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중국의 정치/링지화사건

링지화의 멸망

by 중은우시 2015. 1. 4.

글: 임봉(林鋒)

 

2014년 12월 22일, 동지날 밤, 음소양장(陰消陽長)의 날. 중공중앙 통전부장, 중공정협 부주석 링지화가 낙마했다. 링지화의 낙마와 더불어, 과거 잘 나가던 링씨가족도 멸문의 화를 당하고, 여러명이 이미 감옥에 갇혔다.

 

영호(令狐)가족은 선시(山西)에 기반이 있다.

 

링지화의 원래 성은 링후(令狐, 영호)이다. 고향은 산시 핑루(平陸)이다. '영호'와 '호(狐)'는 원래 같은 성이다. 춘추오패중 하나인 진문공(晋文公) 중이(重耳)의 모친은 성이 호(狐)이다. 진문공의 외조부 호돌(狐突), 외삼촌 호모(狐毛), 호언(狐偃)은 모두 진나라의 중신이다. 역사상 호씨는 삼진 주로 현재의 산시에서 세력이 있고, 기반이 있었다. 영호는 호와 같은 집안이다. 현재의 링(令)가는 기실 호(狐)가이다.

 

링지화의 윗대에 이르러 부친 링후예(令狐野)는 의사였다. 민국시대에 공산당에 들어갔고, 중공섬감녕변구의원 의무과장을 지낸다. 모택동시기에 중공중앙판공실주임 왕동흥(汪東興)은 당시 의원에서 링후예의 수하였다. 이것이 바로 링후예의 곁에는 두 명의 붉은왕조 '대내총관'이 나타났다고 하는 것이다. 하나는 그의 부하인 왕동흥으로 모택동의 '대내총관'이었고, 다른 하나는 그의 아들 링지화로 후진타오의 대대총관이었다. 역사는 왕왕 놀랄 정도로 닮았다. 두 붉은왕조의 '대내총관'은 모두 주공의 심복으로 알려졌고, 마지막 순간에 변신을 하여 주공이 일생동안 고심하여 경영해온 권력구도와 정치유산을 순식간에 물거품으로 만들어 버린다.

 

링지화의 형제자매 5명은 차례대로 팡쩐(方針), 정처(政策), 루센(路線), 지화(計劃), 완청(完成)이다. 링지화는 넷째이고, 나중에 관직이 '부국급'에 이른다 링후가족중 직위가 가장 높고, 권력이 가장 컸다. 링후일문이 부귀하게 된 것은 모두 그 때문이고, 무너지게 된 것도 다 그 때문이다.

 

링지화에 있어서 중공공청단중앙에 들어간 것은 평보청운(平步靑雲)이라 할 수 있다. 중공관료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자산은 관계네트워크이다. 링지화는 23살부터 공청단이라는 관계네트워크에 들어가게 된 것이다. 이는 링지화의 이후 "비황등달(飛黃騰達)"에 인맥관계의 기초를 쌓았다.

 

첫번째 수수께끼: 누가 링지화를 중앙판공청에 들어가도록 발탁했는가?

 

당시 핑루단현위서기를 지낸 량쩡화(梁增華)는 나중에  <증화세월>이라는 책에서 당시의 일기를 기록했다. 1978년 9월 8일의 일기에서, 량쩡화는 링지화가 이미 단현위에서 일한지 4년이 되었고, 그녀가 링지화의 입단을 소개했고, 그가 단현위 부서기가 되도록 추천했다고 밝혔다.

 

1978년 3얼 12일 일기에서는 링지화가 이때 이미 중앙단교(中央團校)에서 공부했다고 썼다. 1978년 9월 6일, 량쩡화는 일기에서 이렇게 썼다. 링지화는 중앙단교에서 돌아왔다. "나의 예상을 벗어나지 않고, 그는 단중앙에 남아서 일하게 되었다. 그가 이번에 돌아온 것은 우리에게 작별인사를 하기 위한 것이었다."

 

링지화가 단중앙에서 일할 때 당시 단중앙서기의 비서를 잠시 맡은 것을 제외하고 댑분의 시간을 선전업무에 종사했다.

 

1995년, 링지화의 사무실은 전문동대가(前門東大街)에서 중남해(中南海)로 옮겨간다. 그가 이 곳에서 처음 맡은 업무는 중공중앙판공청 조사연구실 3조 책임자였다. 그후 조사연구실 부주임, 주임, 중앙판공청 부주임이 된다. 그동안 그는 중앙기구편제위원회판공실 부주임이 된다. 2002년 "16대"에서 링지화는 중공중앙후보위원에 당선되고, 중공내에서 한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다음 해, 그는 상무업무를 주재하는 장관급 중앙판공청 부주임이 된다. 여전히 중앙기구편제위원회 부주임도 겸직했다.

 

1995년 이전에, 링지화의 관료생활은 단중앙에서 직접 중앙판공실로 옮겨갔다. 누가 발탁했는지에 대하여 대륙매체는 분명하게 말하지 않고 있다.

 

홍콩 <명보>는 2014년 11월 24일자 <링지화와 리쉐첸(李學謙)이라는 평론에서, 이 문제를 언급한다. 쑨자예(孫嘉業)는 이렇게 말한다. 링지화를 중남해로 들어가게 한 것은 후진타오가 아니다. 그는 바로 현임 중국소년아동신문출판사 사장인 리쉐첸이다.

