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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정치/링지화사건

링지화가족의 홍(紅)과 흑(黑)

by 중은우시 2015. 1. 13.

글: 소생(小生)


링지화가족


링지화의 부친 링후예(令狐野)는 아명이 사상(四祥)이며, 산시성 핑루현 창러진(常樂鎭) 홍양촌(洪陽村) 사람이다. 일찌기 섬감녕변구의원 의무과장을 지낸다. 1950년대 중반에서 1960년대초반까지 섬서성 화청간부의료원 부원장을 지낸다. 자녀는 4남1녀를 두었고 이름은 차례대로 링루센(令路線), 링정처(令政策), 링팡쩐(令方針), 링지화(令計劃), 링완청(令完成)>이다. 그중 링팡쩐은 딸이다.


링지화의 큰형인 링루센은 1977년 사고로 사망한다. 처는 쑨슈민(孫淑敏)이며, 아들 링후젠(令狐劍)과 딸 링후얜(令狐燕)을 두었다.


링지화의 둘째형인 링정처는 남자, 한족, 1952년 5월생. 산시성 핑루현 사람. 산시대학 중문과 간부전수과 한어어문학전공 전일제전과졸업, 1968년 10월부터 업무를 시작. 1973년 11월 중국공산당 가입. 산시성위당교 경제관리전공 방송통신수업으로 본과학력. 2008년부터 산시성 정협부주석.


링지화의 누나 링팡쩐. 여, 한족. 1954년생, 현임 산시성 윈청시 부시장 왕젠캉(王健康)의 처


링지화의 동생 링완청, 남, 산시성 윈청시 핑루현 사람. 다른 이름은 "왕청(王誠)". 중국골프협회 회원. 처는 CCTV 아나운서 리핑(李平). 신화사에서 근 20년간 근무한 후, 링완청은 2003년을 전후하여, 신화사의 산하 중국광고연합총공사 총재에서 중앙국유기업의 산하기업인 중국화싱(華星)자동차무역(집단)공사 총재가 된다.


링지화의 전환점


​1962년, 52세의 연안간부 링후예는 일가족을 데리고 고향으로 돌아간다. 그는 자신의 출생지이며 본부인과 장녀가 생활하는 링루현 창러공사 홍양촌으로 돌아가지 않고, 창러공사집진부근의 허우촌(後村)에 정착한다. 이때 그의 셋째아들 링지화는 겨우 6살로, 아직 학교에 입학하지 않았다.


1949년에서 1959년경까지, 링후예의 처는 그와의 사이에 4남1녀를 낳는다. 링후예는 신문에서 당시 가장 많이 나오는 단어를 찾아내서 다섯 자녀의 이름으로 삼는다; 노선, 정책, 방침, 계획, 완성. 인터넷에서는 건국후 링후예가 공안부에서 일한 적이 있다고 하고, 일찌기 섬서화청간부요양원 원장을 맡았다고도 한다. 다만 링후예의 건국후 확실한 직위변천 및 그가 왜 52세라는 나이에 관직을 버리고 일가족과 함께 시골로 내려갔는지에 대하여 현재 알 수는 없다. 그러나 현재 이미 103의 고령인 링후예는 아직 건재하다. 은퇴간부로서 산시의 한 간부휴양소에서 만년을 보내고 있으며 부성장급 의료대우를 받고 있다.


연안간부의 아들로서, 링씨집안의 다섯자녀는 비록 농촌에서 자랐지만, 어려서부터 가정환경이 괜찮았다. 부모는 매월 급여로 225위안을 받았는데, 이는 당시 전체촌의 노동자들의 수입에 해당했다. 링후예는 자녀들에게 엄격했고, 자녀 5명은 모두 부친의 요구에 따라 일을 한다. 어려서는 보리알갱이를 줍고, 나이가 들면 땅을 판다. 빈 시간이 있으면 링후예는 아이들을 자신의 집 요동앞에 세우고 강연을 하게 시켰다. 링후예는 작은 스툴에 앉아 하나하나 평가했고, 요동의 위에서는 호기심으로 온 이웃들이 박수를 치고 환호를 했다.


