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호각조(胡覺照)
형주(荊州)의 패배와 이릉(夷陵)의 패배라는 두 번의 타격을 입은 후, 서촉(西蜀)은 인재결핍이 더욱 두드러진다. 제갈량이 국가를 운영하는 초기에 이로 인하여 골머리를 앓는다. <화양국지>의 기록에 따르면, 서촉은 일찌기 성도의 남쪽에 높은 누대를 지어 사방의 현명한 인재를 끌어모았다고 한다. 이때 끌어모은 인재는 익주(益州) 출신으로 한정되었다. 그래서 익주출신 인사인 광한(廣漢) 사람 이소(李邵), 파서(巴西)사람 마근(馬勤)이 상부(相府)에서 연(掾, 속하관직의 통칭)을 지낸다, 건위(犍爲)사람인 오량(五梁)은 공조(功曹, 한나라때는 군수, 현령이 아래에 공조를 두었다. 인사를 담당한다)가 되고, 재동(梓潼) 사람 두미(杜微)가 주부(主簿, 문서와 사무를 담당하는 관리. 오늘날의 사무처장 혹은 비서실장에 해당함)를 맡는다. 이를 보면, 이때, 일군의 익주출신 인사들이 서촉의 정치무대에 등장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만 모두 하급관리였다. 진정으로 중용된 것은 오히려 형주출신 인사들이었다. 이후의 9년을 보면, 제갈량은 형주출신 방파체계를 건립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 형주출신의 중견(中堅) - 장완(蔣琬)과 동윤(董允)
장완은 자가 공염(公琰)이고 영릉(零陵) 상향(湘鄕) 사람이다. 당초, 장완은 주서좌(州書佐)라는 미천한 신분으로 유비를 따라 익주로 들어와서 광도현(廣都縣) 현장이 된다. 하루는 유비가 광도로 놀러왔다. 거기서 장완이 정무는 전혀 돌보지 않고 오로지 술을 마시고 취해있는 것을 발견한다. 엄중한 독직행위에 유비는 대노한다. 장완을 죽여 백성들을 민심을 달래고, 다른 관리들에게 경고를 하고자 했다. 군사인 제갈량은 장완을 위하여 유비에 용서를 빈다: "장완은 국가를 다스릴 인재입니다. 그에게 현 하나를 다스리게 해서는 안됩니다. 인재는 정무를 수행하면서 백성들을 편안하게 먹고 살게하는 것을 근본으로 삼으면 되고, 형식을 완비했는지는 따지지 않으셔도 됩니다." 확실히 제갈량이 든 이유는 좀 억지스럽다. 큰 인재가 작은 일을 잘 처리못하는 것은 이해할 수가 있다. 그러나, 아예 일을 하지 않는 것은 설명이 되지 않는다. 술에 취해서 일을 전혀 처리하지 않는 것은 심각한 독직행위이다. 당연히 법률의 제재를 받아야 한다. '인재는 정무를 수행하면서 백성들을 편안하게 먹고 살게 하는 것을 근본으로 삼으면 된다'는 것도 말이 되지 않는다. 술에 취해서 정무는 전혀 돌보지 않는 현령이 어찌 백성들을 편안하게 먹고 살도록 할 수 있겠는가? 이는 그저 정무를 돌보지 않고, 백성들을 먹고 살기 힘들게 만들어 원성이 길거리에 자자하게 만든 것일 뿐이다. 제갈량이 사정을 하므로, 유비는 장완의 관직을 박탈했을 뿐 더 이상 책임추궁은 하지 않는다. 이로 인하여 생명을 건졌을 뿐아니라, 이후 재기할 수 있는 발판도 마련한다. 얼마후, 장완은 십방현(什邡縣) 현령에 임명된다.
아마도 이전의 교훈이 있어서인지 장완은 십방현에서 탁월한 업적을 낸다. 유비가 한중왕(漢中王)으로 자칭하면서, 장완은 성도로 옮겨와 상서랑(尙書郞)이 된다. 이 직위는 유비의 곁에서 일을 하는 것으로 오늘날의 말로 하자면 비서역할이라 할 수 있다. 건흥원년, 승상 재갈량은 승상부를 연다. 그리고 장완에게 동조연(東曹掾, 오늘날의 말로 하면 조직부장, 녹봉2천석이상의 관리를 담당함)의 직위를 수여한다. 유비가 죽은 후, 제갈량은 장완을 참군(參軍)으로 승진시킨다. 건흥5년, 제갈량은 본영을 한중(漢中) 면현(勉縣)으로 옮긴다. 장완은 장사(長史) 장예(張裔)와 성도승상부에 남아서, 제갈량을 대신하여 정무를 처리한다. 건흥8년, 장예를 대체하여 승상부 장사가 되고, 무군장군(撫軍將軍)의 직를 받아서 사실상 승상부의 최고책임자가 된다. 동시에 동윤, 비위(費褘), 곽유지(郭攸之), 향총(向寵)등과 황제 유선을 포위, 통제, 연금하여, 궁정에서 권력쟁탈의 변수가 발생하지 않도록 하였다.
