연의 명령에 목숨을 걸지 않고, 접촉하면 바로 흩어졌다. 그저 위연부자 몇 명만 남게 된다.
양의, 위연이 모순이 격화될 때, 유일하게 이를 조정할 수 있는 것은 서촉조정이었다. 이전에 두 사람이 모두 상소를 올려 상대방이 '반역'했다고 고변했다. 아무런 권력도 없는 유선은 그저 조정의 논의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상황을 전혀 모르므로, 대신들도 맹목적으로 의견을 얘기할 수 없었다. 온당한 방법이라면, 쌍방이 서로 접촉하지 말고 각자 노선을 달리해서 철군하라고 하고, 군대가 한중에 돌아온 후에 다시 조사하여 처리하겠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양호한 처리의견이 나오지 않았다. 진수가 알고 있는 바에 따르면, 위연은 너무 용맹하고 교만하며 자신만 잘난 줄 알았다. 그러다보니 동료들이 그를 경원했다. 겉으로는 괜찮아보이지만 속으로는 긴장된 관계였다. 이런 관계는 결정적인 순간에 작용한다. 서촉의 고위관료인 동윤, 장완등은 모두 '양의를 편들고 위연을 의심한다' 진수가 보기에 이는 서촉조정이 감정적으로 일을 처리한 잘못된 판단이었다.
장완, 동윤등은 오랫동안 관료로 일했으므로, 큰 일이 닥쳤을 때, 충동적으로 이런 이성을 잃은 결정을 내릴 정도로 멍청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위연은 서촉의 중요한 인물이다. 하물며 병력을 이끌고 외지에 있다. 만일 위연이 반란을 일으켰다고 믿었다면, 좋은 말로 다독여야 했다. 그가 돌아온 후에 처리해도 늦지 않고 미리 타초경사하여 반란을 일으킨 신하를 체포할 기회를 놓칠 필요는 없었다. 그렇다면 가능성은 한 가지이다. 즉 제갈량이 추천하여 유선의 곁에 앉혀둔 이들의 흉금은 제갈량보다도 더 좁았던 것이다. 중요한 순간에 편협한 집단이익이 그들의 시야를 가린다. 장완등이 말한 것으 그저 당동벌이(黨同伐異)에 지나지 않는다. 이는 편협한 계파이익에 기초한 '양의의 편을 들고, 위연을 의심하는' 것이다. 이 기회에 말을 잘 듣지 않는 위연을 제거하고, 형주출신들이 계속 정권을 장악하는데 가장 큰 장애를 제거하려 한 것이다.
제갈량은 위연에게 독주를 마련해 주었고, 위연은 그게 뭔지도 모르면서 마셔버렸다. 마지막 결말은 이미 바뀔 수 없게 된다. 위연은 마대(馬岱)에에게 호두교(虎頭橋)에서 추살당한다. 호두교는 지금의 한중시 북십자가로 호두교 유적지가 있다. 그후, 양의는 그의 삼족을 멸한다.
위연이 양의를 죽이려는 것은 사실이나, 서촉에 반란을 일으켰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위연이 서촉을 배반하려 했다면, 유선에게 양의가 '반란'했다고 상소를 올릴 필요도 없고, 귀로를 막을 필요도 없다. 그저 군대를 이끌고 조위에 투항하면 그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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