1973년, 16세의 링지화는 지식청년으로 산시성 핑루현 인쇄공장에 들어가 2년간 인쇄공으로 일한다. 1975년 그는 운좋게 현단위(縣團委)로 옮겨간다. 간부에서 부서기가 되고, 정식으로 노동자에서 부과장급 간부가 된다. 


1978년, 링지화는 산시성 윈청지위로 옮겨간다. 금방 그는 선발되어 베이징으로 가고 단중앙 선전부에서 일을 한다. 이때부터 그의 관료생애에서 아주 중요한 16년의 단중앙생활을 한다. 1983년-1985년 그는 단중앙 산하의 단간부를 양성하는 중국청년정치학원의 정교전공으로 학습한다. 그곳에서 그는 자신의 처가 되는 구리핑(谷麗萍)을 만난다.


1985년, 링지화는 단중앙으로 돌아와 선전부 이론처 부처장이 된다. 3년후, 단중앙서기처 판공실주임으로 승진한다. 그후 전후로 단중앙판공청부주임, 단중앙선전부부장을 맡는다. 


1995년, 링지화는 사무실을 전문동대가에서 중남해로 옮긴다. 그가 중남해에서 맡은 첫번째 업무는 중앙판공청 조연실(調硏室) 3조(組) 책임자였다. 그후 조연실 부주임, 주임, 중앙판공청 부주임이 된다. 그동안 중앙기구편제위원회판공실 부주임이 된다. 이때부터 그는 자신의 권력촉각을 중남해 밖으로 뻗쳐둔다. 2002년 16대에서, 링지화는 중앙후보위원에 당선되고, 당내에 한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다음 해, 그는 상무업무를 주재하는 장관급 중앙판공실 부주임이 되고, 중앙기구편제위원회판공실 부주임을 겸직한다.


2007년 17대에서 51세의 중앙판공청주임 링지화는 중앙위원, 중앙서기처서기에 당선된다. 그리하여 국가지도자의 반열에 오른다. 관료로서의 앞날을 광명이고, 대다수의 중앙판공청주임은 모두 중앙정치국이라는 당의 최고영도기구에 들어갔다.


사도역전(仕途逆轉)


58세의 링지화는 반년동안 정식으로 낙마가 선포된 네번째 국가지도자이다. 그보다 앞서서 전국정협의 전 부주석 쑤롱(蘇榮), 중앙군위 전 부주석 쉬차이허우(徐才厚), 전 중공중앙정치국 상임위원 저우용캉(周永康)이 있다. 권세로 보면, 일찌기 중앙서기처 서기, 중앙판공청주임을 맡았던 링지화는 그의 정협동료인 쑤롱보다 앞서고, 군정대권을 장악했던 쉬차이허우와는 비슷한 정도이거나 심지어 많은 사람은 링지화가 보유한 숨은 역량은 정치국상임위원에 버금간다고 했다.


사실상, 링지화의 낙마는 일찌기 2012년 8월 그가 돌연 중앙판공청주임에서 중앙통전부부장으로 옮겼을 때 단초가 나타났다. 그때는 18대를 소집개최하기 전이다. 소식통에 따르면, 링지화는 원래 정치국에 들어가고 싶어했는데, 돌연 상대적으로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중앙통전부로 옮겨갔다.이는 그의 정치생명에 중대한 전환점이 생겼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해 11월 18대에서 탄생된 새로운 중앙지도자들 중 링지화는 과연 정치국에 진입하지 못한다. 심지어 부국급 신분을 대표하는 중앙서기처 서기의 직무도 빼앗긴다. 그저 다음 의 "양회"에서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제12기 전국위원회 부주석이 되어 겨우 그의 국가지도자신분을 유지할 수 있었을 뿐이다.


