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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삼국)

화흠(華歆): 관녕할석(管寧割席)

by 중은우시 2014. 5. 30.

글: 성건(成健)

 

화흠은 한말위초때의 사람이다. 사람들은 '관녕할석'이라는 고사로 그를 알고 있다.

 

관녕과 화흠은 젊었을 때 친한 친구였다. 두 사람은 채소밭에서 호미로 잡초를 제거하다가 땅 위에 금조각(金片)이 떨어져 있는 것을 본다. 관녕은 종전과 똑같이 호미질을 하며, 금조각을 기왓장이나 돌맹이처럼 여긴다. 화흠은 금조각을 집어서 쳐다본 후에 땅 위에 버린다. 그들 둘은 한 자리(席)에 앉아서 글을 읽고 있었는데, 한 고관대작이 수레를 타고 문앞을 지나갔다. 관녕은 여전히 책에 집중하였는데, 화흠은 책을 버리고 달려나가 구경을 했다. 그래서 관녕은 칼을 들어 자리를 잘라버리고는 화흠에게 말한다: "너는 더 이상 나의 친구가 아니다."

 

이 고사에서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관녕은 고고하고 세상에 휩쓸리지 않는 고아한 선비이고, 화흠은 부귀를 탐하고, 명리를 추구하는 속인이라고. 존류폄조의 <삼국연의>에 조위의 중요 모신인 화흠은 추염부세(趨炎附勢), 조주위학(助紂爲虐)의 인물로 그려져 있다. 다만 사실상 화흠이라는 사람은 그렇지 않았다.

 

화흠에게는 왕랑(王朗)이라는 친구가 있다. 한번은 화흠과 왕랑이 배를 타고 난을 피해 도망갔는데, 누군가 배에 올라타고자 했다. 화흠은 그 자리에서 곤란하다고 말한다. 왕랑이 말한다: "배가 아직 넓어서 자리가 있는데, 왜 안된다고 하는가?" 나중에 도적이 쫓아오자, 왕랑은 배에 태웠던 사람을 던져버리려고 한다. 그러자 화흠이 말한다: "처음에 태울지 말지를 망설였는데, 바로 이런 상황을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이미 태웠는데, 어찌 상황이 긴박하다고 하여 그를 버릴 수 있겠는가?" 이 일로 화흠은 사람들의 좋은 평가를 받는다.

 

화흠은 일찌기 예장태수를 지낸 바 있다. 그는 관료로서 청렴하고 백성들을 잘 보살폈다. 나중에 양주자사가 병사하자 현지백성들은 화흠이 그 직위를 이어받도록 추천했다. 태수부의 앞에 모여서 수여러 달동안 청했으나, 완곡하게 거절한다. 동오는 예장을 취하고자 하였고, 화흠은 고립되어 어쩔 수 없이 동오에 투항한다. 손책은 그를 상빈으로 모신다. 손책이 죽은 후, 조조는 황제에게 글을 올려 화흠을 조정에 돌아오도록 할 것을 청한다. 손권은 화흠을 보내고 싶어하지 않았다. 화흠은 말한다: "당신은 항상 황명을 잘 받들었다. 그것은 조조와 우의를 맺는 것이다. 그러나 이 우의는 공고하지가 않다. 이번에 내가 그쪽에 가면 당신과의 감정이 더욱 깊어질 터인데, 더 좋은 일이 아닌가?" 손권은 그의 말을 듣고는 기꺼이 응락한다. 화흠의 친한 친구들이 그 소식을 듣고 속속 달려와서 작별인사를 한다. 그리고 많은 금은주보를 선물한다. 화흠은 오는 사람을 막지 않았지만, 선물에는 표시를 해놓았다. 떠나는 날, 그는 선물을 모두 펼쳐놓고 배웅하는 사람들에게 말한다: "나는 차마 여러분들의 정의를 거절하지 못해서 선물을 모조리 받았다. 나는 원래 죄가 없는 사람이다. 그런데 이번에 혼자서 먼 길을 가면서, 이렇게 많은 재물을 가져가면 살신지화를 불러오게 될 것이다. 여러분들이 나를 위해서 만전지책을 강구해달라." 사람들은 할 수 없이 각자 선물한 것을 돌려받았고, 내심으로 화흠을 더욱 존경하게 된다.

 

관녕은 화흠과 절교했지만, 화흠은 관녕을 계속하여 좋은 친구로 여겼다. 위문제 조비가 등극한 초기, 대신들에게 독행특립(獨行特立)한 은사를 추천하도록 한다. 화흠은 관녕을 추천한다. 몇년후 조비가 붕어하고 조예가 즉위하니, 그가 위명제이다. 화흠을 태위에 앉히나, 화흠은 병을 핑계로 사양한다. 그리고 태위의 자리를 관녕에게 주라고 한다. 위명제는 응락하지 않고, 조회때 사람을 보내어 화흠에게 조서를 내린다: "짐이 새로 조정의 사무를 넘겨받아, 일리만기(日理萬機)하는데 시비를 제대로 분간하지 못하여 잘못된 결정을 내릴까봐 우려된다. 다행히 좌우에서 좋은 신하들이 보좌하고 있다. 그런데 당신은 계속하여 병을 핑계로 사양하고 있다. 주군을 평가하고 골라서 관직에 나가려 하지 않고, 영화부귀를 포기하며 자리를 탐하지 않는 자는 고대에도 있었다. 다만 주공, 이윤은 그렇지 아니했다. 깨끗한 몸으로 혼자서 산림에 은거하는 것은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당신은 그렇게 할 수 없도록 하겠다. 오늘 조회에 짐과 문무백관들이 이곳에서 당신이 올 때까지 기다리겠다." 그리고 보낸 사람에게 당부한다: "화흠이 몸을 일으키고 나면 조정으로 돌아오라." 화흠은 만부득이 성지를 받들어 조회에 나간다.

 

화흠은 조위의 중신으로 관직이 상국(相國), 사도(司徒)에 이르러 삼공의 반열에 든다. 조정의 봉록도 적지 않았다. 황상도 수시로 후한 상을 내렸다. 다만 화흠은 이들 재물의 대부분을 친구들의 어려움을 도와주는데 썼다. 황제가 하사산 여노비조차도 각자 시집을 보내준다. 나중에 화흠은 오히려 생활이 빈곤해져서 집안에 다른 것은 말할 것도 없이, 최소한의 양식도 없었다. 조비는 탄식을 금치 못한다: "사도는 국가에서 얻기 힘든 인덕한 어른이다. 그가 한 행위는 천지의 도리에 들어맞고, 민중의 마음을 얻는다."

 

관녕은 확실히 고도유세(高蹈遺世)하여 요동으로 올겨가서 30여년을 지낸다. 죽을 때까지 관직에 나가지 않는다. 화흠이 관직에 나간 후 백성들에게 도움을 주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여겼으며, 정치적 업적이 탁월하고 몸가짐도 깨끗했다. 조정의 존경을 받았을 뿐아니라, 백성들도 그를 추대했다. 일생을 돌아보면, 화흠의 품행과 행위가 어찌 관녕보다 못하겠는가? 이를 보면 한 사람을 평가하는 것은 실제로 젊었을 때의 한 두가지 별로 중요하지 않은 사소한 것만 보아서는 안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