 

글에 따르면, 1995년, 이미 관직이 중앙판공청 조사연구실 3조 책임자가 되었던 리쉐첸은 중남해안의 비서생활에 싫증이 났다. 그래서 단중앙으로 돌아가겠다고 신청한다. 중앙판공청에서는 그에게 후임자를 추천하라고 하고, 리쉐첸은 단중앙에 알아본 후에 단중앙 선전부장을 맡고 있던 링지화가 그와 자리를 바꾸겠다고 했다. 그 결과 리쉐첸은 단중앙으로 돌아가 선전부장을 맡고, 링지화는 중앙판공청 조사연구실 3조 책임자가 된다.

 

다만, 해외의 일부매체에서는 다른 내용을 보도한 바 있다. 왜냐하면 링지화가족은 보이보(薄一波)가족과 관계가 있어서, 그것때문에 링지화가 중앙판공청의 핵심지위로 올라갈 수 있었다고 말한다.

 

<명보> 2014년 12월 23일자 보도에 따르면, 링지화의 원래 성은 '영호(링후)'이고, 산시성 핑루현 사람이다. 부친 링후예는 중공초기관료로 산시 동향인 보시라이의 부친 보이보와 친한 친구이다. <독일의 목소리>는 이렇게 보도한 바 있다. 링지화는 1995년 중공단중앙에서 중앙판공청으로 옮겨갔고, 2000년 링지화는 중앙판공청 부주임이 되는데 만일 보이보가족이 힘껏 밀어주지 않았더라면, 링지화는 권력중추로 들어갈 수 없었을 것이라고.

 

재신망은 링지화의 공식이력서의 핵심부분이 거짓이라고 말한다.

 

2014년 12월 29일, 재신 <신세기>는 제50기에서 장문의 "링씨형제"라는 글을 발표했는데, 거기에서 링지화형제의 성장이력을 자세히 보도하고 있다. 글의 제2부분 "단위간부에서 중앙판공청주임까지"에서 링지화가 산시 핑루단현위 간사에서, 중공단중앙으로 옮겨와서 일하고, 마지막으로 중앙판공청에 들어간 과정을 소개하고 있는데, 이 과정에서 링지화의 가장 관건적인 부분은 평루단현위부서기에서 중공단중앙으로 옮겨간 것이다.

 

보도에 따르면, 바로 이 중요한 단계에 링지화의 공개된 이력은 펑루단현위서기 량쩡화의 일기기록과 중대한 차이가 있다고 한다.

 

공식이력에 따르면, 1975년, 링지화는 단현위로 옮겨가고, 1978년 링지화는 부서기로 승진하여, 부과장급의 관리가 된다. 1978년에서 1979년, 링지화는 산시성 윈청지위에서 근부하고, 1979년 베이징으로 옮겨가서, 중공단중앙 선전부에서 일하며, 관료생애에서 아주 중요한 16년간의 단중앙에서의 생애를 보낸다.

 

<재신망>의 보도에 따르면, 당시 평루단현위서기를 맡았던 량쩡화는 <증화세월>이라는 책에서 당시의 일부 일기를 공개했는데, 량쩡화의 978년 3월 12일자 일기를 보면 링지화는 이때 이미 중공중앙단교로 가서 공부하고 있었다. 1978년 9월 6일, 량쩡화는 일기에서 링지화가 중앙단교에서 공부를 마치고 돌아왔는데, 그는 단중앙에 남아서 일을 한다고 하였고 이번에 돌아온 것은 작별인사를 하기 위함이라고 했다. 량쩡화는 링지화를 도와서 모든 수속을 처리해주었다.

 

관찰가가 주목하는 것은 량쩡화의 일기기록에 따르면, 링지화는 핑루단현위 부서기에서 중앙단교로 학습을 가고 직접 단중앙에 남아서 일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링지화가 윈청지위로 옮겨가서 일한 경력은 없다. 그러나 링지화가 공개한 이력에는 링지화가 먼저 윈청지위로 가서 한동안 일을 한 후에 비로소 '선발'되어 단중앙 선전부에서 일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양자간에는 모순이 있다.

 

만일 량쩡화가 공개한 내용이 사실이라면, 링지화의 공식이력은 조작된 혐의가 있다. 그렇다면 왜 조작했을까? 무엇을 숨기려 했을까? 현재, <신화망>에 등재된 링지화의 공식이력은 이미 삭제되었다.

 

2012년 3월 18일 페라라사고

 

2012년 3월 18일 새격 4시 10분경, 한 대의 페라리스포츠카가 바오푸스교 동쪽의 보조도로를 달릴 때, 방향을 잃고 다리남쪽벽과 또 다른 난간에 부딛친 후 해체된다. 차에 타고 있던 3명은 차 밖으로 튕겨나갔다. 구조에 참여한 소방대원에 따르면, 사고로 남성 1명이 사망하고, 여성 2명이 중상을 입었다.

 

목격자인 선(沈)선생에 따르면, 그가 당시 차를 몰고 서쪽에서 동쪼으로 북사환 바오푸스교 동쪽의 보조도로로 들어갈 때, 돌연 거대한 엔진굉음이 들였다. 그가 백미러로 보니, 검은 그림자가 그의 차를 향하여 달려오고 있었다. "검은 그림자의 속도는 내 차보다 훨씬 빨랐다." 그는 급히 가속페달을 밟았고, 차는 달려나갔다. 차 뒤의 검은 그림자는 직접 보조도로릐 시멘트벽을 받아갔다. "차밖의 조각이 내 차로 날아왔고 파바바박 하는 소리가났다. 이때 1대의 차량이 내 차의 좌전방에서 펑 소리가 나며 불이 붙었다."

