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정저(鄭褚) 장소만(藏小滿)
사천요리는 2천년이 넘는 역사원류를 지니고 있다고 말한다. 다만 지금 우리가 먹는 사천요리가 그때의 사천요리와 얼마나 많은 관계까 있는지는 말하기 어렵다. 한가지 확실한 증거는 최소한 4백년전에 사천요리에는 아직 고추가 없었다. 고추가 없이 어떻게 '사천요리'라고 말할 수 있단 말인가?
고대 사천요리의 단열
옛 사천요리(老川菜)와 새 사천요리(新川菜)의 단열점은 17세기이다.
명왕조는 17세기에 내우외환의 마지막 40여년을 보낸다. 명말 농민전쟁때, 사천은 전쟁이 마지막까지 지속된 성이다. 그래서 경제와 민생이 가장 심각하게 파괴된 성이다. 장헌충 부대는 사천에 지방정권을 건립하고, 자신이 다시 중국을 통치할 수 없음을 발견한 후, 그는 사천에서 초토정책을 실시한다. 장헌충 및 기타 군대 깜짝 놀랄 정도의 살인방화파괴로 성도평원은 거의 황야로 변한다. 인구학자의 연구에 따르면, 전란으로 사천인구의 최전성기에 수백만이었는데 60-80만으로 줄어든다. 그리고 사천의 중심지역인 성도평원의 원래 사천인은 이미 '백명에 한명도 남지 않았다"
살육으로 인구가 멸절되자, 문화 내지 습성의 전성이 단절된다. 성도를 중심으로 한 사천요리문화는 이 과정에서 파괴적인 재앙을 당한다.
사천요리는 전해지는 바로 고대 파국과 촉국에서 기원한다. 진나라에서 삼국시대까지, 성도는 점차 사천지구의 정치, 경제, 문화중심이 되고, 사천요리는 비교적 많이 발전한다. 사천인은 자고이래로 맛을 즐기는 전통을 가지고 있다. 여기에 사천에는 물산이 풍부하고, 새와 짐승과 물고기가 사천요리에 풍부한 원료를 제공한다. 대량으로 사용되는 촉강(蜀姜), 천화초(川花椒)등 조미료는 일찌기 한나라때부터 사천인들은 "신향(辛香)을 좋아했다"는 특징이 해내에 유명했다.
일찌기 1천여년전에, 서진문학가 좌사(左思)가 쓴 <촉도부>에 "금루중좌(金壘中坐), 효격사진(肴隔四陳), 상이청정(觴以淸酊), 선이자린(鮮以紫鱗)"의 묘사가 있다. 당송때, 사천요리는 더욱 인구에 회자되었다. 시인 육유는 일찌기 "옥식아미목이(玉食峨嵋木耳), 금제병혈어(金齑丙穴魚)"라는 싯구로 사천요리를 찬미했다.
다만 멸절적인 도살이후, 누구도 그 정교하교 복잡한 요리를 전승할 수 없었다. 성도평원의 도살이후, 그저 장헌충의 대군이 비교적 적게 진입한 사천남부 의빈, 자공등지에 일부 고대사천인들의 찹쌀을 잘 먹는 습속을 보존하고 있을 뿐이다.
사천요리는 왜 홀로 "마(麻)"한가.
사천사람들은 자고이래로 '신향(辛香)을 좋아했다" 매운 맛의 음식물을 좋아한 것이다. 단 고래로 '신향'을 좋아한 사람은 사천인만이 아니다.
화초, 생강과 수유(茱萸). 이는 중국의 가장 전통적인 3대 매운맛 양념재료(調料)이다. 그중 화초는 가장 자주 볼 수 있는 매운맛 양념재료이다. 최근 들어 고대 식보(食譜)의 연구에 따르면 고추가 중국에 들어오기 전의 2000여년에 걸친 역사에서, 5분의 1가량의 식품은 모두 화초를 사용했다. 화초는 일찌기 중국 장강유역 상,중,하류, 황하유역 중,하류에서 모두 대량의로 재배되었다. 화초가 식용으로 최전성기에 도달한 시기는 당(唐)나라이다. 채보(菜譜)에서 화초를 사용한 음식물의 비율이 37%를 점한다.
화초는 일찌기 매운맛 양념재료중 의문의 여지없이 지배적인 지위를 차지했고 그 식용범위는 기본적으로 전중국에 분포된다. 중국음식중의 중요성은 오늘의 고추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이다.
다만 명말이래, 매운맛 양념재료는 음식에서 출현하는 빈도가 점점 낮아지기 시작한다. 많은 요리에서 더 이상 화초를 원료로 하지 않는다. 이는 부분적으로는 이 시기에 보급된 호초(胡椒)의 충격때문이지만, 많은 전통적인 매운맛지역의 입맛도 청담(淸淡)해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비록 사람의 입맛기호는 항상 바뀌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한 지구 혹은 한 국가의 사람들이 아무런 이유없이 하나의 음식전통을 창조하거나 버리지 않는다. 화초의 쇠락은 기실 중국인의 명청이래 육식구조의 변화와 중대한 관련이 있다.
