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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정치/저우용캉사건

자샤오예(賈曉曄): 저우용캉의 부인

by 중은우시 2014. 12. 27.

글: 양국선(楊國選)

 

 

 

 

자샤오예에 관하여 모든 것은 신비로와 사람들이 놀라운 눈빛으로 볼 정도이다. 아마도 시간이 너무 오래되어서인지, 기억은 인터넷상의 그녀에 대한 흔적과 마찬가지로 얼마 남아 있지 않다. 그러나, 최근 매체기자들은 그녀의 출생지와 그녀를 잘 아는 선배, 스승, 부친과 그녀의 동료를 인터뷰했고, 자샤오예의 신비로운 면사는 드디어 벗겨지게 되었다.

 

옛날 대학때 스승은 자샤오예를 회고하면서 연속으로 그녀가 예쁘고, 머리카락이 조금 길고, 얼굴은 네모나고, 눈은 컸다고 칭찬했다. 그녀와 알고 지내던 사람들에 따르면 자샤오예는 키가 165센티미터이상이고, 평소에는 비교적 온화하나, 때때로 성깔을 부릴 때도 있다고 한다.

 

보통, 많은 사람들이 가진 그녀에 대한 인상이다.

 

여러 해 이후, 그녀는 더 이상 보통이 아니게 되었다. 보통의 생활은 그녀에게서 멀어졌다. 그 때, 그녀는 이미 낙마한 전 중앙정치국 상임위원 저우용캉의 두번째 부인이 되어 있었다. 이전에 여러 매체에서 보도했지만, 자샤오예는 2001년경 저우용캉에게 시집을 간다.

 

자샤오예의 출생

 

이야기는 자빙원(賈丙文)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다퉁(大同)시 다퉁현 샤오왕촌(小王村)은 자샤오예의 부친 자빙원이 출생한 곳이다.

다퉁시지구에서 샤오왕춘까지 60여키로미터의 도로는 울퉁불퉁하고 도로의 양측은 사람 키높이의 옥수수와 해바라기가 가득하다. 황토언덕 너머로 가끔 양떼가 보이곤 한다.

마을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자씨집안은 당시에 아주 가난했으며, 자빙원이 18,9세때 촌을 떠나 시내로 가서 공부를 했다. 자빙원은 어려서부터 악곡을 좋아했고, 악기를 다루는데 능했다. 그래서 예술전문학교에 입학한다.

졸업후, 자빙원은 다퉁시 링츄현(靈丘縣)의 한 극단(劇團)에서 일했고, 현지의 초등학교 음악교사를 처로 맞이하여, 세 딸을 낳는다.

1968년 7월 2일, 링츄현에서 출생한 자샤오예는 집안의 둘째이다. 언니 자샤오샤(賈曉霞)는 그녀보다 두 살이 많다.

마을 사람들의 회고에 따르면, 1976년 이전에 자빙원은 자주 가족을 데리고 마을로 돌아와서 묘를 참배했다. 그때 그는 모두 버스를 타고 이웃마을인 동허우커우촌(東後口村)까지 와서 다시 12킬로미터길을 걸어서 묘까지 갔다.1976년이후, 자빙원은 마을로 거의 오지 않았다. 쟈씨집안의 샤오왕춘의 주소지는 일찌감치 무너지고 파괴되었으며 수십년간 버려져 있었다.

1970년대 후반 자빙원은 다퉁시 얜베이예술학교(雁北藝校)에서 교편을 잡는다.

다퉁에서 그를 아는 사람에 따르면, 당시 얜베이예술학교는 산시성예술학교 얜베이분교라고도 불리웠다. 졸업하면 일자리를 배정받을 수 있어서 매년 입학하려는 학생들이 아주 많았다.

얜베이예술학교에서 공부하거나 일했던 여러 사람들의 회고에 따르면, 자빙원은 얼후(二胡)를 잘 탔다. 그러나 전문가라고 하기는 곤란했다. 학교에서는 어문, 정치, 예술개론같은 류의 문화수업을 담담했다. 그는 일지기 학교의 교무처 부처장, 판공실 부주임등의 직무도 맡은 적이 있다.

