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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문화/중국의 음식

청나라때의 4가지 잔인한 요리

by 중은우시 2014. 8. 26.

작자: 미상

 

도광20년(1840년) 아편전쟁이후, 청왕조는 점차 내리막길을 걷는다. 도광말기 '국가는 씀씀이를 대폭 줄인다' 그러나, 매년 하방공정(河防工程, 홍수방지공사)의 비용은 오히려 늘었고 줄지 않았다.

 

역사기록에 따르면, "도광연간, 동하, 남하는 매년 수리하는 외에 따로 공사를 했다. 동하는 150여만냥을 들였고, 남하는 270여만냥을 들였다. 10년동안 4천여만냥을 들인 것이다. 

 

광서제때의 중신 이악서(李岳瑞)는 <춘빙실야승>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남하는 매년 수리비로 5,6백만금이 들었다. 그러나 실제 공사에 투입되는 자는 열에 하나밖에 안되었다. 나머지는 모조리 관리들이 마구 써버렸다. 의복, 음식, 차마에 돈을 물쓰듯이 쓰고 서로 겨루기까지 하였다. 그들의 호화사치는 제왕보다도 더 했다." 책에는 도광연간 남하하도총독의 몇 가지 요리를 소개하고 있다. 그 재료선택, 요리방법 및 먹는 방법은 입을 다물 수 없을 정도이다.

 

첫째, 저배육(猪背肉). "만드는 법은 돼지를 실내에 가두고, 돼지잡는 사람 여러 명이 각각 막대기를 하나씩 들고, 쫓아가며 때린다. 돼지는 아파서 소리를 지르며 도망치게 된다. 도망치면 칠수록 더욱 심하게 때린다." 돼지가 힘이 빠져서 바닥에 엎어져서 움직이지 않으면, 등에서 고기 1점을 베어낸다. 개략 50여마리의 돼지가 있어서 비로소 1석(席)의 요리를 만들 수 있다. 돼지는 등을 얻어맞으니 전력을 다하여 아픈 곳을 막으려 하고, 그러다보니 돼지의 모든 정화는 등에 모이게 된다. 나머지 고기는 비린내가 심하고 맛을 잃어서 버리고 쓰지 않는다. 손님이 그 사실을 알고는 참담하게 생각하자, 돼지잡는 사람은 입을 삐죽이며 비웃었다: 어찌 저다지도 자잘하단 말인가. 내가 요리하기 시작한지 두 달 되었지만, 이미 내 손으로 수천마리의 돼지를 잡았는데...

 

둘째, 팽아장(烹鵝掌). 거위를 큰 쇠로 만든 새장에 넣는다. 새장의 아래에는 불붙은 숯을 놓아둔다. 새장의 옆에는 이미 조제된 장즙(醬汁)을 놓아둔다. 얼마후 새장의 아랫부분 쇠가 발갛게 달아오른다. 거위는 새장 안에서 원을 그리며 돌고, 발바닥이 아파서 참지를 못한다. 그래서 수시로 옆에 놓아둔 장즙을 마신다. 거위가 죽으면, "온 몸의 지고(脂膏)가 두 발바닥에 모인다. 두께는 수 촌(寸)에 이른다. 나머지 고기는 모조리 먹지 않는다."

 

셋째, 식타봉(食駝峰). 건장한 낙타를 골라서, 기둥에 묶는다. 그 후에, 뜨거운 탕을 낙타의 등에 붓는다. "서서 죽으면 모든 정화가 봉우리에 모인다. 나머지 낙타고기는 모두 버린다." 1석(席)에 필요한 낙타는 보통 3,4마리이다.

 

넷째, 흡후뇌(吸猴腦). 잘 생긴 원숭이를 골라서, 비단옷을 입힌다. 네모난 탁자의 가운데 동그란 구멍을 뚫는다. 이 구멍은 원숭이의 머리를 넣기에 맞을 정도이다. 원숭이머리를 넣고 다시 나무기둥으로 고정을 시켜서 원숭이가 움직이거나 빠져나가지 못하게 만든다. 그리고 나서 원숭이 머리의 털을 모조리 깍고, 두개골의 피부도 벗겨낸다. "원숭이는 고통을 참지 못하여 애절하게 운다. 그 후에 뜨거운 탕을 정수리에 붓는다. 그리고 철추(송곳)로 두개골을 깬다. 여러 손님들은 은수저를 원숭이골에 넣어서 뇌를 찾아서 마신다. 매 손님들이 먹을 수 있는 것은 겨우 2,3수저 정도일 뿐이다."

 

심지어, 두부를 만드는 방법도 수십종이다. "그리고 반드시 수개월전에 재료를 사들이고, 기술자를 보낸다. 수백금이 들어야 한 젓가락의 요리를 만들 수 있다."

 

1석의 주연은 왕왕 삼일밤낮이 이어진다. "그래서 하공(河工)에서 손님에게 연회를 베풀면 왕왕 술자리에서 사람이 피곤하여 각자 떠나고, 끝까지 남아있는 사람이 없었다." 그리고, 십일, 반달이면 한번씩 연회를 베풀었다. 공금을 유용하여 먹고 마시는 기풍이 횡행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