매운맛 양념재료의 양대 공능은 첫째, 읍식물의 신맛을 없앤다. 둘째는 '한습(寒濕)'을 없앤다. 청나라이전에 중국의 인/지비율은 1인당 5무이상이었다. 인구수가 비교적 적어서, 대량의 삼림과 초지가 주요한 산지는 아직 개간되지 않았고, 산양형(散養型)의 목축업에 광활한 생존공간을 제공해주었다. 소고기, 양고기가 중국인의 육식구조에서 비교적 큰 비중을 차지한다. 소고기, 양고기의 비린맛은 각지에서 널리 매운맛 양념재료를 사용하게 만드는 중요한 원인이었다.
그러나, 명나라때 도입된 감자, 옥수수, 고구마등 고산량, 한지(旱地)작물은 지속적인 인구증가와 산지개발을 가져온다. 대량의 초지와 임지가 경지로 바뀐다. 소,양의 목축업은 이로 인하여 위축된다. 가정에서 기르는 돼지와 가금류가 음식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크게 늘어났다. 돼지고기는 주요한 육식이 되고, 그것은 확실히 그다지 매운맛 양념재료로 비린맛을 억누를 필요가 없었다.
그래서 청나라때의 금수류 음식중 화초가 음식에 들어가는 비율이 명나라때의 59%에서 23%로 줄어든다. 육식구조의 이러한 변화는 많은 지역이 이미 매운맛 판도에서 퇴출되고, 청담온화한 입맛을 추구하는 것으로 바뀐다.
청나라말기에 화초가 음식에 들어가는 비율은 이미 겨우 18.9%밖에 점유하지 못한다. 기본적으로 모두 사천분지 일대로 몰리게 된다. 화초는 그저 매운맛을 좋아하는 사천인들만 좋아하게 된다. 사천요리는 천하에서 "독마(獨麻)"의 지위를 차지하는 것은 바로 이 시기에 형성된다.
오늘, 식탁에 고추가 없는 사천요리는 이미 상상할 수 없는 일이 되었다. 다만, 사실상, 고대사천요리가 사라진 후 고추가 사천에서 크게 유행하기까지 중간에는 일백여년의 시간이 있다.
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매운 맛
일찌기 16세기 하반기, 마닐라에서 비단무역을 진행하던 중국상인은 대량의 백은을 가지고 돌아오는 동시에 고추도 가지고 왔다. 1591년 <준생팔전>에는 "번초(番椒)"라고 불렀다. 이는 아마도 고추가 해외에서 전래되어 왔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당시 유행한 호초(胡椒)와 마찬가지로 매운 맛을 내는 양념재료로 썼다.
절강의 고추 전래는 아마도 고추가 중국에 진입되는 몇 개의 노선중 하나일 것이다. 기타 가능한 노선은 비단길을 따라 서북지역으로 전래되고, 네덜라드식민자들이 대만에 전래되는 등등이 있다. 절강에 고추가 출현한 것과 거의 같은 때 동북지구에도 17세기초에 강 하나를 사이에 둔 조선에서 고추가 들어온다. 이는 아마도 나중에 화북지구 내지 지금의 동북 조선족들이 고추를 즐겨먹는 원인일 것이다. 다만 이런 추측은 사료에서 확인이 되지는 않는다.
고추는 화초의 예전 지위를 보유하지는 않을 운명이다. 고추는 비록 가장 먼저 절강에 전래되었지만, 절강의 북방과 이웃한 강소성은 가경7년(1802년)이 되어서야 <태창주지>에 고추에 관한 기록이 나타난다. 강소의 대부분지구에서 고추를 심게 된 것은 민국이후의 사정이다. 남쪽의 광동은 건륭년간부터 계속 고추에 대한 기록이 있었다. 광동의 사람은 예로부터 입맛이 청담(淸淡)했다. 민국시기에 고추가 재배되었지만 아주 보편적이지는 않다. 조사에 따르면, 민국20년 광동성 각현중에서 단지 자금, 평원 두 현의 야채에 고추가 있었다.
그러나, 비록 남북으로의 전파는 쉽지 않았지만, 장강중하류지구는 매운맛을 좋아하는 기호는 여전했다. 이는 고추가 중국의 전파가 장강을 따라 위로 올라가서 서진했고, 호남에서 하나의 차급중심을 형성한다. 강서, 귀주, 호북과 사천의 고추는 모두 호남인이 전해준 것일 것이다. 이들 지구도 중국에서 입맛이 가장 매운 고추를 먹는 구역이 된다. 그래서 사천인들은 매워도 두려워하지 않고, 귀주인은 매운 건 두려워하지 않고, 호남인은 맵지 않을까 두려워한다는 말이 나옸다.