자빙원의 이전 이웃에 따르면, 자빙원은 자주 동네에서 바둑을 두었다. 그의 세 딸은 잘 보이지 않았는데, 아마도 학교에서 기숙했기 때문일 것이다.

 

구학(求學)

 

1983년, 자샤오예는 다퉁2중(大同二中)에 입학하여 공부한다. 언니인 자샤오샤는 그녀보다 2학년이 많았다.

다퉁2중은 다퉁시에서 가장 좋은 중학중 하나이다. 자샤오예를 가르친 바 있던 고중반주임인 샹씨성의 선생님은 자랑스럽게 말했다. 당시 그가 맡은 반의 학생중 95%이상은 모두 대학본과에 합격했다고.

항씨성의 반주임은 기억하고 있었다. 자샤오예는 학교에서 성적이 두드러지지는 않았고. 비교적 보통이었다. 그에게 깊은 인상을 준 것은 자샤오예는 집안이 비교적 가난해서 학교 선생이 자주 식권을 그녀에게 주었다고 기억한다.

일찌기 고3때 가르친 바 있는 자샤오예의 류씨성의 선생은 조심스럽게 말했다. 당시 반의 학생들은 모두 좋은 학생들이었고, 모두 공부를 열심히 했고, 자샤오예도 열심히 공부했다.

긴장돤 고중생활이 끝나면서, 자샤오예는 멀리 창사(長沙)에 있는 중난공업대학(中南工業大學)에 입학한다. 관리공정전공에 재무관리방향이었다.

중난공업대학의 원래 명칭은 중난광야학원(中南鑛冶學院)이다.2000년 4월 29일 창사철도학원과 후난의과대학과 합병하여 중난대학이 되고 교육부 직속의 전국중점대학이 된다.

24년전의 성적표는 자샤오예의 중난공업대학 4년간 학습생활을 기록하고 있다. 성적표에서 자샤오예는 관리공정과 86학번 1반이고 학번은 32호였다.

1학기때 그녀는 아마도 놀기좋아해서인지, 고등수학을 낙제하여 재수강해야 했다. 그러나 2학기때 그녀는 이 과목에서 91점을 받는다.

그녀의 영어는 안정적이지 못했다. 1학기에는 81점, 2학기에는 72점, 3학기에는 77점, 4학기에는 80점을 얻었다. 1989년 1월 그녀는 60.5점의 '저공비행'으로 국가4급영어시험에 합격한다.

그녀는 일찌기 분야공장(粉冶廠)에서 실습을 한다. 그리고 채선(采選), 야련(冶煉)공장으로 가서 실습을 한다. 그리고 자신의 졸업논문을 창사구리알미늄공장의 원가통제라는 현실적인 문제에 대하여 썼다.

일찌기 자샤오예를 가르친 바 있는 재무과정의 류씨성의 교수는 렇게 소개한다. 자샤오예는 당시에 아주 좋은 아가씨였다. 겸손하고 순박하며, 공부를 열심히 하였다. 수업후에는 교단으로 가서 질문을 하곤 했다.

그외에 류씨성의 교수는 기억하고 있었다. 산시에서 온 자샤오예는 베이징, 상하이같은 대도시에서 온 아이들처럼 활발하지는 않았지만, 침울하지는 않았고, 학교친구들과 잘 지냈고, 친구도 많았다.

일자리를 잘 찾기 위하여, 당시에 자샤오예는 재무관리방향을 선택한다. 졸업후에는 텐진화베이지질조사국에서 일을 한다.

류씨성의 교수가 보기에, 이는 당시에 아주 좋은 선택이었다. 그러므로 자샤오예가 그녀와 작별할 때, 그녀는 자샤오예에게 일자리가 괜찮다고 말해주었다.

1990년 7월, 자샤오예는 순조롭게 본과를 졸업하고 학사학위증을 받고 악록산을 떠난다.

