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황쟁(黃峥)의 <<왕광미방담록>>중에서
한번은, 주은래(周恩來) 동지가 나를 연안으로 돌아오라고 통보했다. 나는 바로 다시 왕가평(王家坪)에 머물렀다. 한번은 무회(舞會)에서 모주석의 경위참모인 용비호(龍飛虎)가 나를 유소기(劉少寄)에게 소개해주었다. 유소기는 나에게 북경 특히 학교의 상황을 물어 보았다. 마지막에 그는 나에게 물었다: "너는 당원이냐?" 나는 아니라고 답했다. 당시 나는 아주 쑥스럽게 생각했다. 나는 유소기에게 말했다: "중앙지도자동지들이 우리와 같이 해방구에 온 청년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지 없는지 모르겠다" 그러자 그는 "그건 내가 시간이 있을지 없을지를 봐야겠다"고 말한다. 이것이 내가 유소기를 처음 만난 때였다. 나는 당시 유소기의 당내의 지위나 신분을 잘 몰랐다. 다음 날, 우리들 북경군군조부와 남경담판대표단에서 온 동지들이 주덕(朱德) 총사령관을 보러 갔다. 강극청(康克淸) 큰언니는 우리를 데리고 유소기가 사는 요동으로 가서 앉아 있었다. 이것이 내가 두번째로 유소기를 본 것이었다.
1947년 3월 5일, 주덕 총사령관의 비서를 맡고 이썬 황화(黃華)동시가 나에게 통지하여, 유소기가 있는 곳에 가서 얘기하라고 했다. 원래는 내가 처음 유소기를 만났을 때, 중앙지도자동지들이 우리들 청년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지 물어봤기 때문에, 나는 이 일을 기억하고 있었다.
유소기와 얘기를 한 후에 나는 다시 입당신청서를 한장 내밀었다. 이틀이 지나지 않아 통지를 받았는데, 호종남(胡宗南)의 부대가 연안으로 진공하므로, 연안의 기관이 철수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우리들 외사인원으로 편성된 부대는 먼저 와요보(瓦窑堡)에 도착했고, 4월에 산서성 임현에 도착했다. 5월, 상급은 우리를 진수분구(晋綏分區)로 가서 토지개혁에 참가하라고 했다. 생각도 못하게, 유소기 동지도 채가애(蔡家崖)에 와 있었다. 그는 나에게 물었다: "너는 여기서 토지개혁에 참가할 거냐? 아니면 우리를 따라 진찰기(晋察冀)로 갈거냐?" 나는 막 이 곳에 도착했고, 아직 토지개혁업무를 해보지도 않았고, 게다가 막 입당신청서를 냈는데, 돌연 가버리면 그건 좋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관료의 말투를 흉내내어 답변했다: "나중에 업무상 필요하면 그 때 보자"
나는 거주지로 되돌아와서 요리조리 생각해 봤는데, 아무래도 잘못한 것같았다: "그가 나에게 이 말을 한 게 무슨 뜻일까?" 나중에 생각해보니 유소기는 나에게 자기와 함께 가자고 한 것이었다. 그러나, 당시에 나는 감히 함부로 생각할 수는 없었다.
1948년 삼팔절을 전후하여, 우리는 토지개혁업무를 끝낸다. 그리고 중공중앙의 소재지인 서백파(西柏坡)로 되돌아왔다. 한번은 왕병남(王炳南)이 외사조를 조직하여 무회를 열었다. 유소기가 왔다. 나와 얘기하는 도중에 그는 한마디를 했다: "시간이 있으면 나 있는데 와서 놀자." 그 말을 들었기 때문에, 나는 일요일에 한번 가보기로 결정했다. 이번에는 얘기할 시간이 비교적 길었다. 나중에 그는 나와 잘 지내고 싶다는 뜻을 전했다. 그리고 그는 나이가 비교적 많고, 업무가 바쁘고, 또 아이도 있으니, 나보고 잘 생각해 보라고 했다. 나는 "나이 따위는 내가 신경쓰지 않는다. 그저 정치수준에서 우리는 차이가 너무 많이 난다. 내가 너와 함께 있으면 내가 뭘 주의해야하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나는 너의 과거개인상황도 모른다." 유소기는 나에게 대답했다: "무슨 문제를 주의해야 하는지는 네가 안자문(安子文) 동지를 한번 찾아가보면 된다; 만일 나의 과거역사를 알고 싶으면 네가 이극농(李克農) 동지에게 물어보면 된다" 마지막으로 나는 특별히 한 마디를 물어보았다: "네가 다른 혼인관계는 없느냐?" 유소기는 바로 말했다: "만일 네가 그 쪽 상황을 알고 싶다면 네가 등대저(鄧大姐, 등영초 즉 주은래의 부인)에게 물어보면 된다" 유소기는 나보고 안자문등의 사람들을 찾아가보라고 했다. 나중에 나는 정말로 찾아갔다. 안자문은 중앙조직부 부부장이다. 내가 찾아가바 바로 당의 기밀규율을 얘기해 주었다: "네가 유소기 동지와 함께 있으면서, 물어보지 말아야 할 것은 물어보지 말고, 보지 말아야 할 것은 보지 말라. 지도자동지들의 대화는 듣지 말라." 등등. 마치 나와 유소기가 이미 같이 사는 것처럼 말했다. 서백파에 있던 기간동안에 왔다 갔다 하면서 우리는 관계를 확정했다. 다만, 나는 유소기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의 입당신청이 비준된 후에 결혼을 하자." 유소기도 동의했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후 나의 입당신청은 비준되었다.
결혼을 결정한 후, 유소기는 나에게 짐을 그가 거주하는 곳으로 옮기라고 했다. 나는 결혼에 대하여 아직도 옛날식 관념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그에게 물었다: "내가 이렇게 네가 사는 곳으로 이사간다면 뭐가 되겠는가? 기관의 대식당에서 선포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유소기는 필요없다고 말했다. 결혼은 바로 두 사람의 일이라는 것이다.
1948년 8월 21일, 유소기는 그의 위사장을 보내어 내 짐을 옮기는데 도와주었다. 이 날, 외사조의 동지들은 큰 케이크를 만들어서, 함께 유소기가 사는 곳으로 가지고 왔다.
마침 저녁식사후에 식당에서 무회가 열렸다. 유소기와 나는 함께 갔다. 모주석, 주은래 동지도 모두 있었따. 주은래 동지는 아주 총명했다. 그는 우리가 결혼식을 거행하지 않은 것을 알고는 모주석에게 말했다: "우리 함께 소기동지의 집으로 가서, 그들이 사는 곳을 봅시다" 이렇게 하여 나와 소기는 모주석, 주은래동지를 따라 집으로 갔다. 돌아온 후, 주석, 은래, 소기 동지는 사무실에서 얘기하고, 몇몇 여성동지와 나는 또 다른 방에서 케이크를 잘랐다. 우리는 주석, 은래, 소기에게 한 조각씩을 주었다. 그들은 웃고 얘기하면서, 케이크를 먹었다. 모주석은 그의 딸 이눌(李訥)에게 한 조각을 주겠다고 가지고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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