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제갈량)

제갈량은 싸움을 잘 했을까?

중은우시 2014. 5. 29. 23:57

글: 조종국(曹宗國)

 

현재의 여론은 일방적으로 제갈량이 싸움은 잘 못했다는 것이다. 첫째는 <삼국연의>에서 그를 너무나 신격화해서, <삼국지>와의 차이가 아주 크고, 둘째는 일부 사학자 특히 모택동, 속유와 같은 군사가들이 모두 그에 대하여 이렇게 평가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필자는 제갈량은 전투에서 <삼국연의>에서처럼 신적인 존재는 아니었지만,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전투를 못하지도 않았다. 반드시 역사적 사실을 존중하여 정확하게 평가해야할 문제이다.

 

첫째, 제갈량은 촉한의 입국과 영토개척에 대하여 군사적인 공헌이 매우 크다. 어떤 사람은 말한다. 적벽대전, 취서천(取西川)은 모두 제갈량과 관계가 없다고. 그는 그저 칠종칠금과 육출기산을 했을 뿐이라고, 그리고 후자는 도로아미타불이었다고. 그러나 그것은 역사적 사실에 부합되지 않는다.

 

먼저 제갈량이 적벽대전과 취서천 가운데에서의 구체적인 업적은 별론으로 하고, 다만 이 두가지 사건은 기실 모두 그의 전체적인 전략기획하에서 전개된 것이다. 모택동은 제갈량이 <융중대>에서 제안한 진천(秦川)과 형주(荊州)의 두 방면에서의 출병하여 조위에 가위형태의 포위망을 구성하는 것은 병력을 천리 먼 곳에 나누는 것이어서 실제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전투를 고려하면 확실히 이런 문제가 있다. 그러나 전체적인 전략적으로는 괜찮은 것이다. <융중대>는 전투계획이 아니라 정치군사경제의 총체적인 전략이었다.

 

제갈량이 하산하자마자 조조는 대거 남하를 한다. 유비를 직접 향했다. 박망파의 전투는 제갈량이 지휘한 것이 아니다. 역사적 사실은 확실하지 않다. 다만, 유비의 대철수에 그는 분명히 참모로 참가했을 것이다. 당시 쌍방의 병력은 차이가 컸다. 형주부대의 주력인 이채(二蔡)는 이미 투항했다. 상황이 아주 위급했다. 다만 유비의 이번 철수는 이전처럼 낭패하게 도망치는 것이 아니라 확실히 질서가 있었다.

 

<삼국지>에는 전투의 구체적인 상황을 상세히 기록하지 않았다. 다만 아래의 안배는 명확히 기록하고 있다. 당시에 장비가 후방을 막았고, 조운은 유비와 가족을 호위했으며, 제갈량은 유비를 따라서 행동했다. 가장 칭찬받을 일은 그들이 이런 상황하에서 목숨을 건지려고 하지 않고, 관우를 보내어 한 무리의 인마를 이끌고 먼저 동쪽으로 가게 한 것이다. 이것은 동오와 연락하려는 것일 뿐아니라, 동시에 강하에 주둔하고 있던 유표의 잔여부대를 인수하려는 것이다. 그리고 유비가 도착했을 대 도강하여 남쪽으로 철수할 준비를 한 것이다. 이 배치는 아주 안목이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만일 유비가 조조의 군대에 밀려서 강가에 이르렀을 때, 퇴로가 없는 것이다. 싸울줄 아느냐 아니냐는 공격만을 보아야 할 것이 아니라 철수도 보아야 한다. 패전때 긴급히 철수하는 것을 보면 지휘수준을 알 수 있다.

 

적벽대전에 대하여 비록 주로는 주유가 싸운 것이지만, 제갈량의 작용도 무시할 수 없다. 그의 작용은 차동풍이나 초선차전이 아니다. 손유연합을 이루어 조조에 항거한 것이다. 그리고 유비측의 1만영의 인마를 지휘하여 협력작전을 펼친 것이다. <삼국지>의 <손권전>에는 이런 기록이 있다. "손권은 병력 3만을 주유에게 주었다." 그리고 <제갈량전>에는 동시에 이렇게 기록한다: "제갈량은 명을 받들어 조조를 적벽에서 힘껏 막아낸다." 소위 '명을 받들어'라는 것은 당시 제갈량은 삼고초려로 처음 하산하여 아직 '군사'가 아니었다. 그래서 독립하여 지휘를 할 수가 없었고, 그저 유비의 명령을 받드는 형태호 전방에서 작전을 지휘해야 했다. 당시 유표의 큰아들은 1만여명의 부대를 이끌고 강하에 주둔하고 아직 조조에 투항하지 않았다. 관우도 약간의 병력을 이끌고 이 곳으로 철수해 있었다. 이들 부대는 바로 제갈량의 지휘하에 적벽대전에 참가하는 것이다.

