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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제갈량)

한환제(漢桓帝): 미인을 좋아하고, 태감은 더 좋아한 동한황제

by 중은우시 2015. 1. 14.

글: 노최(老崔)


한장제는 중국역사상 가장 대단한 황제이다. 왜 그렇게 얘기할 수 있는가? 왜냐하면 그에게는 8명의 아들이 있는데, 누구의 자손이든 모두 황제에 오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셋째아들 유경(劉慶)은 이전의 태자이고, 폐위된 후 94년에 낳은 아들 유호(劉祜)는 한안제(漢安帝)가 된다; 다섯째 아들 유수(劉壽)의 아들 유의(劉懿)는 염태후와 염현(閻顯)의 지지하에 황제가 된다. 비록 역사에서 인정받지도 못하고, 봉호조차도 없지만; 큰아들 유항(劉伉)의 증손자 유찬(劉纘)은 동한의 제10대황제 한질제(漢質帝)가 된다. 나중에 발호장군 양기(梁冀)에게 독살당한다; 여섯째 유개(劉開)의 손자는 바로 한환제(漢桓帝) 유지(劉志)이다.


유지는 어떻게 황제에 올랐는가?


유지, 자는 의(意)이고 한장제의 여섯째 아들 유개의 손자이다. 132년에 출생하였다. 한질제 유찬이 겨우 9살에 죽었으므로 당시의 황태후인 양납(梁妠)은 오빠 양기와 상의하여 유지를 동한의 제11대황제로 삼았다.


중국인은 가업을 승계할 때, 혈연을 중시한다. 즉 일맥상전(一脈相傳)으로 가족중의 하나의 갈래를 자신의 가업의 영구적인 승계자로 삼기를 좋아한다. 이렇게 하는 것으 장점은 전체가족의 안정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동한시기에 이르러, 매 가족구성원은 모두 황제가 될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은 무엇때문인가? 왜냐하면 황실의 일에 대한 결정권이 더 이상 족장에 있지 않고 족장배후의 여인 황태후에게 있었기 때문이다.


146년, 대장군 승지후(乘氏侯) 양기는 한질제 유찬의 한 마디 "이 자는 발호장군이다"라는 말 때문에 직접 한질제를 독살한다. 어린 황제가 죽은 후, 양기는 여동생 양태후와 상의한다: 어린애를 하나 찾아서 계속 허수아비 황제노릇을 하게 하자.


이 때, 우리의 주인공 유지는 당시에 마침 경성에 있었다. 무엇을 했는가? 결혼이다. 양태후는 그녀의 여동생 양여영(梁女瑩)을 유지에게 시집보낸다. 황실이 제후를 통제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통혼이다. 감정적으로 더욱 가까울 뿐아니라, 감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양기가 양태후를 찾아와서 상의할 때, 양태후는 마침 여동생의 혼례를 주재하고 있었다. 


자매는 정이 깊었고, 이때 유지는 겨우 14살이었다. 14살에 결혼한다는 것은 황제라 하더라도 너무 이른 편이기는 하다. 여동생이 남편이고, 나이도 어리니 다루기가 쉬울 엇이다. 이런 조건을 다시 찾기 어렵다. 그래서 양태후는 양기와 협의하여 그를 다음 황제로 결정한 것이다.


누가 황제에 오르느냐는 것은 대사이다. 원래 태후와 대신들이 함께 토론하여야 했다. 그러나 대장군 양기와 수렴청정중인 양태후 두 사람의 의견이면 충분했다. 아부하는 사람은 너무 많으니, 양태후와 양기의 의견이 바로 모두의 의견이 되어야 했다.ㅡ


그런데, 이 때 반대하는 사람이 나타났다. 태위(太尉) 이고(李固), 사도(司徒) 호광(胡廣), 사공(司空) 조성(趙成)의 세 사람이 들고 일어나서 고개를 흔들며 반대한다. 왜 반대했는가? 한화제 이후 황제가 많았지만, 모두 어릴 때 황제가 되었다. 그 중 몇 명은 아직 영아일 때 황제에 오른다. 이렇게 되니 정국이 안정되지 않았고, 나라가 어지러워졌다. 대신들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이 세사람을 데표로 하여 나이가 가장 많은 청하왕(淸河王) 유산(劉蒜)으로 하여금 계승하게 하자고 건의한 것이다.


