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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정치/링지화사건

링지화, 쩡칭홍, 자팅안: 위험한 '대내총관'

by 중은우시 2014. 12. 27.

글: 왕해천(王海天)

 

링지화의 낙마는 여론의 강렬한 반향을 불러 일으켰고, 국내외의 촛점은 모두 그가 이전에 가졌던 신분에 집중되고 있다: 링지화는 오랫동안 중공중앙 전총서기 후진타오의 비서를 지냈다. 속칭 '대내총관'을 지냈다. '대내총관'은 중공최고권력에 가장 가깝게 있는 직무라고 볼 수 있다. 링지화의 부패는 기실 특별한 경우가 아니다. 이전에 똑같이 '대내총관'을 지낸 쩡칭홍, 자팅안도 일찌기 권력을 남용하여 대거 부정부패하고, 자신의 심복을 곳곳에 심어 파벌을 만들었으며, 앞으로 링지화와 같은 최후를 맞이할 것으로 얘기되고 있다.

 

"대내총관"은 그 직무의 특수성으로 쉽게 권력을 남용하고 사회에 큰 해악을 끼칠 수 있는 자리이다. 최근 들어 해외매체는 링지화를 포함한 3명의 '대내총관'이모두 3단계를 거쳐 '파벌' 맹주가 되고, 그 위해가 아주 심했다고 말한다.

 

보도에 따르면, 링지화는 '혁명2세대'출신이다. 부친의 관직은 비록 높지 않았지만, 링지화는 그래도 그것을 기반으로 관료의 길에 들어섰다. 그가 공청단현위에서 일한 때로부터 계산하면 공청단에서 19년간 있었으니, '공청단파'로 불릴 자격이 충분하다; 링지화는 원래 산시 사람으로, 득세후 기회를 틈타 베이징에서 '서산회'를 조직한다. 관방매체에서 '산시방'부패의 '집우이자(執牛耳者)'라고 불린다; 그외에 링지화의 가장 잘 알려진 신분은 바로 '비서방'의 구성원이다; 그는 일찌기 후진타오의 대비서 - 후진타오판공실주임을 거쳐 나중에 중공중앙판공청주임으로 승진하여 한때 권력이 조야를 흔들었다.

 

보도는 해외매체인들의 평론을 소개하는데, 링지화는 조석으로 후진타오를 곁에서 모셨다. 그는 후진타오의 생각과 의도를 가장 잘 이해한다고 말할 수 있고, 후진타오에게 진언하기 가장 좋은 자리에 있었다. 후진타오가 누구를 만나고 누구를 만나지 말지는 그가 결정한다. 후진타오에게 어떤 문건은 올리고 어떤 문건은 올리지 않을지, 어떤 정보는 보고하고 어떤 정보는 감출지도 그가 결정한다; 그는 후진타오의 습관과 약점을 살펴서, 그가 좋아하는 것에 맞출 수 있었다; 링지화는 기상만하(欺上瞞下)하여 그는 자신의 손으로 하늘을 가릴 수 있었다. 가족들이 권전(權錢)결탁을 하도록 하였고, 재물을 긁어모았다; 그리고 정치적 야심이 팽창하여, 방파를 만들고, 관직을 주면서 자신의 소집단을 경영했다.

 

분석에 따르면, '대내총관'의 권력의 길은 왕왕 관료사회의 '삼부곡(三部曲)'으로 계속 올라간다.

 

제1보, 여러해동안 근면하게 일을 하며, 충성심이 강하다. 그리하여 지도자의 신임을 얻는다. 이 과정은 왕왕 지도자가 아직 최고권력을 얻기 전부터 시작되며, '같이 고생하고, 어려움을 같이 겪는' 단계를 겪는다.

 

제2보: 지도자가 최고권력을 취득한 후, 대비서도 수창선고(水漲船高)하여 '중남해 대내총관'이 된다; 지도자의 나이가 점점 들거나, 권력을 넘겨줄 때가 되면, 그는 요직에 보내어진다. 그리하여 최고지도자의 정치적 대리인이 된다. 동시에 그들에게 자신의 공간이 부여된다. 이제 그들은 자신의 정치적 자본을 축적할 수 있게 된다.

 

제3보: '총관'의 날개가 튼튼해지면, 자신의 방파를 만들기 시작한다. 그 후에 자신은 '뒷배경'이 되어 당내 한 방파의 맹주가 된다.

 

모두 알다시피, 쩡칭홍도 일찌기 중국공산당의 전 지도자 장쩌민의 '대관가'였다. 일찌기 쩡칭홍은 위츄리(余秋里)에게 발탁되어 석유계통에서 성공한다. 1989년 6.4사태이후 쩡칭홍은 중공중앙총서기로 승진한 장쩌민을 따라 베이징으로 간다. 전후로 중공중앙판공청부주임, 주임이 된다. 바로 이 단계에 쩡칭홍은 권력을 확장하고 자신의 '방파'를 건립한다.