장완에 있어서, 제갈량은 구명지은이 있다. 형주출신인 관계로 당연히 목숨을 걸고 제갈량을 쫓아, 제갈량을 위하여 전심전력을 다 한다. 제갈량이 매번 출병할 때마다, 비록 서촉이 나중에는 백성들고 피폐해졌지만, 장완은 왕련(王連)과 손을 잡고, 최대한 재물을 긁어모아서 전방에 군수물자를 공급한다. 제갈량은 이로 인하여 그를 높이 평가한다. 제갈량은 스스로 살 날이 많지 않다고 여겼을 때, 유선에게 비밀리에 장완을 승상직무를 승계할 사람으로 추천한다.
동윤은 자가 휴소(休昭)이고 형주(荊州) 남군(南郡) 사람이다. 군을 장악한 중랑장 동화(董和)의 아들이다. 유비가 태자를 책봉할 때, 동윤은 사인(舍人)으로 봅히고, 세마(洗馬)로 승진한다. 세마는 말 앞에 서서 달린다는 뜻으로 비교적 낮은 등급의 시종관이다. 제갈량이 보정(輔政)을 하면서, 동윤이 황문시랑(黃門侍郞)으로 승진한다. 이는 황제의 조령을 전달하는 가까운 신하이다. '북벌'전에, 제갈량은 그로 하여금 궁중보좌직을 맡게 하였다.
이는 동윤의 재능중 한가지 면으로 무시할 수 없는 것이다. 즉 형주출신의 동윤의 부친 동화는 유비를 위하여 군대를 장악하는 중랑장이었고, 군사인 제갈량과 공동으로 유비좌장군대사마수의 업무를 주재관리한 바 있다. 동화는 사람됨이 겸손하고, 일처리는 근면하고, 생활은 검소했다. 그리고 제갈량과 우의도 깊었다. 동윤에 있어서, 제갈량은 부친과 같은 배분의 인물이다. 그러니 그에게 의지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제갈량에게 있어서, 조카뻘이 된다. 당연히 형주출신 방파체계의 중요구성원이 된다.
제갈량은 <출사표>에서 유선에게 당부한다: "시중 곽유지, 비위, 시랑 동윤등은 모두 선제가 뽑아서 폐하에게 남겨준 좋은 신하들입니다.....궁내의 일은 대소를 불문하고, 모두 그들을 존중해야 합니다. 그렇게 해야만 새는 것을 막고 성과를 거둘 수 있습니다. 만일 충성스럽고 선량한 언론이 없다면, 동윤등을 참함으로써 그들의 태만을 징계하시옵소서." 동윤을 참하라는 말은 겁주는 말이기는 하지만, 진실한 의도는 동윤등의 담량을 키워주는 것이다. 그들로 하여금 마음놓고 유선은 통제감독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제갈량은 얼마후 비위를 참군에 임명하고, 동윤을 시중으로 승진시켜 호비중랑장이 되어 황궁의 어림군을 통할하도록 청한다. 곽유지는 무능하여 그저 이름만 걸어놓았을 뿐이다. 유선에게 간하고 막고 감독하는 임무는 동윤이 맡았다. 유선은 그를 그저 두려워하였을 뿐이다. 당연히 동윤이 재직하면서 좋은 일도 많이 했다. 예를 들어 유선의 궁녀를 뽑으라는 지시를 시종 듣지 않은 것이다. 유선이 환관 황호를 총애하였는데, 동윤은 자주 유선을 통렬하게 비판하고, 황호를 엄하게 질책하곤 했다.
2. 마속(馬謖): 제갈량은 왜 그를 중용했는가?
유비가 영안궁(永安宮)에서 탁고(托孤)할 때, 제갈량에게 이런 말을 한 바 있다: "마속은 말이 실제보다 넘치니, 크게 쓸 인재는 못된다. 그대가 잘 살펴보아라." 마속이 어떤 자이길래, 유비까지도 이렇게 관심을 나타냈을까. 죽기 직전까지도 그에 대한 당부를 할 정도란 말인가.
마속은 자가 유상(幼常)이고, 양양(襄陽) 의성(宜城) 사람이다. 마량(馬良)의 동생이다.마량은 형제가 5명인데, 모두 재능이 출중했다. 특히 마량이 가장 뛰어났다. 유비가 형주를 점거했을 때, 마속은 형인 마량을 따라 유비의 휘하에 투신한다. 마량의 관직은 시중에 이른다. 유비의 중요한 막료였다. 마씨형제중 가장 재능이 있는 마량의 관직이 시중에 머물렀다는 것을 보면 마씨오형제의 재능은 그 정도의 한계를 나타낸 것같다. 마속은 종사의 신분으로 유비를 따라 익주에 출병한다. 일찌기 면죽, 성도 두 현의 현령을 맡기도 하고 나중에 월준군태수로 옮긴다.