이번 중대한 전환점의 원인은 불분명하다. <북경청년보> 2012년 3ㅜ얼 18일의 도시뉴스보도에 따르면, 오늘 새벽 4시경, 하이디엔 바오푸쓰교 북사환 서쪽에서 동쪽으로 향하는 보조도로에 페라리 승용차 한대가 방향을 잃고, 먼저 길가의 남쪽벽을 받은 후 다시 길가운데 격리대를 들이받았다. 전체 차량은 둘로 나뉘어지고, 차에 타고 있던 3명은 5미터 밖으로 튕겨나갔다. 1명은 죽고(남자), 2명은 부상당한다(여자). 여러 소식통에 따르면, 사망자는 링지화의 나이 24세된 아들 링구라고 하며, 당시 북경대학의 석사연구생이었다. "아들의 사인을 숨기기 위하여, 링지화는 당시의 정법계통 책임자와 모종의 정치적 약정을 달성하였다." 그러나, 이 약정은 곧 들통나고, 링지화의 정치적 길은 이때부터 역전된다.


2014년 6월 19일, 중앙기율검사위 감찰부는 웹사이트에서 당시 산시성 정협부주석으로 있던 링정처가 엄중한 기율위반,법률위반혐의로 조직의 조사를 받고 있다고 공표한다. 62세의 링정처는 링지화의 둘째형이다. 링씨 5형제자매중 링지화의 바로 다음가는 관직의 인물이다. 링정처는 산시성의 부패사건으로 낙마했다.


10월, 링지화의 막내동생인 베이징의 상인 링완청도 관련부문에 끌려간다; 링지화의 양자이며 이미 고인이 된 큰형 링팡쩐의 아들 링후젠은 미국으로 도망친다. 이제 링지화의 4명의 형제자매중 젊은 나이로 요절한 큰형 링팡쩐을 제외하고 유일한 여성인 링루센, 윈청시중심의원 부원장만 여전히 정상적으로 일하고 있다. 알려진 바에 의하면 그녀는 명성이 좋은 의사라고 한다.


사면초가의 상황하에서 링지화는 계속하여 각종 장소에 얼굴을 나타낸다. 그러나 링지화를 잘 아는 사람은 이렇게 말했다. 링지화는 확실하게 말이 적어졌고, 억지로 아무렇지 않은 척하고 있다.


12월 15일, 2014년 24기 <구시> 잡지에 전국정협부주석, 중앙통전부부장 링지화의 명의로 된 글 <중국특색을 견지하는 것이 민족문제를 해결하는 정확한 길이다.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 중국몽을 위하여 단결 분투하자>가 실린다. 이 글은 민족문제에 관한 4000자의 글이다. 링지화의 이름이 공대매체에 마지막으로 등장한 것이다.


둘째형 링정처가 기율위반혐의로 조사받다.


봉황재경에 따르면, 홍콩 <문회보>는 금년 6월 19일, 링지화의 형인 산시성 정협부주석 링정처가 엄중한 위기위법혐의로 조사를 받고 있다고 밝혔다.최근 매체는 링지화의 동생 링완청, 조카 링후젠이 친인척관계를 이용하여 재물을 긁어모았다고 전한다. 그리고 12월 22일, 전국정협부주석, 중앙통전부부장의 고위직에 있던 링지화본인이 결국 낙마한다. 중국내지정상계를 10여년간 종횡하며 혁혁한 명성을 누리던 링씨가족이 돌연 무너진 것이다. 어떤 네티즌은 이렇게 풍자했다; "계획은 변화를 따라가지 못했다"