이고등을 대표로 하는 문신집단은 모두 글읽는 사람들이다. 비록 힘은 세지 않지만, 사람수가 많았다. 조정의 중견역량이다. 양기를 대표로 하고 태후를 우두머리로 하는 외척집단의 현재상황은 문신집단과 외척집단의 의견이 일치하지 않고 누구도 타협하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때 조정에서 신비한 역량이 출현한다. 그들은 태감으로 구성되었다. 이 역량은 역사상 명성이 계속 좋지 않았지만, 왕왕 조정이 가장 미묘할 때 나타나고 상대방에게 치명적인 일격을 가한다. 한화제가 두헌을 폐하는 것부터 한순제의 승계를 보호하였고, 현재는 한환제의 차례이다.


태감, 조금 우아하게 말하면 환관이다. 환관 중상시(中常侍) 조등(曹藤, 위대한 군사가 조조는 바로 조등의 손자이다. 당연히 조조의 부친은 조숭으로 조등의 양자이다. 태감이 양자를 거두는 것이 한순제때 합법화 되었다)이 하루는 청하왕 유산을 만난다. 목적은 시탐해보기 위함이다. 만일 유산이 황제에 오르면, 현재보다 더 이익이 있을 것이니에 대하여, 한번 가정해보자. 만일 유산이 조등에 아주 호의적이고 열정적으로 대하고, 그들에게 이익을 주겠다고 하였다면 역사는 아마도 고쳐 쓰였을 것이다. 다만 유산은 왕자중에서 나이가 가장 많고, 왕자들 중 전투기였다. 조등이라는 환관에 대하여 그는 본체만체 하고, 아예 그를 무시해버린 것이다.


이것을 중상시인 조등이 어찌 참겠는가. 소매를 떨치고 문을 나서서 바로 양기를 찾아간다. 대장군 양기의 첫마디를 듣는데, 바로 "연오후를 세우는게 나을 것이다. 부귀가 오래갈 수 있다." 연오후는 바로 유지를 가리킨다. 조등같은 환관의 출현은 바로 양기에게 말해준다: 해봐라. 우리가 지지하겠다.


태감의 지지를 얻은 양기는 순간 역량을 가졌음을 느낀다. 말도 부드러워지고, 허리도 곧게 펴졌다. 다음 날, 아침조회에서 양기와 양태후는 더 이상 사람들 의견을 묻지도 않고, 직접 유지를 동한의 제11대황제로 선포한다. 역사에서는 그녀를 한환제라 부른다.


문신집단의 반응에 대하여 양기는 양태후로 하여금 이고의 관직을 파면시킨다. 다른 사람들은 일단 잘못되었다고 느끼자, 모두 바꿔서 양기를 지지한다. 다음 해, 황위를 가질 기회가 가장 컸던 유산은 모반의 죄를 뒤집어써 자살한다. 이제 양기, 양태후, 유지, 조등등 태감들이 손에 손을 잡고 행복한 생활을 누리게 된다.


한환제의 힘든 친정의 길


양씨오누이와 유지는 해피하게 4년을 함께 생활했다. 150년이 되었을 때 양납, 양태후가 사망한다. 다만 양기는 아직 건재했다. 양대장군은 한환제를 옹립한 공로를 가지고 계속 8년을 통치한다. 사서에서, 양기를 묘사할 때, 항상 그의 용모가 얼마나 표한(彪悍, 사납다)하게 생기고 얼마나 사지만 발달한 폭도인지를 얘기하기 좋아한다.