마속이 피살될 때 39살이었다. 유비가 제갈량에게 그에 관해 말한 때는 그의 나이 33살때이다. 서촉조정에는 왕후장상이 많다. 그런데, 유비는 아무도 언급하지 않고, 오로지 변방지구의 젊은 군수 한 명을 신경썼다는 것인데, 좀 이상하지 않은가. 이것은 제갈량과 마량의 관계에서부터 얘기해야 할 것이다. <삼국지>에 주석을 단 배송지의 추측에 따르면, 마량은 "제갈량과 결의형제이거나 혹은 사돈간이다. 그래서 마량은 제갈량을 존형(尊兄)이라고 불렀다." 제갈량에게 존형이라고 부르는 자는 마량을 제외하고는 서촉의 문무대신들 중 아무도 없었다. 그런 점에서 배송지의 말이 크게 틀리지는 않을 것이다. 유비가 특별히 마속을 크게 쓰지 말라고 당부한 것은 아마도 자신의 사후에 제갈량이 마량과의 친근한 관계때문에 마속을 중용하지 않을까 우려해서일 것이다.
제갈량이 국가를 운영한 후, 유비의 당부를 듣지 않고, 즉시 마속을 참군으로 승진시킨다. 동한시대에는 참군이라는 직위가 없었다. 조조가 승상의 신분으로 조정을 좌지우지할 때 이 직위를 만든다. 그 뜻은 '참승상군사(參丞相軍事)"이다. 제갈량이 이 직위를 그대로 썼다. 참승상군사는 군사에 어느 정도 참여하는가. 일정하지는 않다. 이는 완전히 승상이 그를 얼마나 신임하느냐에 따라 다르다. 마속이 참군을 맡은 후, 제갈량의 신임을 깊이 받는다. 그리하여 하루종일 함께 의논을 했다.
225년 제갈량의 남정때, 제갈량은 마중나온 조정의 모든 문무대신을 놔두고 마속을 자신의 차량으로 끌어올려, "비록 여러 해동안 서로 상의했지만, 오늘 헤어지게 되니, 그대가 다시 나에게 좋은 계책을 말해달라."고 한다. 마속은 이렇게 말한다; "남중은 험준하고 멀리 있다는 것을 믿고 중앙(서촉)에 따르지 않은지 오래 되었습니다. 비록 오늘 패배시키더라도, 내일 다시 반란을 일으킬 것입니다. 오늘날 승상은 나라의 온 힘을 기울여 북벌을 진행하고 있는데, 그들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고 바로 반란을 일으키게 될 것입니다. 만일 그들을 모조리 죽여서 후환을 없애려고 한다면 그것은 어진 사람의 할 일이 아니고, 성급하게 할 수도 없는 일입니다. 무릇 용병의 도리는 마음을 공격하는 것이 상책이고 성을 공격하는 것은 하책이며, 마음으로 싸우는 것이 상책이고, 병력으로 싸우는 것이 하책이라고 했습니다. 원컨대 승상께서는 그들의 마음을 복속시키시옵소서."
마속이 말한 군사상식은 이미 같이 몇년을 의논한 것이다. 그런데도 다시 마차로 끌어올려 의논할 필요가 있었을까? 필요하다고 하더라도, 마속은 참군이라는 직위를 가지고 있다. 왜 데리고 함께 출정하지 않았을까? 데리고 가지 않은 것은 필요가 없다는 것이고, 마지막으로 얘기를 나눈 것은 그저 핑계이다. 자신의 차량에 끌어올리는 특수한 대우를 해준 것으로 조정신하들에게 메세지를 전한 것이다. 그 뜻은 사람들에게 암중으로, "나는 파격적으로 마속을 기용하겠다. 너희들도 마음의 준비를 갖추고 있어라"라고 말하는 것이다. 과연 제갈량의 제1차북벌때 고급장수들의 일치된 의견을 물리치고, 숙장 위연(魏延) 혹은 오익(吳益)을 놔두고, 마속을 뽑아서 독전부의 직위를 준다. 독전부는 부사령관 혹은 전적총지휘에 해당한다. 이를 보면 제갈량이 얼마나 마속에게 기대를 걸었는지 알 수 있다.
3. 비위: 유선의 곁에서 빼내오다.
비위의 자는 문위(文偉)이다. 형주 강하맹현(江夏鄳縣)(지금의 하남성 나산) 사람이다. 어려서 부모가 모두 죽고, 친척중에서 부친뻘의 백인(伯仁)에게 의탁하여 산다. 백인의 고모는 유장(劉璋)의 모친이다. 유장이 익주를 통치할 때, 사람을 보내어 백인과 비위를 성도로 모셔온다. 유비가 익주를 빼앗은 후, 유비는 태자를 세우는데, 비위는 태자사인(太子舍人)이 된다. 얼마후에는 서자(庶子)로 승진한다. 명실상부한 태자당의 중견역량이 된다. 유비가 죽은 후, 유선이 황위를 승계한다. 비위는 황문시랑이 된다. 이는 황제의 조령을 전달하는 가까운 신하이다.