링정처는 집안의 둘째이고 1952년에 출생했으며 유황광산노동차에서 산시성 발개위주임, 산시성 정협부주석의 고위직에 올랐다. 링정처는 일찌기 2007년 전국양회에 출석했을 때, 동생 링지화에 대하여 얘기하면서, 링지화는 당과 국가의 사업에 전심전력을 다하여 착실하게 일하는 우수한 간부이며, 두 형제의 공통적인 특징은 부지런하다는 것이라고 하였다. 금년 6월 19일, 중앙기율검사위는 링정처의 엄중한 위기위법혐의로 조사를 받고 있다고 하였다. 다만 구체적인 사건내용은 공표하지 않았다. 어떤 매체에 따르면, 링정처가 산시성 발개위주임을 맡고 있는 동안 이 석탄대성은 매년 석탄을 성바깥으로 판매하는 것이 수억톤인데, "당시 다른 성에서는 석탄을 앞다투어 사라겨 했고, 이를 어떻게 분배하느냐도 큰 이익이 관련되었다.  링지화는 발개위주임으로서 권력이 아주 컸다." 2008년, 링정처는 산시성 정협부주석으로 승진한다. 비록 일선에서 물러났지만, 현지에서의 영향력은 여전했다. 그때, 산시성에 총규모 100억위안의 에너지산업기금이 설립되는데, 링정처는 그 영도소조의 부조장을 맡고, 당해 기금의 분배와 투자를 책임진다. 바로 6월 20일 링정처가 낙마한 다음 날, 신화사 산하의 '중국망사" 웹사이트에는 "조정안에 사람이 있어도 안되는 경우가 있다"는 제목으로링정처낙마사건을 평론했다. 그리고 "이들 낙마한 관리를 보면, 어떤 사람은 혈연과 혼맥을 유대로 '가족부패'사슬을 결성하여, 서로 비호한다; 어떤 사람은 고향을 빌어 자신의 승진에 도움을 받는다. 고향을 떠나서 살더라도 결국은 고향으로 돌아간다..." 비록 이 문장은 조금 있다가 바로 삭제되었지만, 거기에서 암중으로 링지화를 겨냥하였다는 것은 말하지 않아도 분명한 일이었다.


동생이 조사받는다는 소식은 공식확인을 얻지 못하다.


금년11월부터, 여러 편의 링지화의 동생 링완청, 조카 링후젠의 '재부왕국'에 대한 조사보도가 이어졌고, 널리 전해지면서 국내외의 높은 관심을 끌었다. 보도에 따르면, 2001년부터 링완청은 '왕청'이라는 가명으로 링씨집안의 장남 링루센의 아들 링후젠과 함께 가족관계를 이용하여, 방대한 지분투자를 통해 PR, 광고, PE, 도시안전, 인터넷정보안전등 분야에 복잡한 재부판도를 형성하고, 풍성한 수확을 거둔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과학기술 벤처투자분양서, '왕청'은 텐텐온라인유한공사의 동사장, 총재를 맡았고, 그의 영도하에, 텐텐온라인은 급속히 몇년동안에 발전한다; 2008년에는 왕청이 PE분야에 뛰어들어 PE기구인 후이진리팡(匯金立方)의 동사장이 되어, 20억위안이 넘는 규모의 자금을 관리한다. 후이진리팡은 PE업계내에서 규모가 큰 것은 아니다. 다만 몇번의 투자는 모두 많은 이익을 가져다 주었다. 그중 후이진리팡은 일찌기 러스(樂視)미디어에 투자한 바 있는데 주식보유기간내의 최저가격으로 보수적으로 계산하더라도 후이진리팡의 수익은 2.2억위안을 넘어선다. 매체에 따르면, 링완청은 이미 금년 10월에 끌려가 조사를 받고 있다고 하나, 공식확인되지는 않았다.


형제자매의 정상(政商)조합


제일재경일보의 보도에 따르면, 링후예는 두번 결혼했다. 두번째 처와는 연안에서 알게 된 후 결혼했고, 4남1녀를 낳는다.


2009년 9월 30일 <윈청일보>의 제1면에는 이미 90세가 된 링후예의 소식을 실은 바 있다. 내용은 당시의 시위서기가 부성장급 의로대우를 받는 은퇴간부 링후예를 예방하고 위문했다는 것이다.