CCTV의 옛 직원에 따르면, 자샤오예에 관한 기억은 1990년대 중반으로 소급되어 올라간다.

자샤오예와 함게 일한 적이 있는 CCTV 내부인사에 따르면, 자샤오예는 1995년경 CCTV에 들어갔고, 이전에는 그녀가 매체분야의 업무를 해보지 않았다고 한다.

CCTV재경채널에 들어간 후, 그녀는 일찌기 <매일재경>등 여러 프로그램에서 일했고, 업무는 프로그램편집이었다.

평소에 조용하게 일을 하던 다퉁 아가씨는 CCTV에서 일하던 후반기에 얘깃거리를 남긴다.

CCTV 내부 직원에 따르면, 자샤오예는 후반에 비교적 놀기를 좋아했고, 출근도 하루 하고 하루 빠지는 식이었다. 이 때문에 상사의 질책을 받기도 했다.

2000년이후, 자샤오예는 CCTV 재경채널을 떠난다. 그러나, 그녀는 일찌기 CCTV의 한 허직(虛職)을 맡은 적이 있다.

대다수의 젊은 CCTV 직원에 있어서 자샤오예는 하나의 '전설"이다.

그들은 이 신분이 특수한 '선배'를 본 적이 없을 뿐아니라, 곁의 누군가가 그녀를 이야기하는 것도 듣지 못했다. 어느 정도, 그녀의 이름은 하나의 금기가 된 것같다. 모두 입을 열어 말하지는 않았지만, 속으로는 말을 하지 않아도 알고 있었다.

류교수는 말한다. 2000년 졸업10주는 모임때, 자샤오예도 참가했다. 다른 동창들은 모두 창사에 이틀밤을 머물렀지만, 자샤오예는 하룻밤만 머물고 떠났다.

당시 자샤오예의 곁에는 한 사람이 따라다녔다. 자샤오예는 따라와서 사진을 찍는 사람이라고 말했지만, 동창들이 보기에 그녀의 보호를 책임지고 있는 것같았다고 한다.

 

리핑(李平): 링지화의 제수, 자샤오예의 부친의 제자이며 동료

 

CCTV의 유명 아나운서 리핑은 얜베이예술학교의 졸업생중 가장 유명한 사람중 하나이다. 자샤오예의 부친인 자빙원은 얜베이예술학교의 교사이다. 리핑은 졸업후 학교에 남아서 전공과목을 가르친 바 있다. 자연히 리핑은 자샤오예의 부친의 제자이면서 동료이다.

이 신분외에 그녀는 또 하나의 더욱 혁혁한 신분이 있다. 막 중앙기율검사위에서 '엄중한 기율위반으로 조직의 조사를 받는 중공18기중앙위원, 전국정협부주석, 중앙통전부부장 링지화의 제수이다. 1990년대 중반, 이미 CCTV 아나운서가 된 그녀는 신화사의 '왕청(王誠)'이라는 가명을 쓰던 링지화의 막내동생 링완청(令完成)에게 시집간다.

집이 다퉁현에 있어서, 1980년대, 자빙원은 한때 시내 동자(東街) 얜베이예술학교의 교직원숙사에서 거주했다. 같은 때 이 교직원기숙사에 살던 사람으로는 막 얜베이예술학교를 졸업한 리핑이 있었다.

리핑은 1960년 7월생으로 1975년에서 1980년까지 얜베이예술학교 가무반에서 공부했다.

"리핑의 키는 160센티미터가 되지 않는다. 에쁘고, 사진을 잘받고, 성격도 쾌활하다." 그녀를 잘 아는 사람이 한 말이다. 리핑은 얜베이예술학교를 졸업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모교의 한 바이올린을 켜는 선생과 결혼한다. 상대방의 성은 장(張)씨이고, 베이징의 지식청년이었다. 두 젊은이의 생활조건은 아주 힘들었다. 학교의 교직원숙사에 거주하는데 면적은 겨우 10여평방미터이다.