호남인은 매운 것을 먹는 것은 호남인의 성격과 특수한 관계가 있다고 생각한다. 고추를 먹는 것은 혈액순환을 촉진시켜, 거한제습의 효과가 있을 뿐아니라, 일종의 흥분작용도 한다. 그러나 장기간 맵게 먹으면 한 사람의 성격의 양성에 영향을 주는지 아닌지는 현재로서는 아직 알 수가 없다. 맵게 먹는 핵심지대인 호남에서 근대이래 적지 않은 목이 잘리는 것은 바람에 모자가 날리는 정도로 생각하는 혁명인물을 많이 배출했다. 모택동은 고추를 먹는 것은 사람의 성격을 충동적이고 성깔이 불같게 만든다고 여겼다. "고추를 먹지 않으면 혁명을 못한다" 그러나, 성도인은 고추를 먹지만 성격은 온순하고 동북인은 고추를 먹지 않지만 성격은 충동적이다. 이는 설명한다. 이런 '고추의 성격인상"은 혹은 고추를 먹는 사람들의 일종이 자아암시이다.
귀주는 지금까지도 자주 무시되는 매운 것을 먹는 지역이다. 고추는 강소절강을 거쳐 귀주까지 전해진다. 중간에 여러 개의 성을 거친다. 귀주는 아마도 중국에서 가장 먼저 고추를 식용으로 먹은 지역일 것이다. 귀주에는 소금이 부족하고, 고금이래로 그러하다. 강희때 전제의 <검서>에는 이렇게 쓰고 있다: "소금이 귀해서 대신 고추를 쓴다. 고추의 성격은 매운데, 매운 것을 짠 것을 대신하는 것이다. 이는 혀를 속이는 것이고, 올바른 맛이 아니다." 강희제때의 <사주부지>에는 약품류에 이런 기록이 있다: "해초(海椒), 속명은 랄화(辣火)이고, 토묘(土苗)는 이를 소금대신으로 쓴다" '해초'는 고추의 별칭으로 호남에서 왔다. 이는 마치 귀주고추가 온 길을 보여주는 것같다. 이를 약품으로 분류하는 것은 고추가 이전의 주요 용도는 조미품이 아니었던 것같다.
건륭제때, 귀주에서 고추를 먹는 것은 이미 유행이 되었다. 이때 귀주 인근의 주변지구도 보편적으로 고추를 식용으로 쓰기 시작한다. 호남서부지구에서 고추를 먹는 것도 정식기록이 있다. 건륭제때 <진주부지>에서 이때 '진인은 랄자(辣子)라고 칭한다. 이를 호초를 대신해서 쓴다. 그것을 취하는 자는 청홍을 모두 그 껍질을 잘라서 식품으로 쓴다."
사천요리를 재건하다.
나중에 사천인들은 비록 맵게 먹는 것으로 유명하지만, 그들이 고추를 접촉한 것은 훨씬 뒤이다. 건륭14년(1749년) 성도 교외지구 대읍현의 현지에서 처음으로 고추에 관한 기록이 나온다: "훈채류(葷菜類): 진초(秦椒), 일명 해초(海椒)" 이는 호남인들보다 반세기는 늦다. 다만 사천의 고추먹는 습속은 거의 호남과 동시에 보급된다. 사천인들은 전통적인 기호와 습관을 유지하는 동시에, 다시 매운 맛을 음식에 추가시킨다. 번초는 사천지구에서 해초라고 불리는 경우가 가장 많고, 랄초(辣椒)와 랄자(辣子)가 그 다음이다. 랄자는 기실 호남인들이 발명한 칭호이다. 이는 마치 사천고추의 주요 전래로가 청초의 인구이동과 관련있다는 것을 증명해주는 것같다. 가경연간, 사천 금당, 화양, 온강, 숭녕, 사홍, 홍야, 성도, 강안, 남계, 비현, 협강, 건위등의 현지 및 한주, 자주의 주지에 모두 고추에 관한 기록이 있다. 고추가 광범위하게 분포하고 있다는 것은 사천인들의 음식습관중에서의 지위가 날로 중요해진다는 것을 증명한다.
광서이후, 민간에 널리 식용으로 쓰는 외에, 경전적인 사천요리의 채보에도 대량으로 고추를 쓴 기록이 있다.
청나라말기 부숭구의 <성도통람>에는 고추가 이미 사천요리의 주요 보조재료가 되었다고 나온다. 회과육(回鍋肉)이 여기에 처음으로 채보에 오른다. 고추는 이때부터 사천요리의 가장 주요한 재료 및 가장 선명한 인기(印記)가 되었다. '사천'요리는 새로 탄생한 것이다.