비위는 서촉정권의 큰 인재이다. 이것은 아래의 몇 가지 사건으로도 알 수 있다. 비위는 문건을 보는 속도가 놀라울 정도로 빨랐다. 보통 사람보다 몇 배나 빨랐다. 그리고 한번 보면 잊지를 않았다. 보고를 듣고 정무를 처리할 때, 계속 손님을 만났다. 한편으로 식사를 하면서 한편으로 계속하여 농담을 하였고, 손님과 바둑도 두었다. 그러나, 이로 인하여 정무를 태만히한 적은 없다. 나중에 동윤도 비위의 일처리방식을 배워서 하려고 했다. 그러나 10일도 되지 않아 급한 일들이 산더미처럼 쌓인다. 동윤은 감탄하며 말한다: "사람의 재능이 어찌 이렇게 큰 차이를 나타낸단 말인가. 나는 그와 비교할 수도 없구나."
연희7년, 위나라의 집권자인 조상(曹爽)이 대군을 몰고 한중으로 진공했다. 비위는 촉군을 지휘하여 흥세(興勢, 지금의 한중 정군산)에서 대진하고있었다. 전투가 임박하여 서신이 날아온다. 삼군총사령관으로서 얼마나 바쁠지는 충분히 짐작이 갈 것이다. 이때 광록대부 내민(來敏)이 와서 작별인사를 하며 같이 바둑을 두자고 한다. 비위는 기꺼이 응락하고 아주 진지하게 바둑을 둔다. 얼굴에는 전혀 초조함이나 피로한 기색이 나타나지 않았다. 내민은 감탄하며 말한다: "나는 바둑을 두고 싶었던 것이 아니다. 그저 이를 통하여 당신을 시험해 본 것이다. 당신은 정말 적합한 인물이다. 분명 위군을 물리칠 수 있을 것이다." 과연 내민이 생각한 바대로, 비위는 촉군을 지휘하여 한걸음 먼저 정군산의 유리한 지형을 확보한다. 조상은 이미 진군할 수가 없게 된다. 참군 양위(楊偉)가 주장하여, 조상은 할 수없이 철군하게 된다. 다만 비위는 병력을 위군의 퇴로에 배치해두었다. 조상의 6,7만대군은 힘들게 싸워서 겨우 빠져나갈 수 있었다. 사상자는 아주 많았다. 운수에 사용하는 소,말,당나귀,노새등은 모조리 죽고 다쳤다. 관중 서쪽일대의 인력과 물자는 모조리 바닥이 날 정도였다. 감숙에 있는 소수민족의 원성도 길거리에 자자했다.
당연히 이는 나중의 일이지만, 비위의 재능은 제갈량도 좋게 보았다. 그래서 온갖 방법을 강구하여 비위를 형주출신 방파체계내로 끌어들이려 한다.
남정에서 승리한 후 회군할 때, 문무대신들이 교외로 수십리나 영접을 나온다. 제갈량은 마속을 회유한 수단을 그대로 쓴다. 문무대신들은 놔두고 비위를 차량으로 끌어올린다. 승상이 그에게 무상의 영광을 준 것이다. 비위는 당연히 무슨 뜻인지 알았고, 당연히 그에 보답해야 했다. 그래서 이름뿐인 황제 유선을 떠나 실권인물인 제갈량에게 의탁한다.
4. 양의(楊儀): 찬밥에서 일약 승천한 인물
양의의 자는 공위(公威)이고, 양양(襄陽) 사람이다. 원래 조위의 형주자사 부군(傅群)의 주부였는데, 부군을 배반하고 관우에게 투항한다. 그리고 하급인 공조 직위를 받는다. 그는 군현의 아전이다. 그는 명을 받아 성도로 가서 유비를 배알하고, 유비의 인정을 받는다. 그리하여 좌장군병조연, 상서등의 직위를 받는다. 유비가 동정할 때, 상서 양의는 상서령 동파(董巴)와 아무런 원칙없이 싸운다. 이렇게 그는 풍성이 저열하다는 것을 드러낸다. 유비는 그의 직위를 낮추어 관할구역이 없는 홍농태수라는 허직(虛職)만 걸어준다. 명실상부한 찬밥신세가 된 것이다.
형주출신인 관계로, 유비가 죽은 후 건흥3년(225년), 승상 제갈량이 남정을 준비할 때, 그를 참군으로 임명하여, 승상부의 일을 대행하도록 한다. 그는 명실상부한 승상대리가 된 것이다. 건흥5년(227년), 양의는 제갈량을 따라 한중으로 간다. 건흥8년(230년) 양의는 장사로 승격하고, 수군장군(綏軍將軍)의 직을 추가로 받는다. 그후 제갈량이 출병할 때마다, 다른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않는 양의는 행군의 배치, 양초의 조달과 운송을 책임진다. 그는 명실상부한 제갈량의 오른팔, 왼팔이 된 것이다. 유비는 양의를 찬밥대우했지만, 제갈량은 달랐다. 양의는 일거에 도약하여 제갈량 바로 다음가는 2인자가 된다.