 

선선생은 사고가 난 것은 검은색 페라리스포츠카이고 이미 해체된 것을 발견했다. 엔진등 부품은 그의 차 오란쯕 후방에 떨어져 있었다. 차의 앞부분과 대부분의 차신은 그의 좌전방에 옆으로 서 있고, 동시에 지상에는 한 젊은 여자가 누워 있었다. "이미 말을 하지 못했고, 그저 가벼운 흥흥 소리만 냈다." 그후 선선생은 경찰에 신고한다.

 

"차내의 유일한 남성은 개략 20여세였고, 사고발생후 차에서 몇미터 떨어진 곳에 누워 있었다. 머리 아래에는 피가 고여 있었고, 이미 사망했다" 구조에 참여했던 쌍위슈소방대 소방관의 말이다.

 

이 페라리사고로 사망한 남자는 바로 당시 중앙판공청 주임, 후진타오의 '대내총관' 링지화의 23살된 아들 링구였다.

 

차량하고후, 소문이 무성했다. 당시 가장 널리 알려진 유언비어는 두 가지였다:

 

1. 베이징에서 나온 소문으로, 경찰이 피해자의 성명을 '자(賈)"씨로 기록했다. 이 소문은 죽은 운전기사가 '18대"에서 은퇴한 중공지도자 자칭린과 관련있다고 겨냥한 것이다.

 

2. 해외에서 나온 소문은 링구가 그 자리에서 사망했고, 차위에 타고 있던 2명의 젊은 미모의 여성은 티벳족 여성이며, 한 명은 완전 나체였고, 또 다른 한 명은 반나체였다. 그후 링구와 두 여자가 카섹스를 했다는 주장이 해외에서 널리 유행했다.

 

링지화가 낙마한 후, 소후에 '신문당사자'라고 칭하는 사람이 쓴 글 <바오푸쓰교 신비한 차량사고>라는 글에서 다시 한번 그 무수히 입에 오른 차량사고를 언급했다. 그레서는 특별히 한 목격자에 따르면, 차바깥으로 튕겨나간 3명이  '옷을 제대로 입고 있었다"고 한다. 이 구체적인 내용은 해외에서 난 소문과 들어맞지 않는다.

 

링지화의 첫째, 둘째 죄: 저우용캉과 연맹, 중앙경위국을 사적으로 출동시킴

 

<재신망>은 <링씨형제>라는 보도에서 이렇게 말한다. 2012년 3월 18일의 차량사고후, "아들의 사인을 감추기 위하여, 링지화는 당시의 정법계통 책임자와 모종의 정치적 약정을 달성했다." 단 이 약정은 곧 드러나고, 링지화의 정치적 전도는 이로 인하여 역전된다.

 

<재신망>은 지금까지, 시진핑, 왕치산과 가까운 매체로 알려져 있다. 다만 지금까지, "모종의 정치적 약정"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공식적으로 아무런 말도 없다.

 

홍콩매체는 "페라리사고"후 링지화가 중앙경위국을 출동시켜 현장을 봉쇄했다고 한다. 차량사고를 처리하는 문제에서, 저우용캉과 링지화가 만났다. 당시 저우용캉은 전면적으로 차량사고소식을 봉쇄하여, 링지화의 관료로서의 전도에 영향을 주지 않겠다고 말한다.  그 댓가로 저우용캉은 링지화에게 4가지 요구사항을 내놓는다: 중앙에서 그(저우용캉)의 책임을 묻지 않도록 확보할 것' 중기위가 이미 개시한 조사를 중지할 것; 보시라이와 구카이라이 모살사건을 완전히 '분리'시킬 것; 보시라이의 일부 부패행위에 대하여만 기소할 것. 동시에, 헤이우드는 영국인이고 영국에는 사형이 없다는 이유로 구카이라이를 사형에 처하지 말 것과 왕리죈에 대한 기소는 그의 '반국죄(叛國罪)로만 하고 저우용캉의 부패사건과 연결시키지 말 것도 있었다;.

 

그외에 또 다른 홍콩매체는 저우용캉이 왕리쥔을 중기위로 엄겨서 처리하지 말고 계속 그를 국가안정부의 통제하에 한 별장에 연금시켜둘 것을 요구했다고 한다. 이렇게 하여 왕리쥔이 저우용캉의 전면적인 통제하에 있게 하려는 것이다. 실제로, 심문기간동안 보시라이, 구카이라이, 왕리쥔은 모두 반드시 저우용캉을 만나겠다고 요구했다고 한다. 그들은 저우용캉을 '빅 보스(大老板)'라고 칭했다고 한다.

 

동시에 저우용캉과 링지화는 저우용캉, 링지화진영에서 온 2인소조를 만들기로 했다. 두 사람은 저우용캉이 통제하는 베이징공안과 협력하여 '소문'을 없애기로 했다. 이 소조의 두 사람은 각각 당시 정법위의 비서장이며 현임 하북성위서기인 저우본슌(周本順()과 링지화의 처인 구리핑의 동생 구위안쉬(谷源旭)이었다고 한다.