일찌기 사망했다는 링루센을 제외하고 1952년에 태어난 링정처의 관직은 차관급에 이르렀다.


링정처는 일찍 부친을 따라 의술을 배우고, 창러진의원에서 일한 바 있다. 나중에, 당시의 윈청지위와 성위 기요부서로 옮겨가서 일을 했다. 30살때, 산시대학에서 한어문학을 전공한다.


대학졸업후의 20여년간 링정처는 부청장급의 위치를 오간다. 기유국, 양식국 및 발개위등 부서에서 부직을 맡는다. 52세 되는 해, 링정처는 산시성 발개위 주임이 된다. 4년후 2선으로 물러나서, 산시성 정협부주석이 된다. 62세가 되는 해, 즉 2014년 6월 19일, 중앙기율검사위 감찰부 웹사이트에 그가 엄중한 위법위기혐의로 조사받는다는 소식이 실린다.


링정처를 잘 아는 사람에 따르면, 그가 산시성 발개위주임을 맡는 기간동안, 심사비준한 항목만 부지기수이고, 그중 뇌물관련사건은 이때 일어났다. 이 소식통에 따르면, 기실 링정처가 심사비준한 프로젝트가 몇 개이건 간에 그나 친척이 진행한 프로젝트에 대하여는 들어본 적이 없다.


다만 산시성 정협부주석을 맡은 후, 링정처는 드러내놓고 자신의 프로젝트를 진행한다. 그러나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여 유산되고 말아 웃음거리가 된다.


이 프로젝트에 참여했던 인사에 따르면, 링정처의 계획은 아주 컸다. 투자액이 수십억위안이었다. 산시의 각 저명한 관광지의 사이에 철로를 놓는 것이다. 그렇게 하여 산시의 각 관광지를 오가는데 드는 시간을 줄인다는 것이다. "아침에 다퉁에서 운강석굴을 보고, 정오에 치현(祁縣)에서 교가대원을 구경한다"


링정처 본인은 이 프로젝트를 아주 중시하고, 대량의 시간을 들여 조사연구보고서를 초안한다. 그는 심지어 프로젝트가 허가를 받기 전에, 현지의 모 신문경영진을 찾아가서, 기자를 보내 이 프로젝트에 대한 보도를 쓰도록 했고, 친히 원고의 글자를 하나하나 수정했다. 그는 국내의 여러 전문가들을 초청하여, 여러번 세미나를 열어 이 프로젝트의 연구논증을 진행한다. 많은 전문가들은 좋게 보지 않았고, 링정처의 "철도를 타고 산시를 유람한다"는 계획은 유산되고 만다.


링정처에 있어서 사업은 동생만 못했다.


왕청이라는 가명을 쓰는 다섯째 링완청은 후이진리팡투자관리유한공사 동사장을 맡고 있다. 실제로 이 회사는 왕청의 출자액이 2억위안으로 지분의 0.04%만 보유하고 있다. 2009년 12월, 왕청은 출자액 2만위안을 왕링(王玲)에게 양도한다.


후이진리팡투자관리센터는 2008년 4월에 성립되었다. 4개월후, 후이진리팡자본관리유한공사가 성립되고 등록자본금 5000만위안이며, 경영범위는 자산관리, 투자 및 투자자문, 기업이미지기획이었다. 법인대표는 탕푸원(唐富文)이고, 동사장은 왕청이며 현재 영업중이다.


후이진리팡투자관리센터(유한합명회사)의 등록지는 베이징시 차오양구 광취먼대가 31호이다.


주소지는 원래 베이징시 광화목재공장이다. 현재는 오래된 4층건물이 있는데, 1층에 수퍼마켓이 있고, 위층은 사무실구역이다.