전체 북벌과정에서, 양의는 정서대장군(征西大將軍), 양주목(凉州牧)으로 부사령관 위연과 계속하여 마찰을 빚는다. 그러나 제갈량은 그냥 놔두고 간섭하지 않아서, 실제로는 양의가 위연을 견제했다. 제5차북벌이 실패한 후, 제갈량이 병사하기 전날, 양의를 총사령관대리로 임명하여 철수를 책임지게 한다. 이를 보면 제갈량이 양의를 얼마나 신임했는지 알 수 있다.
아쉽게도 양의는 실력이 모자랐다. 성도로 돌아온 후, 장완이 제갈량의 뒤를 이어 상서령, 익주자사가 되나, 양의는 아무런 수하병사가 없는 중군사(中軍師)에 불과하게 된다. 양의는 자신이 경력이나 재능으로 보아 장완보다 낫다고 여겨, 중군사라는 직책에 불만을 품고 있었다. 그리하여 자주 얼굴에 직위에 대한 불만을 드러냈고, 탄식하는 소리가 오장육부의 깊은 곳에서 터져나오곤 했다. 동료들은 모두 양의가 구설수에 올라 연루될까봐 우려하여 그를 멀리한다.여러해동안 교분이 있던 군사 비위가 그를 찾아가서 다독이지만, 양의는 오히려 광망하게 소리친다: "그때 승상이 서거할 때, 내가 군대를 이끌고 조위에 투항했더라면, 오늘같은 이런 지경에 처했을 것인가? 정말 후회막급이다." 비위는 이 말을 유선에게 보고하고, 양의는 삭탈관직되고 평민으로 되어 한가군(漢嘉郡, 지금의 사천성 아안시 동북)으로 유배간다. 그러나 양의는 여전히 반성하지 않고 다시 상소를 올려 비방한다. 언사가 격렬하여 결국 하옥되고, 자살로 일생을 마친다.
5. 강유(姜維): 후래거상(後來居上)
강유의 자는 백약(伯約)이고 천수(天水) 기성(冀城) 사람이다. 부친은 어려서 돌아가시고, 모친과 서로 의지하며 살았다. 그는 공명이록을 좋아하여 개인적으로 망명자들을 수하로 끌어모았다. 그는 농사짓는 일에 만족하지 않았다. 유비가 죽은 후, 조위측에서는 서촉에 더 이상 인물이 없다고 여겨서 아무런 전쟁준비를 하지 않는다. 제갈량의 제1차 '북벌' 때, 천수태수는 공무로 외출하여 신분이 낮은 주종사(州從事) 강유가 양서(梁緖), 윤상(尹賞)등과 수행했다. 제갈량이 병력을 이끌고 대규모로 침입하자, 성을 지키는 수비군은 아무런 전쟁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게다가 우두머리마저 없게 되어 천수의 여러 현은 속속 투항한다. 태수는 강유등이 딴 마음을 품고 있다고 의심하여, 밤을 새워 상규(上邽,. 지금의 천수시)로 도망친다. 강유등은 그 뒤를 따라갔으나, 성문은 이미 닫겨 있었고 열어주지 않았다; 강유등은 기성으로 돌아갔지만 역시 받아주지 않는다. 두려움과 불안 속에서 강유등은 제갈량에게 투항한다. <삼국연의>에서 강유를 거두는 장면은 순전히 나관중이 상상력으로 쓴 것이고 사실에 기반한 것이 아니다.
강유가 투항한 후, 제갈량은 그를 중용한다. 창조연(倉曹掾, 군중의 양초를 관리함)이 되고, 봉의장군(奉義將軍)의 직함을 추가로 받으며, 당양정후(當陽亭侯)의 작위도 받는다. 그리고 성도를 지키고 있는 장예, 장완에게 서신을 보내어 이렇게 말한다: 강유는 정치적으로 충성스럽고 믿을만하며, 재능이 출중하다. 초주(譙周)나 마량(馬良)보다 훨씬 낫다. 양주(凉州)에서 얻기 힘든 인재이다." 만나자마자, 강유를 일개 주종사에서 장군으로 발탁하고 후작의 작위까지 내렸으며, 그의 재능이 초주, 마량보다 낫다고 평가한다. 이는 당연히 그를 심복으로 거두려는 의도도 숨어 있는 것이다. 동시에 강유로 하여금 중호보병 5,6천명을 훈련시키게 한다. 그리고 성도로 가서 황제를 알현할 수 있게 하는 영광도 갖게 해준다. 얼마 후, 강유는 중감군(中監軍), 정서장군이 되어, 제갈량 북벌의 훌륭한 조력자가 된다.
제갈량의 강유에 대한 평가가 실제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분명히 편파적인 견해이다; 만일 이 평가가 공정하다고 한다면 역시 양심에 찔린다. 이후의 실제상황을 보면, 강유는 인물임에 틀림없다. 진서대장군, 양주자사, 위장군(衛將軍)이 되고, 평양후(平襄侯)에 봉해진다. 대사마 비위와 함께 녹상서사(錄尙書事)이다. 서촉의 간성중 하나가 된 것이다. 확실히 재능은 있었다. 마지막에는 '복국'의 미수군사정변으로 죽는다. 가히 '마음 속에 한실(漢室)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9차에 걸친 북벌은 모두 실패한다. 이를 보면 병법을 잘 안다고 할 수는 없고, 어느 정도 맹목적인 색채가 있다. 서촉이 멸망한 후에도 복국을 기도하였으나 그는 군심,민심을 아예 잘 몰랐다. 생각이 주도면밀했다고 할 수는 없었다.