 

해외잡지 <중국밀보>는 일찌기 쩡칭홍이 장쩌민을 도와서 몇 가지 '대사'를 해냈다고 한다. 장쩌민의 지위를 공고히 하게 만든 동시에, 많은 자신의 정치적 자본을 거둔다.

 

보도에 따르면, 쩡칭홍은 먼저 '이간계'를 통하여 등소평의 손을 빌어 양가장을 숙청한다. 그리하여 장쩌민은 집정이래 큰 재난을 피해갈 수 있었다. 그후에 장쩌민을 도와서 천시통을 끌어내리고, 리펑의 권세를 최대한 약화시킨다. 그외에 쩡칭홍은 암중으로 보이보와 연결하여 그가 나서서 연령을 이유로 차오스가 물러나도록 만든다. 그리하여 장쩌민은 가장 꺼려하던 견제역량을 권력중심에서 몰아낼 수 있었다.

 

장쩌민의 권력이 공고해지면서, 쩡칭홍도 순조롭게 상승궤도를 탄다. 그리고 자신의 세력을 심는다. 중국공산당조직부 부장을 지낼 때, 쩡칭홍은 중앙에서 지방까지 대량으로 장쩌민파 인물과 그 자신의 심복을 심는다. 이 기초 위에서 16대인사를 주도하고, 이어서 정치국 상임위원에 들어간다. 쩡칭홍의 '파벌'는 이렇게 확립되었다.

 

평론에서는 이렇게 지적한다. 쩡칭홍이 권력을 가지고 있던 기간에 장쩌민파의 인사들은 "더욱 부패할수록 더욱 잘나갔다" 그는 병을 앓으면서도 조야의 많은 인물들을 발탁하는데, 보시라이, 류징(劉京), 천량위, 멍젠주, 황리만(黃麗滿), 천즈리(陳至立)등이 속속 고위직에 올라간다. 장쩌민의 '부패치국'은 이렇게 전면적으로 판을 열게 된 것이다.

 

<법광>의 보도에 따르면, 장쩌민의 또 다른 비서 자팅안도 유사한 길을 걸었다.

 

자팅안은 1978년 대학졸업후, 전자공업부로 배치되어 일을 한다. 그리고 당시 제1부부장이던 장쩌민의 비서가 된다. 이 기간동안 자팅안은 장쩌민으로부터 인정을 받는다. 장쩌민이 상해로 갈 때도 그를 데리고 상해로 간다. 장쩌민이 북경으로 돌아올 때는 그를 데리고 북경으로 온다. 자팅안은 1994년에 중앙군사위 판공청 부주임 겸 군사위주석판공실주임이 된다. 2002년 중공16대에서 장쩌민은 비록 당,정대권은 내놓았지만, 군권은 내놓지 않았다. 시간을 아껴서 군대내에 자신의 심복들이 요직을 차지할 수 있도록 안배했다.

 

2003년 12월, 장쩌민은 자팅안을 중앙군위판공청 주임으로 앉힌다. 2년후, 장쩌민이 군사위주석에서 물러날 때, 쉬차이허우, 궈보슝등 군대내 장쩌민파 적계의 영향력을 이용하여, 자팅안은 여전히 중장으로 승진한다. 심지어 중앙군사위 기율검사위원회의 지도자중 한 명이 된다. 2008년, 자팅안은 다시 총정치부 부주임이 되고 상장의 계급을 받는다. 그저 아부만 할 줄 아는 '가노(家奴)'가 이렇게 고위장군으로 변신한 것이다.

 

보도에 따르면, 자팅안은 군내내에서 대거 부패를 저지른다. 그 위해성은 지위와 권력이 올라가는 것과 정비례했다. 십여년전에 자팅안은 위안화(遠華)사건의 주범 라이창싱(賴昌星)과 관계가 깊다. 최근 몇년 당국이 조사한 몇명 군대내의 '호랑이' 예를 들어 해군부사령관 왕셔우예(王守業), 총후근부 부주임 구쥔산(谷俊山), 국방부장 창완췐(常萬全)등이 있고, 마지막 표적은 자팅안의 몸에 집중되고 있다. 왜 이들을 조사하는데 저지하는 힘이 그렇게 클까. 심지어 조사를 몇년씩이나 하고도 처리하지 못한 경우도 있다. 그 중요한 원인중 하나는 바로 자팅안이 방해했을 뿐아니라, 그의 상사인 장쩌민도 계속하여 손을 써서 막았기 때문이다. 심지어 구데타를 일으켜 시진핑을 끌어내리려고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