 

차량사고배상금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두 사람은 입막음비용을 두 여자의 가정에 지급할 때, 배상금의 총액은 최고 3000만위안 내지 4000만위안으로 하기로 하고, 절반은 전중석유동사장 장제민이 내도록 하며, 절반은 구위안쉬가 내도록 했다.

 

2014년 5월, 해외작가 위안홍빙이 쓴 <대만생사서>에서 페라리사고후 저우용캉과 링지화가 결맹을 맺은 내용을 폭로했다.

 

그 책에 따르면, 2012년 3월 14일, 보시라이가 체포되자, 저우용캉은 어찌할 바를 몰라서 일시적으로 당황하여 어찌할 줄 몰랐다. 링지화의 아들이 '3.18" 페라리사고를 당했다는 말을 듣고, 저우용캉은 링지화와 결맹을 맺고자 했고, 이를 통해 위기를 넘기려 한다. 그리하여 저우용캉은 링지화를 중앙정법위건물의 밀실로 불러서 만남을 가졌다.

 

저우용캉은 먼저 링지화에게 비밀자료를 보여준다. 그 자료에는 링지화가족구성원이 세력을 믿고 산시에서 석탄광산을 독점하고, 권력을 남용하며, 매관매직을 통해 재물을 긁어모았으며 암중으로 카지노를 개설하여 엄청난 돈을 벌었다는 등등의 여러가지 악행과 죄상이 기록되어 있었다. 그와 가족에 관한 일이면 크고 작고를 불문하고 모조리 기록되어 있었다. 저우용캉은 경찰권과 검찰권을 장악하고 있으므로 일찌감치 당대 '백관행술(百官行述)'을 만들어 둔 것이다. 필요할 때 써서 협박하기 위해서.

 

링지화는 자료를 읽어본 후 묵계를 맺는다. 저우용캉은 링지화를 도와서 가을에 개최되는 중공 "18대"에서 정치국상임위원에 들어가게 해주겠다고 한다. 링지화는 저우용캉을 도와 보시라이사건에서 분리시켜주어 온전하게 물러날 수 있게 해준다. 그후 두 사람은 서로 밀접하게 협력했다.

 

<백관행술>이 처음에 나온 것은 청나라 강희제때, 임백안이라는 관리가 직권의 편리를 이용하여, <백관행술>을 썼고, 책에서 백관의 남모르는 비밀을 적어 놓았다. 위로는 시정의 잘못에서 아래로는 음주계집질까지 하나하나 다 기록했다.

 

링지화의 셋째 죄: 차량사고를 은폐하고 보고하지 않아, 후진타오의 '진노'를 사다.

 

2012년 6월 7일, <아주주간> 잡지에 따르면, 링지화아들의 '카섹스스캔들'은 순전히 유언비어라고 하며, 링구는 북경대학에서 '왕자운(王子雲)'이라는 이름으로 다닌다고 하였다. 6월 4일, 링지화에 관한 글이 해외에 나타난 후, '왕자운'은 일찌기 인터넷에 '감사하다. 잘 있다. 걱정말라.'는 회신을 달기도 했다.

 

당시 이 <아주주간>이 6월 7일 홍콩의 길거리에서 팔린지 얼마 지나지 않아 관련내용은 이미 인터넷에 올라온다. 그라나 다음날 아침 이 잡지는 돌연 인터넷에서 그 글을 삭제해버린다.

 

<뉴욕타임즈>는 2012년 12월 5일의 보도에서, 6월, 해외중문매체가 이 페라리를 운전한 것이 링지화의 아들이라고 보도했다고 하였다. 홍콩잡지 <아주주간>은 글을 하나 발표한다. 전술한 SNS의 정보를 인용하여 이런 보도를 반닥한다. 기자는 이렇게 말한다: "이 글의 ㅠ스원은 중앙판공청의 링지화판공실이다"

 

최근 대만의 <연합보> 보도에 따르면, 당시 중공총서기 후진타오는 3개월이 지난 후에야 자동차사고에 대하여 알게 되었다고 한다. 후진타오는 링지화가 중앙경위국을 동원하여 차량사고를 처리했고, 시체의 이름을 바꾸었다는 것을 듣고는 "아주 진노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 주장은 중공의 공식적인 확인을 받지는 못했다.

 

링지화의 넷째 죄: '서산회'를 조종하다.

 

저명한 조사기자 뤄창핑은 그의 에너지국 국장 류테난을 고발하는 인터넷신서 <타철기> 제15장에서 류테난이 보통의 국장급기술관료에서 발개위부주임이라는 지도자급으로 올라간 핵심이유를 설명한다. 바로 류테난이 산서당의 연원인 링지화를 우두머리로 하는 '서산회'에 가입했고, 그 후에 관료로서 승승장구했다고 한다. 링지화는 '18대' 이전의 아들 페라리사고로 이 계파는 붕괴되며 직접적으로 류테난에게도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뤄창핑의 조사에 따르면, 류테난의 처인 궈징화(郭靜華)는 보건서비스과정에서 남편을 위하여 특수한 입장권 즉 '서산회'를 쟁취해주었다고 한다.