기실 동한의 역사를 전체적으로 보면, 발견할 수 있다. 다른 소위 외척가족은 태후가 죽은 후 기본적으로 모두 흩어진다. 어떤 사람들은 심지어 태후가 살아있을 때도 멸문을 당하고 목이 잘렸다. 예를 들어, 한화제때의 두씨가족이 그러하다. 다만 양기는 양태후가 죽은 후 여전히 자신의 실력으로 제국을 9년이나 계속 통치한다. 이는 최소한 양기는 그저 거친 무부일 뿐아니라, 혁혁한 무공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얘기하자면 부끄럽지만, 이렇게 용맹한 양기가 마지막에는 몇몇 태감의 손에 죽는다.


사정은 이렇다: 양기가 비록 발호했지만, 한환제에 대하여는 공경하는 편이었다. 좋은 물건이나 좋은 놀이가 있으면 먼저 한환제에게 보였다. 그래서 유지는 비록 아주 만족하지는 않았지만, 두 사람간에는 충돌이나 폭발이 일어나지 않았다. 한환제가 양기를 적으로 삼게 만든 것은 한 여인이다.


이 여인의 성은 등(鄧)이고, 이름은 맹녀(猛女, 이것은 여자의 진짜 이름이다)이다. 운대28장의 우두머리인 등우(鄧禹)를 기억하는가, 등우의 손자 등향(鄧香)이 바로 등맹녀의 친아버지이다. 나중의 일은 모두 알고 있을 것이다. 등태후가 죽은 후, 등씨가족은 멸문된다. 맹녀의 어머니는 양기의 부인 손수(孫壽)의 외삼촌 양기(梁紀)에게 개가한다. 나중에 손수는 등맹녀가 아주 예쁘게 자라는 것을 보고는 그녀를 한환제에게 추천한다.


한환제는 맹녀를 보자 아주 좋아한다. 이때, 한환제의 첫번째 황후 양여영은 양태후가 친히 결혼시킨 그 여인이 막 죽었다. 비록 한환제의 후궁에는 여러 여인이 있었지만, 맹녀처럼 예쁘고 마음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


서한의 한무제때부터 황제가 만일 한 여인을 사랑하면 그녀의 집안사람들도 사랑하여 모조리 고관에 임명한다. 그래서 한환제는 등맹녀의 모친을 장안군에 앉히고, 다른 등씨가족들 중 죽지 않은 사람은 모조리 관직을 얻는다. 이제, 양기가 기분이 나빠진다. 부인 손수가 친히 등맹녀를 황궁에 넣었는데, 이제 등맹녀가 성공을 거두었는데도 양기에 대하여 좋은 말은 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의 집안사람들에게만 관직과 이익을 나눠주고 있다.


그래서, 양기는 등맹녀를 처리할 준비를 한다. 목표는 바로 그녀의 모친이었다. 다만 무슨 일 때문인지, 이 일을 사전에 등맹녀의 모친이 알게 된다. 양기가 사병을 데리고 체포하러 갔을 때, 등맹녀의 모친은 황궁으로 이미 도망쳐서 황제에게 애원하는 중이었따. 등맹녀는 이 일을 보자, 곡을 하면서 황제에게 애원한다. 자신의 장모가 다른 사람에게 멸시당하자 한화제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


다만 화를 내도 소용이 없었다. 현재 황제는 실제권리를 가지고 있지 못하다. 역사경험은 우리에게 말해준다. 권신을 무너뜨리려면, 가장 안전한 방법은 태감의 협력을 얻는 것이다. 그래서, 양기가 황제의 곁에 심어놓은 간첩들을 피하기 위하여, 한환제는 다른 5명의 태감과 측간에서 회의를 연다.