강유가 제갈량에 투항했을 때 모친과 흩어진다. 나중에 모친의 서신을 받는다. 그에게 당귀(當歸)를 찾아달라는 내용이었다. 강유는 이렇게 회신한다. "양전백경(良田百頃), 부재일무(不在一畝); 단유원지(但有遠志), 부재당귀야(不在當歸也)" 모자 두 명은 서로 수수께끼놀이를 한 것이다. 모친은 그가 다시 조위(曹魏)로 돌아오기를 바랬다. 그래서 '당귀'라는 약재이름을 쓴 것이다. 이를 통해서 서촉의 이목을 피하고자 한 것이다. 강유는 그러나, 개인의 원대한 뜻을 펴기 위하여, 장래의 공명리록을 위하여, 모친은 신경쓰지 않았다. 작은 것을 보면 큰 것을 알 수 있다. 공명이록을 위하여 모친을 버린 사람이 '마음 속에 한실을 담고 있을까?' 확실히 그가 추구한 것은 그저 개인의 뜻을 실현하는 것이고, 다른 사람을 위하여 자신을 희생하는 것이 아니었다.
제갈량은 특별히 강유를 편애한다. 그것은 깊이있는 인식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제갈량이 자신의 형주출신 방파체계를 하루빨리 건립하려는 조급한 마음에서이다. 천수출신의 강유는 기반이 없다 그래서 포섭대상이 된다; 게다가 강유는 '정씨지학(鄭氏之學)'을 좋아했다. 법가학파에 속하는 것이다. 그러면 제갈량과 같은 유파가 된다.
6. 장예(張裔): 사실상의 승상대리
장예의 자는 군사(君嗣)이며, 성도(成都) 사람이다. 유장때, 일찌기 어복현령을 지낸 바 있다. 그리고 주서종사 (州署從事) 겸 장하사마(帳下司馬)를 지낸 적도 있다. 유비가 익주를 빼앗을 때, 장예는 병력을 이끌고 덕양에서 장비를 막는다. 패배하여 성도로 물러난다. 유장의 명을 받들어 유비와 투항조건을 담판한다. 유비는 유장에게 일정한 예우를 해주기로 약속하고 그의 안전을 보장한다. 유비는 익주를 빼앗은 후, 장예를 파군태수에 임명한다. 다시 불러들인 후 사금중랑장을 맡긴다. 이는 무기와 농기구를 주조하는 책임자이다.
남방에 위치한 익주군에서 고정(高定), 옹개(雍闓), 맹획(孟獲)등이 이끄는 소수민족의 반란이 일어나 태수 정앙(正昻)을 죽이고, 사람을 보내어 손권과 연락한다. 유비는 장예를 익주태수로 보내어 부임하게 한다. 옹개는 병력을 보내어 장예를 생포한 후 손권에게 보낸다. 그리하여 손권의 감옥에 갇힌다.
유비가 죽은 후, 제갈량은 등지(鄧芝)를 보내 오촉관계를 회복한다. 그리고 그는 손권에게 장예를 풀어줄 것을 요청한다. 장예는 동오에 여러 해동안 갇혀 있었고, 여러번 장소를 변경한다. 손권조차도 어디에 있는지를 모를 정도였다. 등지의 요청을 받고, 손권은 사람을 보내어 장예를 찾는다. 그리고 장예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그에게 이런 말을 한다: "촉국의 탁씨 과부(탁문군)는 사마상여와 사분(私奔, 정식결혼하지 않고 남녀가 도망쳐 함께살다)했다.귀국의 풍속은 어찌 이 모양인가." 장예는 이렇게 대답한다: "탁씨 과부는 주매신(朱買臣)의 처보다는 현숙하고 총명합니다." 두 사람의 말도 서로 의미를 품고 있다. 손권은 익주과부 탁문군이 사분한 이야기를 들어 장예가 서촉으로 돌아가는 것을 풍자했다. 장예는 포로가 된 후에 동오로 넘겨지고 다시 촉으로 돌아가는 것은 아주 불명예스러운 일이라는 것을 말한 것이다. 그러자 장예는 동오에서 발생한 주매신의 처가 가난뱅이를 싫어하고 부자를 좋아하여, 자살한 이야기를 들어 반박한 것이다. 손권은 다시 말한다: "네가 돌아간 후, 분명 촉을 위하여 힘을 다할 것이다. 다시는 농민처럼 시골에서 농사를 지으며 평생을 마치지는 않을 것이다. 너는 앞으로 나에게 어떻게 보답할 것인가?" 장예는 말한다: "나는 죄를 지어 귀국하는 것이고, 앞으로 조정에서 나의 운명을 결정할 것이다. 만일 요행히 목숨을 보전한다면, 나의 58세이전의 생명은 부모가 내려준 것이고, 이후의 생명은 대왕께서 저에게 하사해주신 것입니다." 나온 후 장예는 자신이 바보행세를 하지 못한 것을 후회하며 급히 배에 올라, 빠른 속도로 간다. 과연 손권은 사람을 보내어 그를 추격한다. 그러나 장예는 이미 서촉의 영안지역으로 들어가 버린 뒤였다.