 

2007년이전에, '서산회'라는 고관의 이너서클이 조용히 형성되었고, 중앙위원에 들어가거나 후보로 들어간 산서출신 관리로 조직되었다고 한다. 관리들 이외에 개별적으로 신분인정을 받은 산서출신 상인들도 가입했다. 그들이 자금을 부담했다. 이들 모임의 비용부담은 바로 '철로대' 류즈쥔의 파트너인 딩슈마오가 담당했다. '서산회'는 3개월내에 한번씩 모임을 바기조 빈번하게 서로 연락했다. 매번 모임때는 호화차량으로 데려오고 데려갔으며, 핸드폰, 비서, 애인은 데려갈 수 없었다.

 

이 파벌은 산시 핑루현출신의 고관으로 전 중앙판공실 주임인 링지화를 우두머리로 한다. 뤄창핑에 따르면, 누구든지 서산회에 가입하기만 하면 그는 권력승진의 엘리베이터를 탄 것과 같다. 권력이 팽창하는 속도는 그의 고향의 석탄광산주의 재산이 불어나는 것에 비하여 전혀 못하지 않았다.

 

고정된 정관도 없고, 조직질서도 없으며, 고정장소도 없고, 심지어 특수한 질서 서열도 없다. 그래서 이것을 조직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다만 유사한 조직형태는 통상적으로 어떤 업종 혹은 지역을 표찰로 한다. 예를 들어 업종으로는 헉유방, 전로호, 철로대가 있고, 지역으로는 후난 창더, 장쑤 얜청, 지린 얜벤이 있다.

 

뤄창핑은 서산회가 명확한 정당은 아니지만 실제로는 이미 파벌로 볼 수 있다. 일치한 정치목표가 있다.

 

그외에 뤄창핑의 보도에 따르면, '당편(黨鞭)'으로서 링지화는 일찌기 표를 끌어모으기 위하여 3번의 식사자리를 마련한 바 있다. 그리고 범위를 '서산회' 이외에 인원들에게까지 확대하였다. 이런 전통에 어긋나는 방식은 '중대조직인사사고'를 구성한다.

 

해외매체의 보도에 따르면, 2012년 5월 7일, 링지화의 운용하에, 후진타오는 전체 중공중앙위원을 베이징으로 소집한다. 문을 걸어잠그고 '18대' 정치국상임위원을 선발한다. 원래 이번 투표는 6월 25일에 있었다. 투표결과, 링지화는 3위에 ㅇ르낟. 그러나 이번 투표는 은퇴한 국가지도자들의 자문을 받거나, 9명의 상임위원에게 상황을 설명하는 정상적인 절차를 거치지 않았다.

 

이점은 시진핑, 후진타오에 가까운 뉴레이(牛淚)의 "링지화의 정치유수장(政治流水帳)"에서 볼 수 있다. 뉴레이는 2012년 5월 상순, 중공 '17대' 정치국위원, 상임위원 탄생절차를 본받아 전체 17기 중앙정치국위원, 상임위원과 300여명의 성장,장관급 및 군대의 정대군구급이상의 간부를 징시호텔로 불러 회의를 연다. 투표의 방식으로 18대중앙정치국위원, 상임위원을 선발하는데 대하여 민의를 모의조사한 것이다. 이번 모의조사에서 링지화의 득표는 확실히 앞에 놓였다.

 

"소분에 따르면, 링지화가 5월의 당내민의조사때 조작을 했다고 한다. '18대'에 상임위원으로 들어가기 위하여. 이 소문이 정말인지여부는 알 수 없다. 조작을 했는지 여부는 깊이 있게 조사하지 않으면 알 수가 없다."

 

링지화사건의 발생

 

2012년 9월 1일, 링지화는 중앙판공청 주임에서 면직되고, 중공중앙통전부장으로 옮겨간다.

 

홍콩매체의 보도에 따르면, 페라리사고후, 베이징시공안국 국장 푸정화(傅政華)는 저우용캉의 명령을 받는다. 저우용캉은 링지화아들의 차량사고 조사과정과 결과를 중남해 최고위층에 보고하지 말라고 한 것이다.

 

그러나 2012년 7월, 즉 페라리사고발생 4개월후, 푸정화는 저우용캉의 링지화아들차량사고에 관련한 명령을 중남해 최고위층에 보고한다. 최고위층은 그제서야 저우용캉이 배반한 증거를 발견한다.

 

뉴레이는 링지화사건이 발생한 또 다른 판본을 얘기한다: 링구는 '자'씨성으로 고쳤는데, 그것은 자칭린(賈慶林)의 분노를 샀다. 자칭린은 사실대로 위에 보고한다. 2012년 7월, 장쩌민이 관련보고서를 공개하자, 모든 사람들은 깜짝 놀란다. 후진타오는 더더욱 놀랐다. 그리하여 심도있는 조사를 명령하고, 링지화의 관료로서의 전도는 이렇게 끝난다.

 

뉴레이는 말한다. "저우용캉사건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링지화의 그림자는 항상 특정시기마다 나타나서, 중앙에서는 주목을 하게 된다. 더욱 관건적인 것은 부정부패와 내부투쟁으로 인한 산시성정치붕괴사건에서, 중앙기율검사위가 조사하는 과정에 갈수록 많은 단서가 링지화 형제, 처와 조카를 가리키는 것을 발견하고, 최종적으로는 링지화 개인을 향한다는 것을 발견했다.

 

후진타오는 링지화 조사를 지지하다.