그 다섯명은 단초(單超), 좌관(左倌), 서황(徐璜), 구원(具瑗)과 당형(唐衡)이다. 태감의 가잦 좋은 작용은 황제와 대신들간의 교량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황제도 군대가 필요하다. 그래서 한환제는 이 다섯 명의 태감을 통하여 성공적으로 경성의 보안사령관과 연락하고, 그 후에는 통상적으로 하던 방식을 따랐다. 성문을 걸어잠그고, 양기의 집을 포위하고, 체포하려 한 것이다. 양기와 손수는 모두 자살한다.


다른 양씨가족 구성원들은 모두 집에서 쫓겨난다. 이전에 양기를 따르던 대신들은 마침내 추후산장(秋後算帳)을 당할 때가 도래한 것이다. 모조리 파면되었다. 


이제, 한환제는 마침내 친정할 때가 도래했다. 이 해는 연희2년(159년)이고 한환제가 28살이 되는 해이다.


태감을 한환제가 가장 좋아했다.


한환제가 친정을 한 후, 해결해야할 것은 이제 태감만 남았다. 한편으로 단초등은 모두 한환제 친정에 공을 세운 공신들이다. 다만 다른 한편으로 태감집단은 수천명이다. 만일 그들의 세력이 너무 크면, 막 친정을 한 한환제는 다시 한번 태감의 포위망에 빠지는 것이다.


한환제는 두 가지 조치를 취한다. 첫째 당연히 이들에게 많은 하사품을 내린다. 그를 위하여 목숨을 건 태감들이다. 그리고 단초와 피를 뽑아 맹세한 것도 기억하고 있다. 어찌 망은부의할 수 있을 것인가. 그래서 단초등 5명은 모두 왕후에 봉한다. 하사받은 금은재물이 무수했다; 두번째 조치는 바로 그들은 탄압하는 것이다. 그중의 2명은 죽이고, 나머지는 모두 도향후로 강등시킨다. 이것은 전형적인 정치수완이다. 13년간 허수아비황제를 괜히 한 것이 아니다.


순조롭게 양기를 무너뜨린 사실은 한환제에게 한 가지 이치를 분명히 말해주었다. 즉 환관의 역량을 잘 이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한환제는 비록 정도는 다르지만 그들을 견제하여 그들이 너무 강해지지 않도록 했다. 다만 다른 사람들이 태감을 괴롭히는 것은 허용하지 않았다.


연희9년(166년), 당시의 대학생 및 조정대신, 심지어 외척집단은 연합하여 한환제에게 상소를 올린다. 태감들의 권리를 줄여달라고. 한환제는 이를 알고는 화를 낸다:


멍청한 놈들, 어르신이 예전에 친정을 하려고 할 때는 너희가 모두 어디에 있었느냐. 지금 그들에게 약간의 권력을 주었다고 너희는 나를 혼군이라고 욕하다니, 좋다. 내가 얼마나 혼군인지 너희들에게 보여주겠다.


황제는 화가 많이 났다. 결과는 심각했다. 한환제는 명을 내려, 이번 활동에 참가한 자들은 누구든지 막론하고 모조리 잡아들이라고 하였다. 한꺼번에 200여명이 잡혀 들어온다. 감옥에는 가두어 놓았지만, 이들을 죽이지는 않고 모조리 농촌으로 보내버린다. 그리고 이들에 대하여는 영구히 다시는 관직을 내리지 말도록 명한다. 이들 학생과 관리들은 앞으로 관료로 나설 희망은 없다. 그후로는 아무도 태감들에 대하여 가타부타 말을 하는 자들이 없었다.


한환제의 이번 행동은 무형중에 환관의 지위를 올려주게 된다. 태감이 관직을 갖게 되면 보통사람들과 가장 다른 점이 바로 호색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저 돈을 좋아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위로부터 아래까지 대규모의 부정부패행위가 벌어진다. 그리고 이런 돈은 마지막에 자신의 호주머니로 들어온다. 국고에도 돈이 필요하다. 그러면 어떻게 할 것인가. 백성들에게 계속 거두어야 한다.