 

<삼국연의>에는 제갈량과 주유가 서로간에 시기하고 질투하며 서로 싸우는 것을 묘사한다. 그것은 그저 작자의 속좁은 마음이 반영된 것이다. 당시 제갈량의 명성은 크지 않아서, 주유가 그를 질투하고 해칠 리가 없었다. 대적을 앞에 두고, 생사를 가늠하기 힘든 상황하에서 그저 서로 힘을 합칠 수밖에 없었다. 당연히 적벽대전의 주력은 동오의 주유 부대였다. 유비의 당시 역량은 아주 약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전후에 그는 원래 정정당당하게 유표의 형주 땅을 차지했을 것이다. 왜 '빌려야' 했겠는가. 그리고 왜 정략결혼을 해야 했겠는가. 이것은 모두 실력이 충분히 강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나중에 유비가 남군사지(南郡四地)를 점령하고 제갈량에게 세금을 거두는 일을 책임지게 한 일은 있다. 다만 제갈량이 단지 이 일만 했다는 것은 아니다.

 

다시 취서천을 얘기해보자. 유비는 처음에 확실히 제갈량, 관우, 장비, 조운은 모두 형주에 남겨서 지키게 했다. 왜냐하면 서천은 아직 얻은 것이 아니므로, 형주를 잃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그는 단지 방통과 법정만을 데려가서 먼서 시탐한 것이다. 나중에 방통이 낙봉파에서 죽고, 제갈량은 바로 제갈량, 장비, 조운에게 사천으로 들어오도록 명한다. 서천이 평정된 후, 제갈량은 '죄장군부사, 괘군사장군'으로 발탁된다. 그는 이때부터 '군사'가 되고, 군사총사령관이 된다. 이를 보면 제갈량은 취서천의 과정에서 걸출한 군사적 재능을 보여주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유비의 용인술은 절대로 과장된 것이 아니다. 능력이 있는지 없는지를 보고 사람을 쓴다.

 

여기에서 말이 나온 김에 한 마디 더 하자면, 모택동은 관우로 하여금 형주를 지키게 한 것에 대하여 제갈량이 제대로 사람을 쓸 줄 모르는 것으로 설명했다. 이것은 억울하다. 알아야 할 것은 관우로 하여금 형주를 지키게 한 것은 제갈량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유비가 친히 결정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비록 관우에게 문제점이 없지 않지만, 그리고 이로 인하여 큰 실수를 저지르게 되지만, 당시 유비가 그를 보내지 않으면 누구에게 믿고 맡길 수 있었겠는가? 장비는 더욱 거칠고 조급하며, 조운은 젊고 소원하다. 이런 중임은 당연히 자신의 둘째동생이 맡을 수 밖에 없다. 사실상 제갈량이 나중에 관우에게 여러번 말한다. 관우는 마초의 일로 감정이 흥분되었을 때, 제갈량이 그에게 이를 지적해준 바 있다. 위연의 반골은 제갈량이 본 것이다. 당연히, 마속의 일은 제갈량이 책임져야 한다. 그는 이로 인하여 스스로 1급을 강등한다.

 

이상은 제갈량의 군사공헌이다. 당연히 가장 중요한 것은 나중에 그가 남방을 정복한 것과 육출기산이다. 이것은 바로 제갈량의 전투의 특징과 관련된다.

 

제갈량은 단순히 전투를 잘하는 장군이 아니라. 정치가, 모략가 겸 군사총사령관이다. 장상(將相)이 그의 한 몸에 모여 있다. 그래서 그는 전투를 할 때, 왕왕 정치, 경제, 군사를 전체적으로 고려한다. 큰 방략에 착안하여, 전체 국면을 보고 기획한다. 한 전투의 승패와 한 성 한 땅의 득실로 그의 군사재능을 평가해서는 안된다.