성도로 돌아온 후, 제갈량은 그를 참군에 임명하고 서부사(署府事)하게 한다. 그리고 영익주치중종사(領益州治中從事)로 삼는다. 제갈량이 한중으로 옮겨갈 때, 장예는 사성교위(射聲校尉)의 신분으로 승상부에 남아서 사실상의 대리승상이 된다. 이 직위는 이전에 유비가 그를 익주태수에 임명한 것보다 높은 것이다. 장예에 있어서, 동오에 여러 해동안 갇혀 있으면서 다시 하늘을 볼 수 없을 거라고 여겼는데, 돌연 지위가 제갈량의 바로 다음 가는 서촉정권의 2인자가 된 것이다. 그러니 감격해마지 않을 수 없다. 하물며 그를 다시 살려준 은혜도 있다. 비록 익주출신이지만, 그는 자연스럽게 형주출신방파체계의 핵심구성원이 된다.
7.왕련(王連): 잔혹하게 수탈하다.
왕련의 자는 문의(文義)이고, 남양(南陽) 사람이다. 유장때 촉에 들어와 재동현령에 임명되었다. 유비가 익주를 빼앗을 때, 부대를 이끌고 재동으로 쳐들어가자, 왕련은 성을 굳게 걸어닫고 투항하려 하지 않았다. 유비는 억지로 핍박하지 않았다. 성도가 함락된 후, 왕련은 나와서 투항한다. 그리고 십방현령에 임명된다. 나중에 사염교위(司鹽校尉)에 임명되어 염철의 전매를 책임진다. 왕련은 상사에게 잘보이는 것만 알 뿐, 민중의 사활에는 관심이 없는 혹리(酷吏)이다. 사염교위로 있을 때, 가격을 인상하여 마음대로 수탈해서 서촉정권에 큰 이익을 가져다 준다. 이로 인하여 중용된다. 여의(呂義), 두기(杜祺), 유간(劉干)등은 평생 고위직에 있었고, 모두 왕련에게 발탁되었다. 왕련은 나중에 촉군태수, 흥업장군이 된다. 다만 그때도 염철전매는 책임졌다.
유비가 죽은 후, 왕련은 잡패장군에서 둔기교위(屯騎校尉), 영승상장사(領丞相長史)에 임명되고, 평양정후가 된다. 왕련은 제갈량을 아주 존경했다. 제갈량이 남정을 준비할 때, 왕련은 남정을 하지 말 것을 건의하며 이렇게 말한다: "이곳은 풀조차 자라지 않는 곳입니다. 그리고 전염병이 횡행합니다. 당신은 일국의 희망입니다. 함부로 떠나서는 안됩니다." 제갈량이 그의 말을 듣지는 않았지만, 왕련의 자신에 대한 충성은 확인할 수 있었다.
유비의 대외전쟁과 제갈량의 '북벌'은 모두 왕련이 민중을 수탈해주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요립(廖立)은 왕련이 잔혹하게 수탈했다고 비난했으나 제갈량은 그의 말을 듣지 않았을 뿐아니라, 오히려 대장 요립에게 죄를 뒤집어 씌워 유배를 보낸다. 이를 보면 제갈량이 왕련을 얼마나 중시했는지 알 수 있다.
8. 요화(廖化): 촉중무대장의 '선봉'
요화는 자가 원검(元儉)이다. 양양(襄陽) 사람이며, 일찌기 전장군 관우의 주부였다. 관우가 형주에서 실패한 후, 요화는 어쩔 수 없이 동오에 투항한다. 다만 계속 서촉으로 돌아오고 싶어한다. 그래서 죽은 것처럼 속여서 사람의 이목을 가리고 모친을 데리고 밤낮을 달려 서쪽으로 간다. 자귀(秭歸)에서 유비를 동오정벌을 준비하던 만난다. 유비는 그를 의도태수에 임명한다.
유비가 죽은 후, 제갈량은 그를 파격적으로 승상참군에 발탁한다. 얼마후에는 우거기장군(右車騎將軍), 가절(假節), 영병주자사(領幷州刺史)가 되고, 중향후(中鄕侯)에 봉해진다.
문관으로서, 아무런 공로도 없이, 지방최고책임자에 오르고, 후작의 작위를 받는다. 이는 요화가 형주출신이라는 것 말고는 해석이 안된다. 제갈량의 심복이 될 수 있었기 때문에 그는 군대를 지휘할 수 있었다.