 

2014년 6월 19일, 전 산시성 정협부주석 링정처가 낙마한다. 2014년 10월 23일, 대륙의 여러 매체에서는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를 인용하여, 대륙상인 링완청이 조사를 받는다고 보도한다. 링지화는 201년 12월 22일 낙마한다. 이제 링지화의 형제자매 5명중 일찌기 사망한 링팡쩐을 제외하고 링루센이 여성으로 산서 고향에 있는 외에, 나머지 3명의 남성은 모두 체포되었다.

 

같은 해 12월 15일, 중공당매체 <구시(求是)>잡지는 링지화가 쓴 글을 실었다. 링은 이 4,000자도 되지 않는 글에서 최소한 16번 시진핑을 언급한다. 그러나 1주일 후, 링지화는 중남해에서 버림을 받는다.

 

해외의 평론에 따르면, 산서의 낙마한 고관과 부호중 처음으로 링씨집안과 관련있는 사람이 중기위에 끌려가 조사를 받게 되자, 링지화는 자신의 미래가 어떨지 잘 알았다. 그리고 시간이 흐른 후에는 그의 형제, 처와 조카가 차례로 무너진다. 그는 더욱 분명하게 자신의 정치생명이 '카운트다운'에 들어갔다는 것을 안다. 그는 더욱 노력하여 이를 만회해보고자 한다. 그리하여 당매체 <구시>에 시진핑에 대한 충성을 맹세한다. 그러나 이때는 이미 모든 것이 늦었다.

 

로이터사는 12월 30일, 지도층과 관계가 좋은 소식통을 인용해, 후진타오는 링지화조사계획에 동의하였다. "링지화를 조사하는 것은 시진핑이 후진타오를 겨냥한 것이 아니다." 지도자층과 관계가 좋은 사람은 로이터에 이렇게 말한다. "후진타오는 조사를 저지하지 않았고, 의견을 물어보았을 때, 동의하고 지지했다."

 

링지화의 조사가 선언된 후 홍콩 <경제일보>는 이렇게 보도한다. 링지화를 조사하는 것은 후진타오의 동의를 받았다.

 

링지화는 통전부장으로 가서 무엇을 하였는가?

 

중공통전부의 작용은 바로 대외삼투이다. 중공의 이데올로기를 해외에 수출하는 것이다. 대상은 대륙의 모둔 민주당파와 해외중국교민단체, 각 당파의 조직책임자, 종교단체등이다. 일부 해외 교민단체, 학생회는 모두 중공의 자금지원하에 활동하는 조직이다. 명목상으로는 해외중국계인사와 유학생을 위하여 봉사한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중공의 지하당조직이다.

 

"추사국제(追査國際)""의 보고에 따르면, 세계각국에 분사무소를 설립한 '중국평화통일촉진회(CCPPR)"은 민간조직이라 칭하지만, 실제로는 통전부 산하여 통일전선기구이다. 12개국가대학에 퍼져 있는 중국학생학자연의회(CSSA)는 많은 경우 중공현지대사관, 영사관의 '지도'를 받고 있다.

 

현재, 중국통전부는 이들 해외 '지하당'을 이용하여 파룬공에 대한 박해를 해외로 까지 연장했다. 2012년 6월에서 지금까지, 지속적으로 홍콩파룬공진상포인트를 방해한 "천관회"는 2014년 7월 뉴욕에서 파룬공을 모욕주고, 8월에는 타이페이 101빌딩앞에서 파룬공신자를 모욕하고, 공산주의를 선양한 "애국동심회'도 있다. 인권단체에서는 링지화가 부임한 후, 통전부가 해외에 파룬공박해정책을 수출하는데 더욱 힘쓰는 추세라고 한다.

 

"추사국제"의 대변인 왕즈위안은 이렇게 말한다. 링지화가 통전부를 장악한 후, 중공은 해외에서 파룬공신자에 대한 박해도 증가, 상승하는 추세이다. 알려진 바로는 추사국제는 링지화가 부임한 후 통전부가 파룬공을 박해한 증거를 정리한 보고서를 곧 공중에 반포할 것이라고 한다.

 

시진핑의 해외방문시마다 골치거리를 만들다.

 

장쩌민이 1999년 파룬공을 진압한 때로부터 중공의 해외통전공작으 중범은 파룬공을 진압하는데 있었다. 중공통전부의 해외특무공작은 주로 몇개의 계통을 통하여 이루어지는데, 친중국교민단체, 해외학생조직, 상회, 중공이 자금지원하는 매체 그리고 중화해외연의회. 2005년의 자료에서 보수적으로 추정한 바에 따르면, 전세계에 모두 1만여개의 중국계교민단체가 있다고 한다.

 

중공통전부와 이교부는 장기간 장저민파의 손아귀에 장악되어 있었다. 일찌기 저우용캉이 정법위서기로 있는 동안, 정법계통은 중공재정, 군사, 외교에서 3위릴체의 통제를 실시한다. 외교계통과 통전계통이 서로 협력하여, 많은 특무를 해외로 파견하여 활동하게 한다.

 

링지화가 통전부의 대권을 접수한 후, 장쩌민파의 파룬공박해정책을 계속 유지한다. 중공특무는 해외활동이 여전히 창궐하고 있고, 어떤 특무활동은 시진핑에게 골치거리로 남는다.