오늘날 사천인들이 자랑하는 사천요리는 모두 300여년의 지혜가 모인 것이다. 오늘날 사천요리는 전통적인 유파에 따라 구분하면, 상하방(성도,면양지구를 중심으로 함), 하하방(중경, 만현지구를 중심으로 함), 소하방(자공, 의빈), 자천방(자중을 대표로 하는 타강유역의 각 현 위원, 인수, 병연, 부순등을 포함함)등으로 나뉜다. 다만 어떻게 구분하든지 모두 '辣'과 '麻'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비록 아주 교묘하고 변화가 많지만 동진 이래로, 천여년동안 이름을 떨친 사천요리는 아마도 그 '중용(中庸), 정세(精細)'의 지도사상에서는 유사한 것같다.
고추판도
고추의 세력범위는 마침내 기본적으로 획정되었다. 늦어도 19세기초에 중국의 대다수 성의 문헌에는 고추가 나타나고 묘사된다. 그것은 강희연간에 절강으로 전래되어 들어와 중서남지구의 호남, 귀주로 전래된다. 조선에서 전래된 고추는 동북에서 화북지구의 하북으로 전래된다; 옹정연간에는 다시 서부지구의 섬서, 화북지구는 산동으로 확대된다; 건륭연간에 화동지구에서 안휘, 복건, 대만까지, 호남주변지구는 확장되어 광서, 광동, 사천, 강서, 호북으로, 서부는 확장되너 감숙까지 간다; 가경연간에 화동지구는 다시 강소로 확대된다; 도광연간에는 화북지구에서 산서, 하남, 내몽고남부로 확대된다.
200여년의 시간을 들여, 고추는 중국에 널리 퍼진다. 이때 화동, 화중, 화남, 서남(운남제외), 화북, 동북, 서북의 고추재배지역이 이미 하나로 연결된다.
재배지구가 신속히 확장하는 것에 비하여, 고추를 먹는 지구는 안정적으로 늘어났다. 서남대학 교수 남용 교수는 '매운정도'를 가지고 중국의 고추지도를 나누었다: 사천, 호남, 호북, 운남, 귀주, 섬서남부를 위주로한 장강중하유는 중랄구(重辣區); 북경, 산동을 핵심으로 하여 동으로는 조선반도, 서로는 신강의 북방까지 미랄구(微辣區); 강소에서 광동까지, 기본적으로 고추를 먹지 않는 동남연해의 담미구(淡味區). 이는 기실 근 200년전의 고추먹는 판도와 그다지 큰 변화가 없는 것이다.
남용교수는 매운 향으로 비린내를 제거할 필요가 없는 상황하에서 반드시 일조량이 적고, 겨울이 춥고, 기후가 다습하여 한기와 습기를 제거하는 방면에서의 수요로 매운 맛을 먹는 습관이 길러졌다고 한다. 이 음(陰), 냉(冷), 습(濕)은 맵게 먹는 3가지 요건이다. 하나라도 없으면 안된다. 장강중상류의 맵게 먹는 지구는 왕왕 태양복사가 적고, 산이 많고 안개가 많으며, 겨울에 차갑고 습하다. 이런 곳은 당연히 중랄구이다. 북방의 미랄구는 겨울에 차갑지만 일조가 강렬하다. 대부분 내륙은 비교적 건조하다. 그래서 매운 맛에 대한 취향이 중랄구보다는 훨씬 약하다. 동남연해지구는 비록 습도가 높지만 겨울에 온난하다. 그리고 일조량이 비교적 강렬하다. 그래서 매운 것을 먹을 필요가 없다.
절강서부의 천도호 일대는 아마도 이런 판단에 하나의 방증을 제공할 것이다. 천도호는 산이 많고, 안개가 많다. 겨울은 음랭하고 기후는 다습하다. 이곳은 매운 것을 좋아한다. 이는 연해 담미구에서 하나의 예외지역이다.
기후요소는 지질학에서 기본적인 지형을 결정하는 내력작용과 유사하다. 그것은 맵게 먹는지 싱겁게 먹는지를 결정하는 기본적인 경계선이 된다. 매운 문화의 우수한 제품인 수자어(水煮魚), 모두화과(毛肚火鍋), 타초어두(剁椒魚頭)등등은 유수퇴적, 풍화침식등의 외력작용과 유사하게 매운 것을 먹는 경계선을 갈수록 모호하게 만들고 있다. 새로운 사천요리 혹은 호남요리는 아마도 기나긴 우기에 사람들을 더욱 고추에 친근하게 만들어 주는 것같다.
사천인이라고 하여 담백하게 먹지 않는 것은 아니고, 절강인이라고 하여 맵게 먹지 않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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