상술한 아는 사람에 따르면, 예술학교를 졸업한 후, 리핑은 먼저 얜베이문공단에 배정되어 가무배우가 된다. 외모가 출중하여, 그녀는 항상 공연에서 여주인공을 맡았다. 1980년대중만, 그녀는 산시TV에 들어간다. 그후에 장씨성의 베이징 지식청년과 이혼한다. 두 사람 사이에는 딸이 하나 있다.

그녀를 아는 사람에 따르면, 얜베이에술학교는 규모가 크지 않고, 교직원숙사에 거주하는 사람도 많지 않았다. 그외에 리핑은 졸업후 예술학교로 돌아와서 전공과목을 가르쳤다. "그녀는 자빙원과 분명히 알고 있을 것이다. 다만 잘아는지 여부는 불확실하다."

최소한, 리핑의 몇몇 예술학교동창의 인상 속에, 자빙원은 그들을 가르친 바가 없다. 리핑도 동창들에게 자빙원에 대하여 말한 적이 없다.

자빙원과 교분이 있던 학생은 기실 뤼량(呂梁)의 전 시장 딩쉐펑(丁雪峰)이다.

<중국경영보> 보도에 따르면, 1963년 다통시 줘윈현(左雲縣) 관자바오향(管家堡鄕)에서 태어난 딩쉐펑은 초중을 졸업한 후 다퉁예술학교 사회문화관리반에 입학한다. 마침 자빙원이 학교 판공실에서 일하고 있을 때였다.

당시 다퉁에는 얜베이예술학교와 다퉁예술학교라는 두 개의 예술류의 전문대학이 있었다. 딩쉐펑이 공부한 곳은 실제로 얜베이예술학교였다.

<중국경엉보>는 다른 사람의 말을 인용하여, 딩쉐펑은 뤼량시장의 자리를 얻기 위하여, 과거의 스승인 자빙원을 찾아가서 꽌시를 뚫어달라고 부탁한다. 뤼량 샤오이시의 두명의 기업가는 딩쉐펑을 위하여 자금을 모은다(각각 1800만위안, 50만위안) 그리고 자빙원의 베이징 집으로 보낸다.

모종의 원인으로, 자빙원은 이 돈을 나중에 돌려보낸다. 다만 딩쉐펑이 부탁한 일은 여러 사람을 거쳐, 결국 딩쉐펑이 최종적으로 뤼량시장에 오르게 해준다.

2014년 2월 20일, 산시성위는 딩쉐펑의 뤼량시위 부서기, 상위, 위원직무를 면직시키고, 딩쉐핑의 뤼량시인민정부시장직무를 면직시킨다.

두 달 후, 전인대 상임위원회는 표결로 확인한다: 산시성이 선출한 12기전국인대대표, 산시성뤼량시위전부서기, 전시장 딩쉐펑은 엄중한 기율위반으로 대표법의 관련규정에 따라 전인대 대표자격을 상실한다고.

자빙원이 바로 이 소식을 들었을 것같지는 않다. 그의 과거 동료는 이렇게 말한다. 1993년, 얜베이예술학교와 다퉁예술학교를 합병한다. 자빙원도 두 학교가 합병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퇴직한다.

"막 시작할 때, 그의 막내딸은 부정기적으로 학교로 가서 부친의 당비를 나부하고, 퇴직금을 받아갔습니다." 위에 언급한 동료의 말이다. 자빙원의 직장은 여전히 다퉁예술학교였지만, 듣기로 자빙원가족은 최근 몇년간 이미 국외로 이주했다고 한다.

얜베이문공단에서 몇년을 잠시 머문 후, 리핑은 산시TV에 들어간다. 그리고 종합프로그램 <오채빈분>의 '당가화단(當家花旦)'이 된다.

1993년, 산시에서 이미 유명해진 리핑은 CCTV로 옮겨간다. 리핑이 CCTV에 들어간 시기는 자샤오예보다 2년가량 빠르다.

이 해는 역시 <동방시공>이 시작한 해이다. 리핑은 그 프로그램의 '생활공간'부분을 맡는다. 따스한 느낌의 '백성들 자신의 이야기를 한다" 많은 관중들은 이 프로그램을 잘 이끈 아나운서를 기억한다.