 

정사에서는 그를 "치국이 용병보다 강하다"고 한다. 그러나 '용병'은 원래 '치국'을 위한 것이 아닌가. 노신은 말했다. "제갈량의 일생은 근신(謹愼)이다." 그는 국가의 명을 받았는데 어찌 근신하지 않을 수 있을까. 진수(陳壽)는 말했다: "양재(亮才), 어치융위장(於治戎爲長)"(제갈량의 재능은 치융이 뛰어나다). 이 말을 중시할 필요가 있다. 제갈량은 친히 대군을 이끌고 남방의 불모지로 들어가 맹획을 칠종칠금하며 그 일대의 소수민족을 정복한다. 이것은 그가 '치융'의 고도에서 전투를 수행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제갈량이 진군한 후 나중의 역대관군중 운귀상(운남, 귀주, 호남)의 접경지역으로 진군한 사람이 드물다. 부득이 토사(土司)제도를 취하여 그들이 자치하게 했을 뿐이다.

 

육출기산에 대하여 이것은 제갈량 일생의 가장 주요한 군사사업이다. 진수의 평가는 이렇다. "그러나 매년 군사를 동원하면서도 성공하지 못했다. 개략 응변장략(應變將略)은 그가 잘하는 분야가 아니다." 이 말은 바로 국가안전의 전략고도에서 이 문제를 본 것이다. 육출기산은 확실히 인력과 재력을 적지 않게 소모했다. 공성약지의 효과도 크지 않았다. 다만 우리가 보아야 할 것은 제갈량의 전략목적은 조위의 화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촉국이 당시에 그런 실력을 갖추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가 싸운 것은 정치적인 전쟁이다. 이공위수(以攻爲守)의 적극적인 방어전이었다. 소위 정치적 전쟁이라는 것은 하로 '한적불양립(漢賊不兩立)'이라는 대의로 한나라 정통으로 조위를 토벌한다는 기치를 내건 것이다. 이는 조조에게 정치적 압력을 계속 가하는 것이다. 제갈량은 위연이 자오도를 통해 장안을 기습하는데 동의하지 않았다. 첫째는 모험을 하고자 하지 않은 것이고, 동시에 정의의 군대라는 고려에서이다. 소위 적극적 방어라는 것은 그 전선에서 싸우지 않더라도, 일년내내 많은 병력을 파견하여 지켜야 한다. 마찬가지로 거대한 인력과 재력이 드는 것이다. 차라리 공격태세를 취하여 위하력을 보여주는 편이 낫다. 제갈량은 승상의 몸으로(실제로는 최고의사결정자), 친히 6번이나 출정한다. 임금에게 글을 올리며 눈물을 흘리고, 마지막에는 오장원에서 죽는다. 어찌 쓸데없는 일이겠는가. 당연히 그도 군대를 주둔ㅎ시키고 둔전하며 변방을 방어하는 방법도 취한다. 제갈량이 이렇게 운용한 것은, 그 시기의 국가안전을 유지하는데 확실한 효과가 있었다. 어떤 전투는 제대로 싸우지 못했는데, 그것은 원래 병가지상사이다. 하물며 상대방 사마의도 보통내기가 아님에야.

 

제갈량은 군사적으로 치군엄정(治軍嚴正)과 진법연구, 병기개혁의 특징을 나타낸다. 이것은 역상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제갈량의 전투특징은 확실히 <삼국연의>에서 묘사된 것처럼 기모궤사(奇謀詭詐), 신기묘산은 아니다. 오히려 그의 신분지위에 더욱 부합하고 더욱 고명한 특징을 보인다. 논자는 역사적 사실을 존중하지 않을 수 없다. 가볍게 그의 군사재능을 부정해서는 안된다. 제갈량은 사후에 촉한에서 '무후(武侯)'에 봉해졌을 뿐아니라, 나중에 동진에서도 그를 "무흥왕(武興王)"에 추존한다. 이 '무'자는 절대로 아무렇게나 부여하는 것이아니다. 당시의 사람은 우리보다 더욱 제갈량의 '무공'을 이해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