<삼국연의>에는 강유의 구벌중원때, 요화를 선봉에 임명한다. 역사상 요화가 선봉장을 맡은 기록은 없다. 아마도 세상사람들은 요화의 군사적 재능이 평범하다는 것을 은연중에 알고 있었다는 것같다. 그래서 "촉중무대장 요화작선봉(蜀中無大將 廖化作先鋒)"이라는 말을 만들어낸 것일 것이다.
요화는 비록 우거기장군, 영병주자사등의 군정요직을 쥐고 있었지만, 일생동안 별로 한 일이 없다. 유선이 조위에 투항한 후 낙양으로 옮겨갈 때, 요화는 유선을 따라가는 도중에 타향에서 병사한다. 이것이 그가 중용된 후 유일하게 기록된 일이다.
9. 종예(宗預)
종예의 자는 덕염(德艶)이다. 남양(南陽) 안중(安衆) 사람이다. 건녕 연간에 그는 장비를 따라 익주로 들어간다. 공적도 없었고 직위도 없었다. 건흥초년(223년) 제갈량이 권력을 장악한 후, 즉시 종예를 상부주부로 임명한다. 얼마 후 참군우중랑장이 된다. 한나라때의 규정에 따르면, 중랑장은 봉록2천석의 현관이다. 황궁의 금위군을 책임지고, 황제의 출행안전을 책임진다. 그리고 낭중령(광록훈)을 도와 낭관 및 종관등을 평가 선발한다. 즉 아주 중요한 직위이다. 종예에게 이런 직위를 담당하게 한 것은 유선이 철저히 연금되고, 관리의 임명권을 완전히 장악했다는 뜻이다.
아쉬운 것은 제갈량이 국가권력을 장악한 9년여의 기간동안, 종예는 아무런 드러나는 공로가 없다. 그래서 그의 전기에 9년동안은 공백으로 남는다.
제갈량이 죽은 후, 종예는 두번 동오에 사신으로 가서 우의를 다지는 경력을 갖는다. 손권의 질문에 교묘하게 답변한다. 비록 제갈량이 죽었지만, 서촉에는 여전히 형주출신의 장완, 비위가 조정을 장악하고 있어, 이번 사신에서 돌아온 후 종예는 시중, 상서로 승진한다.
연희10년(247년), 종예는 다시 동오에 사신으로 간다. 귀국때 손권은 종예의 손을 붙잡고 눈물을 흘리며 말한다: "당신은 항상 사명을 지고 양국의 우의를 도모했다. 지금 당신은 나이가 이미 많고, 나도 이미 늙었다. 아마 한번 더 만나기는 어려울 것같다." 그리고 종예에게 큰 진주를 1곡(斛) 내린다. 귀국한 후 후장군으로 승진하고 영안도독이 된다. 이어서 정서대장군이 되고 관내후의 작위를 받는다.
종에는 아무런 공이 없이 고귀한 자리에 오른 전형적인 인물이다. 형주출신이라는 원인 이외에, 다른 이유로 해석이 되지 않는다.
오나라는 위나라가 촉국의 중신들이 없어진 후 촉국을 취할까 걱정하여, 파구(巴丘)에 수비병 1만명을 추가로 파견한다. 한편으로 촉국을 지원하려고 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기회를 잡아 위나라와 함께 촉국을 나눠가질 생각이었다. 촉국은 이 사실을 알고는 영안에 수비병을 증가시켜 만일의 사태에 대비한다. 종예는 사명을 품고 동오에 사신으로 간다. 손권은 종예에게 말한다: "동오와 서촉은 두 나라이면서 한 가족과 같다. 내가 듣기로 당신들이 백제성의 방어부대를 증강시켰다는데 그것은 무엇때문인가?
" 종예가 대답한다: "신이 알기로는 동오가 파구의 수비병을 증가시켜, 서촉도 백제의 수비병을 증가시킨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모두 사정과 형세가 그렇게 만든 것이니 추궁할 일이 아닙니다." 손권이 크게 웃는다. 그의 예의에 벗어난 직언에도 화를 내지 않고 칭찬한다.
이상의 내용을 종합하면, 제갈량의 제1차북벌을 전후해서까지 신속히 발탁된 형주출신이거나 형주출신에 가입한 장수로는 양의, 마속, 강유, 요화, 종예등이 있고, 문관으로는 장완, 비위, 장예, 동윤, 왕련등이 있다. 이는 형주출신 방파의 체계가 이미 형성되어 날개를 달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제갈량은 이에 의지하여 하늘을 날 수 있게 된 것이다.
제갈량이 사람을 잘못 썼다고 할 수는 없다. 그중의 장완, 비위, 강유등은 아주 우수한 인재이다. 다만 탁군(涿郡) 출신, 익주(益州)출신들 중에서도 인재는 많았다. 그들은 왜 형주출신들처럼 기회를 잡지 못했을가. 당연히 방파사상이 제갈량의 기준을 좌우한 것이다.
형주출신방파체계는 이미 날개를 달았다. 다만 반대세력도 여전히 존재했다. 제갈량의 눈앞에 놓은 임무는 바로 이들 반대파들을 몰아내고, 타격하고, 배제하는 것이다. 요립, 이엄(李嚴), 위연(魏延)이 그들 중 대표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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