 

2014년 6월 17일, 시진핑이 뉴질랜드를 방문했는데, 호텡랖에는 중공이 고용한 '환영단' 인원이 고의로 홍기(紅旗)를 들어 파룬공신자의 플랭카드를 가렸다. 소란을 방지하기 위하여, 현지경찰은 파룬공신자의 뒤를 2미터 간격을 두고 미행하도록 시켰다.

 

7월 19일, 시진핑이 아르헨티나를 방문했을 때, 중궁현지대사관에서는 복건고향모임의 인원을 동원하여 파룬공의 청원을 저지시킨다. 그리고 세계의 기자들 앞에서 파룬공신자의 얼굴을 대린다. 아르헨티나 경찰은 현장에서 중국영사관직원 1명을 체포한다.

 

11월 18일, 중공대표단은 브리스베인에서 G20회담에 참가했다. 중공붉은기를 든 친중공특무가 파룬공신자가 활동하는 지역을 침범하여 진상플랭카드를 빼앗고 여자신도들은 힘으로 땅바닥으로 밀어 쓰러뜨린다. 그리하여 하마터면 버스와 부닥칠뻔했고, 경차링 나서서 간여하면서 파룬공신자의 안전한 활동을 보호하겠다고 말한다.

 

링지화 청산의 범위는 점차 확대되고 있다.

 

2014년 12월 29일 대륙매체의 보도에 따르면, 흑룡강성 공안청 부청장이며 링지화의 처남인 구위안쉬는 이미 최근 끌려가서 조사를 받고 있다고 한다. <재신망>의 보도에 따르면, 현재 흑룡강성의 공식웹사이트에서 공안청의 관리소개난응ㄹ 보면 이미 구위안쉬의 이름일 빠졌다. 공개된 자료에 따르면, 12월 5일이, 구위안쉬가 공개적으로 얼굴을 나타낸 마지막 날이다.

 

그외에 해외에서는 한 때 구위안쉬와 저우번슌이 링,저우가 공동으로 성립한 이인소조의 구성원이라고 밝힌 바 있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2012년 3월 18일, 페라리사고발생후 24시간내에, 저원슌과 구위안쉬는 베이징경찰로 하여금 3면이나 '링구'의 신분정보를 고치게 하였다. 그의 이름과 베이징의 거주지등 정보는 모조리 고쳐졌다. 저우번슌과 구위안쉬는 철저히 경찰의 자옹차사고기록을 말소시켜 버린다. 인터넷 웨이보에서 차량사고 목격자의 폭로내용도 삭제된다. 2편의 신문보도도 인쇄전에 끌어내려진다.

 

링완청의 상업판도에서 장쩌민집안이 관련된 전신회사와 합작한 사실이 드러났다.

 

동시에, 링지화의 동생 링완청의 상업판도에서도 장쩌민집안과 관련된 전신회사와 합작한 사실이 드러났다.

 

2003년도 외자법인 기업연도검사재무제표가운데, 링완청은 '왕청(王誠)이라는 이름으로 쥬저우(九州)온라인유한공사("쥬저우온라인")의 총경리난에 이름이 올라 있다.

 

쥬저우온라인은 2003년 7월에 설립되었고, 등록자본금은 4.9억위안이다. 그때 막 중국전신 북방10성의 '소망통'과 '길통'의 합병의로 구조조정된 중국네트워크통신집단공사("중국왕통")이 지분 40%를 보유하고 있고, 두 외자 VC 소프트뱅크아시아기초설비기금온라인회사과 IDG네트워크투자회사가 30%의 지분을 점하고 있다. 당시 중국왕통 부총경리를 맡았던 렁롱췐(冷榮泉)은 법인대표를 맡고 있었다. 렁롱췐, 중국왕통인터넷사업부 총경리 줘펑(左風), IDG파트너 슝샤오거(熊曉鴿)등 9명이 동사를 맡았다. 그후 쥬주온라인은 텐텐(天天)온라인으로 이름을 바꾼다.

 

링왕청은 일찌기 인터넷동영상분야에서 크게 사업을 벌이고자 했다. 그러나 재신망에 따르면, "텐텐온라인의 국유기업색채와 자본주도하의 인터넷동영상산업의 발전궤적은 계속하여 충돌을 일으켰다." "유쿠, 러스(樂視)등 시장화된 동영상사이트는 대량의 자금으로 판권을 구매하여 유입량을 늘이고, 텐텐온라인을 멀찌감치 앞서갔다."

2006년 11월, 텐텐온라인은 주주총회를 개최한다. 중요결의를 통하여, 중국왕통이 퇴출하고, 그의 40%지분은 각각 원가로 IDG와 소프트뱅크에 양도한다. IDG와 소프트뱅크는 합하여 50%를 보유한다.

 

<장쩌민 그 사람>이라는 책에서는 '중국왕통이전에 장멘헝(江綿恒)은 '왕통'의 사장이었다. 그는 '북방통신'을 합병하겠다고 큰소리쳤다. 기실 '왕통'은 일찌감치 장멘헝때문에 애를 먹었다. 그는 아예 북방통신을 인수할 능력이 없었다. 장멘헝이 위기를 해결해주기 위하여, 장쩌민은 친히 중국전신에 명을 내려 반드시 둘로 나누도록 했다. '북방전신'과 '남방전신'으로. '북방전신'의 10개성의 고정자산은 그냥 '왕통'에 넘겨주게 된다.