2000년이후, 리핑은 CCTV 채널1에서 채널3으로 옮긴다. 또 다른 프로그램 <애심세계>의 MC가 된다.

<북경TV주간>의 그녀에 관한 보도에서는 이렇게 언급한다: "리핑의 남편은 신화사의 한 경험이 풍부한 기자이다. 동시에 사업에서 성공한 인사이다. 비록 자주 바빠서 집에서 식사를 하는 경우가 많지는 않지만, 어찌되었건, 그는 리핑이 마음을 움직인 첫번째 사람이다."

여러 소식통에 확인한 바에 따르면, 이 '신화시에서 일하는' '사업에 성공한' 남편은 바로 링지화의 동생 링완청이다. 리핑과 그는 1990년대에 서로 알았고, 두 사람은 모두 이전에 결혼을 한번씩 한 바 있다.

링완청은 1959년행으로, 1983년 지린대학 경제학과를 졸업한 후 신화사에 들어가 일을 한다. 21세기가 되면서 링완청은 신화사를 떠나서, '왕청'이라는 이름으로 정상관계망을 개척한다.

2007년 10월, <남방도시보>는 이렇게 보도한 바 있다. 당시 당의 17대대표, 산시성 발개위주임인 링정처는 매체에 이렇게 토로한 바 있다. 부친은 당시 신문을 보는 것을 아주 좋아했다. 그들이 출생했을 때, 부친은 신문에 가장 많이 나타나는 단어를 골랐다. 예를 들어, 노선(路線), 정책(政策), 방침(方針)등을 따서 자식의 이름을 짓는다. 이것이 바로 그들 형제자매 5명의 이름의 유래이다.

금년 6월 19일, 당시 산시성 정협부주석이던 링정처는 엄중한 기율위반혐의로 조직의 조사를 받는다. 7월 9일, 그의 관련직무는 정식으로 면직된다. 2014년 12월 22일 그의 또 다른 형인 링지화도 낙마한다.

 

결말

 

다퉁을 떠난 후, 자샤오예는 자신이 출생하고 성장한 도시로 거의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다퉁시의 여러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자샤오예와 부친은 일찌기 몇년전에 고향으로 돌아온 적이 있다. 그때 다퉁시 지도자들이 수행하여 구룡벽을 참관한 적이 있다. 자샤오예는 다퉁2중의 사람들을 통하여 자신이 공부하던 때의 선생을 찾으려 한 적이 있다고 한다.

2000년 1월, CCTV 부대장(副臺長) 리동성(李東生)이 줄을 대어주어, 자샤오예는 당시 중공 쓰촨성서기인 저우용캉을 알게 된다. 이때부터 그들은 혼외애인관계를 유지한다. 2001년 자샤오예는 그녀보다 26살이 많은 저우용캉에게 시집간다.

2010년, 대학졸업20주년모임에 자샤오예는 참가하지 않는다.

자샤오예의 언니인 자샤오샤는 2006년경 카나다로 간다. 월스트리트저널의 보도에 따르면, 자샤오예는 중석유집단의 라틴아메리카사업을 관리했다. 동시에 수단프로젝트에도 참가한다. 나중에 중석유집단의 카나다의 대표자가 된다.

2014년 7월 29일 17시 59분, 항간에 소문이 돈지 오래된 소식이 마침내 확인된다: 중공중앙은 저우용캉을 엄중한 기율위반으로 중공중앙기율검사위원회에서 입건조사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그 날, 자샤오예는 46세 생일이 지난지 27일이 되었다. 이것은 아마도 그녀의 일생에서 가장 잊기 어렵고, 가장 특수한 생일이었을 것이다.

재신망의 보도에 따르면, 2013년 12월 자샤오예가 자유를 잃은 후, 자샤오샤의 행적은 묘연해진다.

"만일 자샤오예가 저우용캉을 만나지 않았다면 현재 이렇게 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도 분명 성취를 이룬 사람이 되었을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류씨성의 교수가 한 탄식이다.