다만 백성들은 돈이 없다. 이렇게 많은 관리들을 먹여살려야 할 뿐아니라, 황제도 먹여살려야 한다. 그리고 이렇게 많은 환관들도 있다. 또한 그들은 큰 집도 지어야 했다. 백성들이 1년동안 거둔 것을 모조리 관료들이 가져가니, 국고는 돈이 없어진다. 그리고 그 기간동안 서역이 소수민족은 다시 폭동을 일으킨다. 전쟁을 하려면 돈이 더 필요하다.


국가에 돈이 없고, 백성들에게도 돈이 없으나, 돈은 필요하다. 어떻게 할 것인가? 연희4년(161년) 한환제는 명을 내린다: 매관매직. 무슨 관내후 작위, 무슨 호분랑(虎賁郞), 우림랑, 제기영사(緹騎營士)와 오대부(五大夫)등 모조리 가격을 붙여서 판다. 누구든지 돈만 낼 수있으면 관리가 될 수 있었다.


관직을 사서 무엇을 하는가? 돈을 번다. 내가 10만으로 산 관직이니 어쨌든 십여만 이십만은 벌어야 원금을 회수하는 것이다. 한환제의 매관매직은 직접적으로 백성들이 살아갈 수 없게 만들었다. 살아가기 힘들게 되니 어떻게 할 것인가. 빼앗아야 한다. 어디든 양식이 있으면 그곳으로 가서 빼앗는다. 어디에 있는가? 관청에 있다. 이렇게 하여 동한말기에 대규모의 농민의 난이 일어나기 시작하고 점점 폭발한다.


한환제는 어떻게 죽었는가?


영강원년(167년) 십이월 이십팔일, 한환제 유지는 덕양전전에서 사망한다. 죽을 때 나이는 겨우 36세였다. 한환제에게는 3명의 황후가 있었따. 첫번째 황후는 바로 양태후의 여동생으로 양여영이다; 두번째 황후는 바로 등맹녀이다; 이제 세번째 황후는 성이 두(竇)씨이다. 우리는 그녀를 두황후라고 부르자.


한환제는 유명한 호색한이다. 한환제 시기의 후궁여인 수량은 기네스북에 들어갈 정도로 많았다(만일 그때 기네스기록이 있었다면). 한환제의 후궁수량은 4,5천명에 달했고, 하루에 한명씩 만나도 여러 해가 걸린다.


한환제의 황후는 각각 특색이 있다. 처음에 한환제 유지는 양태후의 아래에서 허수아비로 지냈다. 양태후에게 잘 보이기 위하여, 양여영에게도 잘해주었다. 아쉽게도 몇년을 잘 지냈지만, 자식이 생기지 않았다. 나중에 양태후가 죽고, 한환제는 양여영을 멀리하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등맹녀을 총애한다. 양여형은 우울해져서 연희2년(159년) 즉 양씨가족의 뿌리가 뽑힐 때 죽는다.


나중의 등맹녀는 비록 아주 사납지만 여전히 자식이 없었다. 한환제가 점점 멀리하기 시작한다. 원래 한환제는 귀인(貴人) 전성(田聖)을 좋아했다. 그러나 황후는 반드시 집안이 혁혁해야 했다. 그래서 최종적으로 그가 좋아하지 않는 여인을 선택한다: 두묘(竇妙).


동한에서 수렴청정한 태후를 연구해보면, 이 몇 개의 집안에서 나왔다. 두씨, 등씨 그리고 양씨.


당연히 한환제가 황후를 이렇게 많이 바꾼 것은 바로 아들을 낳지 못해서이다. 전해지는 바로는 양,등,두 세 명이 황후가 자식을 낳지 못하여 사회에 보복하기 위하여 후궁중에 임신한 여인이 있으면 모조리 낙태를 시켰다고 한다.


한환제가 죽은 후, 한영제 유굉(劉宏)이 즉위한다. 유굉은 유개의 증손자이다. 한영제 시기에 농민의 난은 이미 상당한 규모로 발전했고,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이 황건적의 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