 

2005년, 링후젠(令狐劍, 링팡쩐의 아들)조자는 여러 개의 '장스(强勢)'라는 명칭의 회사를 설립한다. 베이징창스호동광고유한공사, 베이징창스연합과기유한공사, 베이징창스연합공관자문유한공사. 공상국의 정보를 보면, 창스후동광고가 설립되기 전에, 명청을 먼저 비준신청한 신청서에 나오는 투자자는 쑨슈민(孫淑敏)과 링후젠이다 쑨슈민은 바로 링팡쩐의 처이다. 그후 궈자(郭嘉)가 링후젠을 대체하여 투자자의 하나가 된다. 관하오(關皓)는 이 회사의 명칭신청을 대행한 바 있는데, 등기기관ㅇ; 규정한 피위탁자요건에 맞지 않아서 결국은 주주인 궈레이(郭磊)가 대행하여 처리한다.

 

2004년 ㅡ레이(石磊)가 링후진의 환멍(環盟)공관에 가입한다. 그리고 각각 궈레이, 관하오와 창스합력회전, 창스영항자문을 설립한다. 전자는 2009년 중국렌통의 제네바세계전신전람회의 부스를 설계한다.

 

2014년 11월 27일부터, 중공중앙순시조가 롄통에 들어간 후, 중국렌통왕뤄 분공사 부총경리 겸 네트워크건설부 총경리인 장즈장(張志江), 정보화와이비지니스사업부 총경리 종신화(宗新華)가 차례로 낙마한다.

 

2014년 12월 30일, 중국렌통의 관계자는 <펑파이신문>에 이렇게 확인해주었다: "국제업무부 총경리 얜보(閆波)는 해외출장을 이유로 보고한 후, 지금까지 연락이 되지 않는다. 아마도 이미 개인적으로 도피한 것같다."는 소식이 내부에서 이미 널리 퍼져 있었다.

 

당해 인사는 이렇게 토로한다. 중국롄통은 본사와 각지 분공사에 통지하여, 처장급이상의 관리의 공용,사용여권을 모두 압수했고, 각지 분공사의 1인자 및 조건에 부합하는 인물의 여권은 이미 그룹으로 보내어 졌다.

 

롄홍의 현임 총재 천이민은 전 중공국가부주석 쩡칭홍의 비서출신이다. 2007년 왕통집단의 고위직을 맡았고, 신롄통준비조 부조장을 맡았고, 롄통,왕통합병후 현직에 임명되었다.

 

링지화이후 시진핑의 다음번 목표는 누구인가?

 

2014년 12월 22일, 링지화가 낙마한 소식이 인터넷에서 나왔고 뜨거운 논의를 불러왔다. 네티즌들은 속속 추측했다. 다음번 '호랑이'는 누구일까? '호랑이가 갈수록 커지니, 다음번 큰 호랑이가 기대된다. 그래서 다음번 '호랑이'가 누구일지를 알고 싶은 것이다. 호랑이의 직급은 기록을 갱신하며 계속 올라간다.  아마도 이 말이 바로 답을 말해주는 것일 것이다.

 

어떤 네티즌은 이렇게 말한다. 소문이 결국은 확인되었다. 이는 금년 제4대 중량금 '호랑이'이다. 다음 번은 누구일까? 알고 있겠지만, 그 몇몇 어르신급의 '하산호랑이'는 아마도 도망칠 수 없을 것이다.

 

후베이 우한의 네티즌은 이렇게 말했다: 재직하고 있는 큰 호랑이를 붙잡다니, 리듬상 다음번 호랑이는 은퇴한 '큰 호랑이'일 것이다. 설마....

 

같은 해 12월 22일 <블룸버그사>의 보도에 따르면, 링지화에 대한 조사가 암시하는 것은 설사 전 정치국상위 저우용캉을 포함한 고위관리들을 낙마시킨 후이지만, 시진핑은 절대로 발걸음을 멈추지 않을 것이라고.

 

시사평론가 사달은 이렇게 말한다. 링지화의 낙마후, 다음번에 충격을 받을 사람은 쩡칭홍, 혹은 현재의 그 몇 남은 장쩌민파의 상임위원, 아니면 아예 직접적으로 장쩌민 본인일 것이다.

 

미국 컬럼비아대학 정치학 박사이며 저명한 시사평론가인 리텐샤오(李天笑)는 이렇게 말했다. 베이징이 이번 링지화를 버림으로써 나타내고 싶어하는 의도는 다음번 장쩌민파의 부패세력을 타격하는데 더욱 기세를 올릴 것이고, 앞으로 더욱 큰 호랑이를 붙잡을 것이라는 것을.

 

리텐샤오는 또한 이렇게 말한다. 현재 시진핑이 링지화를 버린 것은, 주요 목적이 장쩌민파을 타격하는 강도를 더욱 강하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현재는 시진핑과 왕치산이 호랑이를 잡고 있는데, 링지화를 통하여 외부에 이런 사정을 설명하고자 하는 것이다. 누구든지 문제가 있으면 잡는다는.

 

리텐샤오는 또한 이렇게 말한다. "장쩌민 본인은 바로 시진핑의 전체 '호랑이때려잡기'의 최종목표이다. 이런 상황하에서, 링지화처리는 실제로 시진핑이 장쩌민을 대리는데 장애를 없앤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