광화목재공장에서 30년이상 일을 한 노동자에 따르면, "광취먼외대가 31호 이 장소는 원래 목재공장이 소재한 지역이다. 나중에 목재공장이 소재한 지역을 개조하여, 상업부동산개발을 진행한다. 이 주소는 점점 사용하지 않게 되고, 나이가 든 엣 주민들만이 알고 있다.


공식자료에 따르면,2008년 4월 23일, 베이징시광화목재공장은 400평방미터의 건축면적의 건물을 ㅔ이징후이진리팡에 주어 사용하게 한다. 그때 막 성립된 후이진리팡은 모두 20명의 직원이 있었고, 그중에는 현지인 10명, 외지인 10명이 있었다.\


지금, 비록 공상자료에는 여전히 후이진리팡투자관리중심의 등록지가 이곳이라고 나오지만, 거기에 회사의 그림자는 찾아볼 수 없다.


후이진리팡자본관리유한공사는 후이진리팡투자관리중심(유한합명)의 100%자회사이고 투자 지분보유주체이다. 후이진리팡자본관리유한공사의 등록지는 베이징시 하이덴구 중관춘 남대가 12호 텐줘(天作)국제중심이다.


이곳에는 "후이진리팡자본관리유한공사"와 "후이진리팡투자관리센터"의 두 줄의 금색글자가 보인다. 이 회사는 20층 사무실의 절반이상을 차지하고 있으며, "L"자형으로 쓴다.


상장기업의 관련공시를 보면, 이 두 개회사는 모두 웹사이트가 없다. 파트너나 실제지배자를 인터넷에서 찾아보면 모두 공백으로 나온다. 성립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조용히 PE시장에서 풍운을 질타하며 점석성금(點石成金)하고 있다.


후이진리팡자본관리유한공사는 일찌기 러스왕의 초기발전때 중요한 투자자였다. 2009년부터 2010년까지 후이진리팡과 관련한 3개의 회사가 연이어 상장된다. 각각 선저우타이웨, 러스왕과 동팡르성이다.


이외에 후이진리팡은 전후로 하아난뤼저, 동푸롱, 광이과기, 텅신주식등 4개의 회사에 '돌격'투자한다. 위에 언급한 7개 회사는 후이진리팡이 개입한 후 성공적으로 상장거래를 하게 된다.


신비한 "서산회"의 여러 구성원이 낙마하다.


봉황망의 보도에 따르면, 링지화는 가족을 핵심으로 재부판도를 확장하는 동시에, 산서출신을 유대로 하는 관상동맹을 만들고자 했다. 내지의 저명한 부패적발기자인 뤄창핑은 이렇게 폭로한다. 늦어도 2007년에, '서산회'라는 고관서클이 조용히 형성되었다. 중앙위원헤 들어갔거나 후보로 들어간 산서출신관리로 구성되었고, 관리들 이외에 개별적으로 자격을 얻은 산시출신 상인들이 포함되었고, 비용부담할 자격을 얻었다. 뤄창핑은 그가 쓴 <타철기>에서 '대내총관'이라 불리는 링지화를 직접적으로 거명하며 그가 명실상부한 서산회의 당편(黨鞭)이며, "누구든지 그 서산 식사모임에 참석할 입장권을 얻으면, 마치 권력진급의 엘리베이터를 탄 것과 같다. 그런 권력팽창속도는 그의 고향 석탄광산주의 부가 급격히 증가하는 것보다 느리지 않았다." 이 삭시모임의 비용부담자의 하나는 바로 류즈쥔의 파트너인 산시상인 딩슈마오였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이미 낙마한 류테난, 링정처, 선웨이천, 천촨핑등 고관이 모두 '서산회'의 회원이다.


링지화사건의 그림자 아래 러스왕은 어디로 갈 것인가?


시나닷컴의 보도에 따르면, 22일 오전 러스왕의 주가는 폭락했는데, 그 원인을 찾았다.


저녁 8시, 중앙기율검사위의 공고에서 폭락의 원인이 드러난 것이다.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제12기 전국위원회 부주석, 중공중앙통전부부장 링지화가 엄중한 기율위반혐의로 현재 조직의 조사를 받고 있다."


이전에 러스왕의 초기투자자인 후이진리팡의 실제지배인 왕청의 실명이 링완청이며, 링지화의 동생이라는 것이 드러나, 정치적 소용돌이에 휘말린다. 러스왕의 주가는 전례없는 압력을 받고, 10여거래일내에 30%이상 폭락한다.


월요일 주식시장에서 A주의 문화미디어업종은 모두 약세를 보인다. 러스왕은 그중에서도 9시 39분에 10.01%가 폭락하여 30.12위안이 되어 하한가를 기록한다. 


"이런 소식은 자웨팅(賈躍亭)에게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링지화사건이 터지자 바로, 시나과기는 러스왕의 관련인사에게 연락했고, 그는 이렇게 토로한다: "자웨팅은 최근 수술을 마친 후, 계속 베이징의 병원에서 요양하고 있다. 전화, 웨이신(위챗)을 통하여 경영진과 의사소통한다. 그리고 수시로 업무라인의 경영진을 병원으로 불러서 직접 얘기하기도 한다."


12월 22일 거래가 끝난 후, 러스왕은 신속하게 발표한다. "회사의 미래발전에 큰 믿음을 가지고 있다." 현임 경영진 12명의 고위관리임원은 집단적으로 지분을 늘이고, 추가보유한 지분가치총액은 600만위안 내지 1000만위안에 달한다. 자금은 모두 경영진이 스스로 조달했다.


현재까지, 러스왕에서 재직하는 경영진은 회사주식을 줄이지 않고 있고, 계속 보유량을 느리고 있다. 러스왕에서 이번에 지분을 늘인 경영진은 12명이다. 러스왕은 2014년 상장회사 경영진이 동시에 집단적으로 지분을 늘인 인원수가 가장 많은 회사로 기록되게 되었다.


러스왕은 이렇게 설명한다: "이는 경영진이 러스왕의 전망을 좋게 보고있을 뿐아니라, 이번 지분추가보유를 통하여 러스왕의 핵심경영진의 강력한 응집력을 보여주었다. 이런 회사의 자신감과 단결 협력정신은 회사의 미래발전과 완비에 큰 추진력이 될 것이다."


그러나, 현재 러스왕의 주가는 이미 더 이상 내려갈 수 없는 바닥을 기고 있다. 러스왕의 3분기 10대주주의 지분보유정보를 보면, 5대주주중에서 4명의 주주는 이미 주식에 질권을 설정했다. 3명은 자씨 형제자매이다. 5명의 주주가 보유한 주식은 56.58%이다. 질권이 설정된 비율은 5명의 지분의 73.5%이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주식질권을 통한 차입계약에서는 주가의 경계선, 보충선 및 손해중지선을 명확히 규정한다.  주가가 일단 경계선 심지어 보충선까지 내려가면, 은행, 신탁 혹은 증권회사는 자금조달측에 추가질권설정이나 자금을 내도록 요구한다. 만일 주가가 손해중지선을 돌파하면 담보제공한 주식은 강제로 처분될 것이다.


업계인사들은 보편적으로 이렇게 생각한다. 만일 자씨가족의 질권계약에 경계선, 보충선 및 손해중지선등 관련규정이 있다면, 일단 주가가 경계선을 내려갈 때, 자금조달측에서는 추가주식을 제공하거나 자금을 제공해야 한다. 자금줄이 위기에 빠진 자웨팅에게 이는 아마도 큰 타격이 될 것이다.


러스왕의 경영진은 긴급히 지분추가보유를 선언했다. 이는 자씨집안의 질권설정물량이 시장에 풀리는 것을 막기 위한 대책이다. 그러나 이것은 더욱 두드러지게 보여준다. 러스왕의 현재 최대문제는 자금상황이라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